잎싹님에게 보내는 이메일 - 『마당을 나온 암탉』을 읽고 : 김기윤

제1회 독서감상문대회 일반부 대상
김기윤
 

 
잎싹님을 만난 건 우연이었습니다. 잎싹님을 만났을 당시, 저는 온갖 이상과 꿈, 그리고 그 뒤에 따를 명예와 허영을 꿈꾸며 겉으론 당당한 척, 강한 척을 하고 있었죠. 하지만 사실은 두려웠습니다. 

세상 밖으로 나간다는 것이. 요란하게 부르릉대는 오토바이 위에 앉아 의기양양하게, 여유로운 척하고 있었지만 속으론 앞으로 고꾸라지는 것이 두려워 정작 액셀은 밟지 못하고 있는 꼴이었죠. 네, 이제서야 고백합니다. 저는 겁쟁이입니다. 그런 제가 사실은 잎싹님의 얘기를 처음 들을 때만 해도 얼마나 속으로 비웃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제 자신이 얼마나 어리고 유치했는지를 새삼 느끼게 됩니다.

 
잎싹님의 닭장 안에서의 생활은 저와 다를 바 없어 보였습니다. 그건 어느 곳보다도 안전하고, 편하다면 편한 생활이었지요. 그러나 무미건조한 일상이 되풀이되며 불투명한 미래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는 것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을 불안하게 합니다. 그래서 저도 이 곳을 벗어나고 싶어했습니다. 

또한 저에게도 동경의 대상이 되는 '마당'이 있었죠.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곳은 철저하게 제 머릿속에서만 가능한 공간이었습니다. 어떠한 어려움도, 장애물도 없죠. 적어도 제 상상 속의 마당은 따스한 양지입니다. 잎싹님이 생각했던 것처럼요. 그러나 저는 제 상상 속의 마당과 현실 속의 마당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너무 일찍 알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인지 한쪽엔 이 곳의 안락함이, 다른 쪽엔 두려움이 각각 족쇄가 되어 제 발목을 붙들어 버렸죠. 잎싹님이 닭장을 나오기로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저는 님의 용기가 부러우면서도 한편으론 비웃었죠. 알을 낳아 병아리를 키워 보겠다는 그 하찮은 소망은 둘째 치고, 세상을 너무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닭장 안에서만 살았으면서 단순히 동경만 가지고 마당으로 나가고 싶어하다니…….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데……. 당신은 곧 상처받을 겁니다. 그리고 힘들어지고 후회하게 되겠죠.' 그러나 잎싹님이 운이 좋아(?)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어서 처음 만나게 되는 것이 적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저는 가슴이 뛰고 몹시 긴장하게 되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쫓겨다녀야 하는 신세라니……. 저는 잎싹님의 처지도 딱하였지만 왠지 내 자신이 그 처지가 된 것 같아 은근히 두렵고 짜증이 났습니다. 아무튼 나그네를 따라 마당으로 들어간 잎싹님이 친근하게 생각하던 마당 식구들에게 찬밥 신세를 당하며 결국은 내쳐질 땐 속으로 '그것 봐라' 하며 내 생각이 맞다는 사실에 우쭐하긴 했지만 저 역시 그들이 야속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잎싹님이었다면 제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비참할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잎싹님은 꿈을 버리지 않으시더군요. 우연히 알을 발견하고 그 알을 품으면서 혹시라도 어미가 와서 도로 빼앗을까 걱정했다는 이야기를 하실 때는 저 역시 모처럼 온 기회를 빼앗길까 조마조마했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님이 얼마나 실망하실지 짐작이 됐거든요. 지금까지로도 님은 물론이고 저도 충분히 상처받았으니까요. 특히 나그네가 나타났을 땐 '이젠 알을 되돌려 줘야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 알이 나그네의 것이라는 걸 저는 짐작하고 있었죠. 그리고 갑자기 사라진 뽀얀 오리의 행방도요. 하지만 나그네가 밤마다 소란을 피우는 이유에 대해선 저 역시 짐작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그 이유를 알았을 땐 눈물이 핑 돌더군요. 대가를 바라지 않는 희생이란 그 어떤 것보다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네……. 느끼셨겠지만 이제는 저도 모르게 님의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잎싹님이 아기 오리를 데리고 마당으로 돌아갔을 때 마당 식구들이 보여 준 태도는 정말 화나는 것이었습니다.
 
”어쩜 그렇게 서로 자기 입장만 생각할 수 있죠? 권력은 마음대로 휘두르면서 정작 인정은 베풀 줄 모르는 수탉이나, 모든 걸 다 가졌으면서도 빼앗길까 봐 안달하는 암탉이나, 자신 의 임무엔 충실할지 모르지만 규칙에 벗어나는 융통성이나 그걸 뛰어넘는 배려심은 없는 문지기 개나, 마치 인간 세상을 보는 것 같네요. 또 오리들은 어떻고요. 동정심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으면서 자신들의 혈통에선 지극히 이기적인 모습이 꼭 우리 인간들의 가족 이기주의적인 모습을 보는 것 같네요.” 저는 씁쓸하게 말했죠. 게다가 동물을 돈줄로만 생각해 날개를 자르고 잡아먹자는 말을 아무렇게나 하는 주인 인간들의 모습은 제가 인간이란 사실을 부끄럽게 했습니다. 그래요……. 잘 나오셨습니다. 남들이 뭐라고 손가락질하던, 오래 못 갈 거라 비웃던 아기 오리를 포기하지 않은 건 정말 잘 하신 겁니다. 마당 밖의 세상이 더 힘들 거란 생각이 제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지만요.
 
