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삼과 국경』 김선민 작가 인터뷰



2017년 미국에서 출간되어 동양사학계의 큰 주목을 받았던 『인삼과 국경』(원제 Ginseng and Borderland)이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이 책은 청제국의 변경 지배 체제를 청-조선 경계의 역사를 통해 정교하게 조망하여, 전근대 조선을 중국의 반식민지 상태로 여기고 있던 미국 연구자들에게 ‘한국사를 통한 중국사로의 접근’이라는 새로운 해석의 길을 제시했다. 저자인 김선민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교수는 이 책에서 청-조선 국경의 역사를 17세기 초에 일어난 변경에서 국경지대로의 전환, 1712년 장백산 조사와 백두산정계비 설치를 통한 경계 설정과 이후 연행로에서 이루어진 국경 무역의 전개, 마지막으로 19세기 후반 청과 조선이 새로운 정치 상황에 직면하면서 광역의 국경지대가 근대 국경선으로 대체되는 과정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김선민 교수는 『인삼과 국경』에서 17~20세기 한중 관계사를 어떻게 재구성하였을까?

 

백두산정계비 지도

Q1. 소개 / 김선민 선생님, 안녕하세요. 먼저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교수 김선민입니다. 사계절출판사를 통해 독자 여러분과 만나게 되어서 무척 기쁩니다. 저는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역사를 좋아해서 대학을 진학할 때 사학과를 택했는데요, 제가 입학 원서를 쓸 당시에 고려대학교에는 한국사학과, 동양사학과, 서양사학과가 나뉘어 있었습니다(현재는 한국사학과와 사학과). 한국보다 더 넓은 세계를 공부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고 동양사학과에 진학했습니다.  
고려대학교 동양사학과에서 명청 시대를 전공하시는 박원호 교수님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제가 석사과정에 입학했을 무렵 박원호 교수님은 명청 시대 휘주문서를 연구하고 계셨는데요, 휘주문서는 오늘날 중국 안휘성 일대의 거대 가문(家門)들이 작성하여 오늘날까지 보관해온 문서자료를 말합니다. 휘주문서에는 명청 시대의 정치·경제·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상세한 정보가 많이 담겨 있었습니다. 특히 안휘성 출신의 상인들 가운데는 당시 국가의 전매 상품이었던 소금의 제조와 판매에 참여하여 큰돈을 벌고, 이것을 자신의 가족에게 투자하여 토지를 구입하고 자손을 교육시켜 관직에 나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때 명청 시대 휘주문서를 통해 중국의 소금 정책을 공부하면서 전매 제도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Q2. 집필 동기 / 이번에 출간한 『인삼과 국경』은 미국에서 먼저 출간되었고, 이번에 한국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새로 쓰신 한국어판 서문에 미국 유학 생활이 이 책을 쓴 계기가 되었다는 말이 있었는데요, 그 이야기를 조금 더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명청 시대 국가의 소금 전매 제도와 휘주상인을 주제로 논문을 써서 석사학위를 받은 후, 미국의 듀크대학으로 가서 박사과정에 진학했습니다. 듀크대학은 미국의 남부에 있는 사립학교입니다. 제 지도교수인 수체타 마줌다 교수는 명청 시대 광동의 설탕 생산과 상업을 연구하셨는데요, 지역의 특정 상품을 중심으로 사회경제사를 분석한다는 점이 저의 관심사와 같았습니다. 제가 유학을 갔을 때 듀크대학 사학과에 중국사를 공부하는 대학원생은 저 외에 한 명이 더 있었습니다. 다른 동료 연구자들은 대부분 유럽사, 미국사 혹은 라틴아메리카사를 전공해서 동아시아 역사는 잘 몰랐지만, 그 당시 경제적으로 부상하고 있던 중국에 대해서는 모두 관심이 많았습니다. 친구들은 한국인인 제가 미국에서 중국사를 공부한다는 것을 무척 신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 입장에서는 아주 당연하게도, 중국과 한국의 관계에 대해 저에게 자주 질문했습니다. 무엇보다 저의 지도교수님은 저에게 “네가 한국인으로서 중국사를 공부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스스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미국에 가서도 명청 시대 국가 전매상품에 대해 계속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청대 중국에서는 소금 외에도 인삼을 국가가 통제했는데요, 인삼의 생산 지역을 따라가다 보니 만주, 그리고 장백산, 압록강, 두만강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삼의 채취와 유통에는 청의 만주 황실이 깊숙이 개입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과의 외교 문제도 중요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국가의 전매 상품인 인삼에서 시작된 관심이 만주와 만주인을 거쳐서 조선과의 경계지역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Q3. 청-조선, 새로운 관계의 시작 / 그동안 청과 조선의 관계는 1637년 병자호란과 그에 따른 정축조약의 결과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인삼과 국경』에서는 두 나라 사이의 관계 형성이 좀 다르게 보입니다. 그 핵심을 “인삼”에서 찾으셨어요. 왜 인삼이었나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제가 인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것이 청대 국가의 독점적인 전매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청이 중국을 정복하기 전에도 인삼은 만주인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상품이었습니다. 여진인들, 그리고 그들의 후손인 만주인들은 만주의 숲에서 자라는 인삼을 채취하여 명나라와 교역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얻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인삼을 채취하지 못하게 단속해야 인삼 가격을 비싸게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만주인들은 인삼 생산 지역의 출입 관리에 매우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문제는 인삼이 자라는 산들이 조선과의 접경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만주인들의 세력이 강하지 않았을 때는 조선인들이 인삼을 채취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제기할 수 없었지만, 이들이 후금을 세우고 청으로 발전하면서 조선인이 접경 지역에 들어와 인삼을 채취하는 것은 더 이상 묵인되거나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인삼은 만주인들이 다른 세력과 공유할 수 없는 중요한 자연자원이었던 것입니다. 
후금-청이 경계 지역의 자연자원을 둘러싸고 조선과 경쟁했다는 사실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청과 조선의 관계는 대개 홍타이지의 침입과 그로 인한 굴욕적인 화친, 조선 위정자들의 무능과 그에 따른 전쟁의 참화, 조선의 사대부의 대명 의리와 반청 사상에 관한 것입니다. 청-조선 관계에 대한 이러한 정치 중심적이고 이념적인 해석은 두 나라 사이의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이해관계를 간과하게 하고, 병자호란 이후 1895년 청일전쟁까지 양국의 관계를 지나치게 평면적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청과 조선은 경계를 접한 이웃이었고 그 경계 지역을 관리하는 것이 양국에게 모두 중요했다는 사실을 충분히 고려할 때 비로소 청-조선 관계를 더욱 풍부하게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

