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속에서 머물고 지켜야 할 것

『침묵의 시간』마지막 장을 넘기면서, 침묵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여태껏 살아오면서 침묵 속에 묻어 둔 것들에 대해서요. 나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침묵 속에 묻어 두었는가. 무척 많은 것을 침묵 속에 묻어 두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찾으려고 하니 선뜻 떠오르는 것이 없네요. 입 밖으로 내고 싶지 않을 만큼 절실했던약속과 비밀이 내게는 없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렇지만 말이에요, 내가 진정한 어른이 된 것은 침묵에 대해 깨달은 바로 그 순간이 아니었나 싶어요. 침묵해야만 하는 시간이 있다는 걸, 그리고 그 침묵의 시간을 함부로 깨뜨리지 않고 견뎌야 한다는 걸, 때때로 열 마디 말 대신 침묵이 간절히 필요하다는 걸, 용서와 화해와 위로를 침묵이 대신해 주기도 한다는 걸, 침묵으로 타인을 바라봐 주기도 해야 한다는 걸, 침묵 속에서 완성되는 것이 있다는 걸 깨달은 그 순간 말이에요.
 
이 책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침묵의 소중함일 것입니다.
소설『침묵의 시간』은 한 학교 강당에서 열린 추모식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영어 수업을 담당했던 슈텔라 선생님의 추모식에 교장 선생님을 비롯해 여러 선생님과 학생들이 참석합니다. 온화하고 정이 많았던 슈텔라 선생님이었기에, 그곳에 모인 이들은 대부분 진심으로 슈텔라 선생님의 죽음을 슬퍼하고 애도합니다. 영정 사진 속 슈텔라 선생님에게 말을 걸거나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있고, 한쪽에서 저희들끼리 떠드는 학생들도 있지요. 그런데 추모식 내내 묵묵히 침묵을 지키는 한 소년이 있습니다. 침묵을 지킨 이유는 다름 아닌 슈텔라 선생님과 자신만의 비밀스럽고 금지된 추억 때문이었습니다. 그 소년은 열아홉 살의 크리스티안입니다.
사실, 크리스티안과 슈텔라 선생님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아름답고 강렬하지만, 금지된 사랑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학생과 교사라는 어쩔수 없는 사회적인 위치 때문이었지요. "크리스티안, 지금 난 여태껏 한 번도 없었던 일을 하려고 해. 이건 부정행위일 수도 있어. 우리의 관계를 생각하면 말이야. 그래, 이건 학교에 대한 배신행위야." 이렇게 슈텔라 선생님은 크리스티안과 거리를 두려 노력하지만, 크리스티안은 선생님과의 사랑이 완성되기를 꿈꿉니다. '바다로 나가 함께 헤엄을 치고, 웃으면서 함께 일어나고, 서로의 존재만으로 행복을 느끼는 삶'을 말이지요. 크리스티안은 그런 자신의 간절한 마음을 편지에 담아 선생님에게 띄웁니다. "당신의 신실한 크리스티안" 혹은 "당신의 영원한 사랑 크리스티안"이라는 문구와 함께요. 그러나 슈텔라 선생님은 크리스티안의 곁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만 불의의 사고를 당해 죽음을 맞고 맙니다.
슈텔라 선생님과 크리스티안의 사랑은 그렇게 이별로 끝나지만, 더없이 아름다운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바로 침묵의 힘으로 말이에요. 크리스티안은 침묵으로 선생님을 떠나보내면서, 짧았던 사랑을 영원히 그리고 순결하게 자신의 가슴속에 묻어 둡니다. 교장 선생님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추모사를 거절하기까지 하면서말이지요.
『침묵의 시간』이 오래오래 여운을 남기는 것은 이 소설이 소년과 여교사의 강렬한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슈텔라 선생님이 크리스티안에게 일깨워 준 것들이 소중하게 다가오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죠. "남들과 너무 크게 실력 차이가 난다는 걸 알면서도 시합에 나가는 건 불공정해. (……) 크리스티안, 뭐든 조건이 맞아야 돼. 조건이 맞지 않은 상태에서 얻는 결과는 합당하다고 할 수 없어." "크리스티안, 사랑은 따스함을 머금은 물결이야."
또한, 오랜 여운이 남는 것은 독일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독일어 시간』의 저자이기도 한 지크프리트 렌츠의 문학적이고 서정성 짙은 문체 때문이기도 해요.
 
 
"난…… 나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 왜냐고요?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추모사를 생각해 내고,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하는 동안에도 내 가슴속에선 당신과 함께했던 그 기억이 걷잡을 수 없이 격렬하게 솟구쳤기 때문입니다. (……)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추모사를 누설하는 순간 내게 전부였던 것이 단번에 사라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죠. 어쩌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침묵 속에서 머물고 지켜야 할지 모릅니다. 선생님, 그래서 나는 추모사를 맡지 않았습니다."
 
 
침묵 속에서 머물고 지켜야 할 것, 그런 소중한 것이 여러분에게는 무엇인가요?
 
 
 
김숨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