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석골에서 임꺽정을 만나다! 꿈 속 : 황은주

제3회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독서감상문대회
대학일반부 우수상 수상작
 
 
프롤로그

 
처음 임꺽정을 접한 것은 '의적'이란 지시어가 붙은 -익살스런 임꺽정의 얼굴을 표지로 한-동화책이었다. 기존의 전기문 과는 달리 영웅 신화의 한 갈래로 치부할 만큼 그 내용은 해학적이었다. 어린 나에게 있어 임꺽정은 홍길동과 다름없는 인물로 각인되었다. TV드라마에서 『임꺽정』이라는 인물을 형상화했을 때 강조하던 것이 '원작에 최대한 충실했다. ' 는 점이었다. 원작이라-'의적 임꺽정'? 동화책에서의 그의 이야기와 는 딴판이었던 관계로 자연스럽게 벽초 홍명희에 대 하여, 그리고 그의 미완의 작품『임꺽정』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다. 책을 읽은 몇주 동안 나는 청석골을 헤매고 있었다. 임꺽정을 만난 적은 없지만 .
 
총 10권으로 이루어진 『임꺽정』은 첫장을 펼쳤을 때 부터 '과연 이 책을 다 읽을 수 있을까.'란 부담감으로 먼저 다가 왔다. 그리고 나의 이런 생각을 계속 따나지 않게 했던 이유 중에 하나는 1권을 다 읽도록 주인공인 임꺽정이 나오지 않 았다는 점이었다. 그나마 1권의 '봉단편'에 임씨 성을 가진 사람이라고는 봉단의 친척 되는 임돌이라는 사람뿐이었다. 백정 양주팔이 다른 인물과 다른 비범한 인물로 그려져 있고 , 그의 스승인 이천년에 대한 이력이 언급되어 있을 뿐 좀처 럼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신문에 연재된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가늠해볼 수 있는 연대도 수십 년이려니와 1920년대 후반의 문장이라 고어가 많아서 스토리의 재미는 더해갔지만 계속 이 책을 읽게 될지는 장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갑갑증도 잠시, '피장편'에 들면서 그렇게도 고대하던 임꺽정이 등장했고 , '의형제편'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책에서 눈을 뗄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다. 연산군에서 성종대왕까지 이르는 역사적 사실에 맞추어서 실존 인물인 임꺽정 에 대한 작가의 상상력이 사실 이상의 현장감을 담으며 날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창을 잘 던지는 박유복이와 활을 잘 쏘는 이봉학이, 그리고 검술을 익힌 장사 임꺽정은 어릴 적부터 동고동락하는 사이 였다가 나중에 청석골패 도적으로 다시 만난다. 임꺽정은 갖바치 노릇을 하고는 있지만 위엄있고 도술에 능한 양주팔을 스승으로 모신다. 임꺽정은 그가 중이 되어 생불로 명성을 떨치고 있을 때 그를 보필해주고, 병인이 된 아버지를 극진 히 모시는 효자이다. 하늘이 내려준 장사로 묘사되는 꺽정은 시류(時流)에 동요하지 않고 유유자적하며 사는 인물이었다 가 나중에는 청석골패 도적 괴수로 그 명성을 떨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주요인물들이 더 흥미롭다. 우선 꺽정의 아내인 운총은 백두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여인으로 생마와 같은 인물이었다가 병해대사(양주팔)와 함께 동 행중이던 꺽정과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 또한 그의 동생 황천왕동이는 축지법을 익혀 다른 사람보다 서너 배나 빠르게 걸음을 걷는 인물로 그려진다. 새왕의 즉위와 함께 옥사가 일어나고, 이때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월수를 갚기 위해 박 유복이는 와신상담(臥薪嘗膽) 끝에 그 뜻을 이루게 되고 , 이봉학이 역시 가문을 다시 세우겠다는 생각으로 왜변에 참전 하여 공을 세우게 된다. 박유복이 원수를 갚고 피신하던 중에 장군신의 마누라인 여인을 아내로 취하게 되고 청석골을 지나다가 도적인 오가를 만나서 우여곡절 끝에 아내를 그의 수양딸로 삼고 함께 살게 된다. 한 번은 오가가 곽오주라는 정첨지댁 머슴에게 욕을 보이고 와서 그 앙갚음을 해줄 것을 박유복이에게 부탁한다. 박유복이는 무식하지만 꾸밈이 없는 그에게 인간적인 호의 를 느끼게 된다. 곽오주가 아내를 잃고 그의 자식마저 내동댕이쳐서 죽게하여 괴로워할 때 청석골로 불러들여 그를 보 살펴준다. 소금장수인 길막봉이는 매형의 원수를 갚아주고 돌아가는 길에 귀련이라는 처녀를 아내로 삼지만, 장인 장모의 괄시와 부인의 냉대로 청석골에 들어온다. 꺽정의 처남이기도 한 황천왕동이는 장기 두기를 즐겨하던 중에 백이방이란 자가 장기를 잘 둔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갔다가 그의 과년한 딸을 아내로 삼게 되는데 미색까지 겸비한 여인이었다. 배돌석이는 돌팔매질을 잘하는 이로, 이봉학이와 함께 왜변에 참전하여 공을 세우지만, 그가 상사로부터 받는 신임을 시 샘하는 이들에게 농락당하는 것을 참지 못해 싸움이 되어서 공 세운 것도 허사가 된 인물이다. 또한 만나는 아내들마다 조신하지 못하다. 비부쟁이 노릇에 젊은 과부까지 취하지만 결국 배돌석이는 청석골에 입당하게 된다.
 