그런데 저의 이런 생각은 기우였습니다. 잎싹님은 못 느끼셨는지도 모릅니다. 님이 어느새 족제비와 대항하고 있었다는 걸요! 가만히 앉아 언제 적이 올지 몰라 끙끙대기보단 잠자리를 옮기는 등,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비록 잎싹님과 초록머리는 힘든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그런 뒷면엔 삶을 헤쳐나갈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셨습니다. 물론 저의 이 생각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더욱더 확고해집니다. 잎싹님도 말씀하셨잖아요? 어둠 속의 움직임을 판단하게 된 침착한 눈과 단단한 부리, 날카로운 발톱을 가지게 되었다고요. 그렇지만 초록머리가 커 가며 잎싹님과 멀어지는 것을 느낄 때 저는 서운했습니다. 특히 마당으로 돌아가자고 했을 땐 배신감마저 느껴지더군요. 그리고 초록머리는 가 버렸죠. 저는 잎싹님이 초록머리를 쫓아 마당 근처로 돌아갔을 때 님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잎싹님은 목숨까지 걸며 족제비에게서 자신을 지켜 주었는데, 잎싹님의 사랑이 그렇게 큰데도 그걸로 부족해 마당으로 돌아가다뇨? 님은 괘씸하단 생각도 안 드십니까?” 저는 이렇게 따졌죠. 그러나 님은 잔잔한 웃음만 띤 채 아무 말이 없다가 이야기를 계속하셨습니다. 저는 님의 침묵도 그랬거니와 초록머리의 어리석음이 둘을 곤경에 빠뜨리게 될 것 같아 불쾌해졌습니다. 그러나 곧 알게 됐습니다. 그 기다림의 이유를…….

누구나 잘못 생각할 수 있다는 것과 그런 과정들을 통해 인생을 배워 간다는 것을요. 이제 잎싹님은 어엿한 어미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닭장에서 마당을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던 그 닭이 아니었습니다. 그 모습은 님을 폄하하던 집오리의 우두머리가 먼저 알아보죠. 님의 모습은 야위고 창백하지만 왠지 모르게 강해 보인다고……. 아! 저, 그 모습을 알 것 같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중년의 사람들에게서 발견하곤 한답니다. 얼굴은 주름지고 몸은 늙었지만 젊음과는 다른, 그것으론 결코 흉내낼 수 없는 무언가를 풍기는 어른들에게서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세월과 경험이란 것이 얼마나 사람을 강하게 하는가를 느끼곤 했는데 우두머리가 님에게서 느낀 게 바로 그런 모습 아니었을까요? 저는 님이 진정 강해졌다는 사실을 족제비와의 관계 속에서 더욱더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늘 약자의 입장에서 쫓기기만 하던 님은 진정한 강자란 무엇인가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역전된 관계가 힘의 지배 관계가 아닌 이해의 관계로 발전했다는 사실도요. 저는 잎싹님이 죽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리 쉬이 잡힌 이유가 족제비가 새끼들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잡으리란 걸 이해했기 때문이 아닌지요? 이제 님의 이야기는 끝이 났습니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만 해도 알을 낳아 병아리를 키워 보겠다는 님의 꿈은 저에겐 하찮게만 느껴지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유행처럼 스쳐 지나가는 나의 꿈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어느 것이 진정한 꿈인지를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꿈의 크기보다는 그것이 개인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목숨을 걸고 지켜야(이뤄야) 할 무언가가 있다는 건, 책임감과 동시에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존재의 이유가 된다는 것을요.
 
'아! 내가 쓸모가 있구나! 이 세상에 내가 할 일이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는 순간 인간은 살아갈 의지를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왜 꿈을 꾸는 것이, 소망을 가지는 것이 중요한지도 알 것 같습니다. 그것은 나를 세상 밖으로 끌어낼 만큼 강렬한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거친 세파 속에서도 내가 흔들리지 않게 지켜 주는 단단한 뿌리 같은 것이라는 걸요. 이제야 제가 왜 그렇게 방황하고 두려워했는지에 대한 해답을 얻었습니다. 저에게 필요했던 건 그 어떤 무기도 아닌 바로 진정한 꿈이라는 것을요. 이제 작별 인사를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아, 제 오토바이는 아직도 '부르릉' 소리만 요란하냐고요? 아닙니다. 이제 제 오토바이는 시동이 꺼졌습니다. 그 대신 제 두 다리가 땅을 딛고 있습니다. 이젠 편하고 쉬운 방법으로 남들보다 앞서 가려고 하기보단 이 튼튼한 두 다리로 뛰려고요. 가끔 비바람도 만나겠죠. 달리다 돌부리에 넘어지기도 하고,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싶기도 하겠죠. 하지만 그런 가운데 강한 다리와 정신을 갖게 될 겁니다. 그리고 가슴에는 제 꿈을 안고 힘차게 달릴 겁니다. 그러다 보면 저도 날 수 있지 않을까요? 상상만 해도 즐거운 그 자유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