이봉학이는 양민의 자식으로 왜변에서 공을 세워 벼슬을 하게 된다. 하지만 계향이라는 지조있는 관기로 인해 그를 신 임하는 이윤경의 슬하에서 벗어나게 되고 다시 복귀되었을 때 는 꺽정이를 도와주었다는 죄목으로 파직당하게 되고 조정 에 끌려가던 중 청석골에 들어오게 된다. 박유복, 곽오주, 길막봉이, 황천왕동이, 배돌석이, 이봉학이, 그리고 임꺽정은 칠형제지간으로 결의를 하게 되고 제갈량과 같은 지략을 겸비한 서림이라는 인물과 함께 거사를 꿈꾸다가 서림의 배신으로 몰락하게 된다. 이야기는 칠형제가 자모산성으로 향하던 중에 미완의 상태로 끝난다. 그 뒤를 이어 구월산성에 이르기까지 완결된 책들도 몇 권 있었다. 하지만 그 내용은 비슷한 면이 있을지는 몰라도 벽초 홍명희의 힘 있는 맥락으론 이어지고 있지 않았 다. 새왕 즉위와 함께 옥사의 희생자로 부모를 잃개 된 박유복과 이봉학이를 통해 조선시대 조정의 암울한 그림자를 보 는 듯 했고, 왜변시 백정이라는 이유만으로 군졸에 뽑히지 못하는 꺽정을 통해 당대 신분제도의 부당함이 아무리 가지런 하게 펴려고 해도 되지 않는 구부러진 머리카락의 고집스러움 같아 안타까웠다. 인물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억지스러운 면이 있었지만 각 인물들의 모습은 그 시대를 대변한다. 또한 책을 읽은 동안 홍명희 선생의 탁월한 서사적 추진력에 매료되었는데, 비단 임꺽정이란 한 인물에 초점을 맞춘 것 이 아니라 시대를 망라하는 이야기들과 우리가 알지 못하는 조선시대의 풍속도에 대한 그의 관심이 펼쳐 있었다. 예를 들어 박유복이 아내를 취하는 장면에서 '장군당'이라는 민간신앙을 들춰내어 그들의 행위를 세세히 설명하고 , 쇠도리깨 장사 곽오주를 통해 울던 아이도 울음을 그친다는 '곽쥐'에 대한 유래를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등장인물들을 통해 나오는 이야기 속에서 이제껏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만 생각하였던 것들을 음미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는데, 그런 것 중에는 '달내나재'의 '다르냇재'에 대한 것이 있다. 그리고 상민들의 생활을 여실히 보여줌으로써 그들 사이에 있는 의리와 지조를 알 수 있었는데, 데릴 사위 혹은 비부쟁 이로서 감당해야 할 고뇌와 함께 당시의 상민들의 생활은 어느 정도 자유로웠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특히 길막봉이나 배 돌석이를 통해 과부가 개가를 하는 일이 상민들 사이에서는 대수롭지 않는 일이며, 남녀칠세 부동석이란 말은 양반 스스 로가 그들을 구별시켜주는 성역으로 여겼던 -사실은 자신의 목을 죄는 것인데-단면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계향이나 소흥이 같은 여인들을 통해 기생이라 할지라도 지조가 있을수 있다는 것을, 서림을 통해서는 모략이 많은 사람 들은 결국 자신의 꾀에 자신이 넘어간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함흥의 백정으로 이교리의 처삼촌이자 조정암의 지기로, 말년엔 승속간의 생불로 추앙된 양주팔의 유서는 결국 그 뜻을 헤이리지 못한 채 미완의 글로 끝을 맺게 됐지만 꺽정의 마지막을 일러주기 위한 글이 아닌가 하는 추리를 해봤다. 또한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 웃지 못할 점들을 발견하게 됐다. 왕권이 바뀌면서 권력도 여러 군데로 옮겨다니기 시작했고 먹 고 먹히는 조정 대신들의 머리다툼과 그 간교함이 하늘을 찌를만했다. 하지만 그러고도 몇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악 행은 되풀이 되고 있다. 임꺽정이 생존하였던 시대는 남존여비사상이 뿌리박혀 있는 조선시대였다 하더라도 임꺽정이나 그외의 주변인물들에게 팽배해 있는 남성우월주의는 그 위험수위가 극에 달하고 있다. 작가는 해당 시대를 잘 묘사하고 싶었을 것이고 어쩌면 1920년대의 집필된 소설로 아주 솔직하게 글을 썼는지 모른다. 이 소설이 그 시대를 꾸밈없이 알려주고 있는 글이라면 상민들에게 있었을 자유라는 것은 반편에 속하는 것이라고 결론 내릴 수 있다. 물론 '자유'라는 것이 조건부의 문제였겠 지만 여성들에게 있어 '자유'란 또 하나의 틀 속의 자유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양반 아래 상민, 그 안에서도 여성과 남 성이라는 틀을 못 깨고 있는 것이다. 억압 받았던 여인들의 단면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 것 같아 씁쓸하였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다음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였듯이, 소설 전체에 나타난 방언과 순 우리말을 통해 묘한 흥미를 유발시 키고 있다. 노력말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더불어 한 시대에 반(反)하여 살 수밖에 없었던 인물 '임꺽정'을 통해 우리 민 족의 정기와 저항정신을 새삼 느낄 수 없었다. 이 글이 집필되던 시기가 일제 침략기였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계속 생 각할 수 있는 작품으로 내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 같다.
 
에필로그
 
여름방학때 『임꺽정』이라는 책을 다 읽었다는 학우의 말을 듣고 별로 대단치 않게 생각했었다. 책 읽은 걸 가지고 죽 을 고생을 했다는 둥 하는 그녀의 엄살이 새삼스러워 보였다는 게 나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현재의 나는 그녀를 이해하고도 남는다. 사실 독서감상문을 써야 한다는 작은 부담감이 작용하지 않았다면 난 이글을 읽더라도 이렇게 꼼꼼하게 살 펴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난 10권이나 되는 소설을 읽었고, 그것도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이것은 나의 역사에 한동안 기억될 것 같은데, 이유인즉 처음으로 도전한 대하소설을 완전히 독 파했다는 것이고 겨울방학을 나름대로 뜻있게 보낸 점도 참작이 되기 때문이다. 최소한 방학이 끝난 후 나는 『임꺽정』 이란 책을 들어 보일 수 있게 되었다. 문학인으로서 감히 글을 쓴다고 말하는 위치에서 지금의 나는 미미한 시작으로 생 각하고 싶다. 앞의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홍명희 선생의 추진력 있는 서사는 나에게 있어서 커다른 충격이었다. 이런 의 미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 민예총과 사계절출판사에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