Q4. 만문·한문·조선 사료에서 발견한 살아 있는 목소리들 / 책 속에 청과 조선의 수많은 사료들이 등장합니다. 청제국이 만문으로 남긴 사료들도 다수 등장하고요. 이런 자료들은 어떻게 발견하셨나요? ​

청대 국가의 공식 언어는 ‘국어國語’, 즉 만주어였습니다. 청대 만주어와 만문 사료에 대한 연구는 20세기 초 일본 학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만주로 진출한 일본 군대와 함께 일본의 동양사학자들은 청의 수도였던 심양을 방문하여 그곳에 보관되어 있던 청 초기의 만문 사료를 입수했습니다. 그 후로 일본에서는 만문 사료를 활용하는 연구자들이 양성되었고 이들이 청사 연구를 크게 진전시켰습니다. 한편 중국공산당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국민당 정부가 타이완으로 이주하면서 청대 황실에 보관되어 있던 사료를 함께 가져갔고, 이후 타이완의 청사 연구자들 역시 여기에 포함된 만문 사료를 활용했습니다. 1990년대 이르러 베이징의 청 황실 자료 속에 있던 만문 사료가 중국 국내외 연구자들에게 소개되면서 청대사 연구는 새로운 계기를 맞게 됩니다. 한문으로는 기록되지 않은 많은 내용이 만문으로 남겨져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청대 만문 사료의 가치는 청-조선 관계 연구에서 각별히 중요합니다. 우선 조선과의 접경 지역에 세력 기반을 두고 있었던 누르하치와 홍타이지는 한문을 읽고 쓰는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조선과 주고받은 한문 문서를 만주어로 번역하게 했고, 그들의 역사는 『만문노당』이라는 만문 사료에 상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청은 중국을 정복한 후에도 만주를 관리하고 지배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강희제는 만주의 여러 지역에 군사 거점을 건설하고 팔기병을 주둔시켰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두만강 인근에 설치된 ‘훈춘협령’입니다. 1714년에 훈춘협령이 설치되고 1912년 청이 망할 때까지 훈춘협령이 그의 상급자들과 주고받은 막대한 양의 만문 문서가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고, 최근에 『혼춘부도통아문당』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조선과의 접경 지역에 설치된 덕분에 훈춘협령의 보고문에는 조선인과 관련된 내용이 매우 많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 베이징의 제일역사당안관에는 수백만 건의 청대 만문 사료가 보관되어 있습니다. 제일역사당안관 사료는 황제에게 직접 보고된 문서가 많은데, 여기에는 『훈춘부도통아문당』의 사료에서는 볼 수 없는 더 자세하고 종합적인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만문 사료를 통해 앞으로 청과 조선의 관계에 대한 많은 새로운 연구가 가능할 것입니다. 


Q5. 17~20세기 청-조선의 “새로운” 질서 / 청과 조선이 구축한 당대의 질서를 한 마디로 설명하면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요?

『인삼과 국경』에서도 강조하여 설명했듯이, 청과 조선의 관계는 명확하게 사대와 조공의 틀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병자호란 이후 양국이 맺은 조약은 조선이 청을 상국으로 사대한다는 것을 명문화했고, 조선이 청에게 올리는 각종 문서는 조공 질서의 규범과 의식에 따라 작성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문서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요? 청의 황제에게 조선의 국왕이 안부를 묻고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고, 조선의 국왕에게 청의 황제가 책봉을 내리는 것 외에, 두 나라 사이에는 어떤 현안이 있었을까요? 양국의 조공 관계는 두 나라의 현안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결한 것일까요? 
저는 이 책에서 양국의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사안에서 청과 조선의 조공 질서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홍타이지가 조선의 채삼인들을 단속할 때 양국의 상하우열의 관계를 어떻게 폭력적으로 적용하는지, 강희제가 장백산을 조사할 때 조선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조공 질서의 수사를 어떻게 이용하는지, 건륭제가 압록강 인근에 청군을 주둔시키려 할 때 조선은 어떤 논리를 활용하는지를 보고자 했습니다. 
또한 청과 조선의 조공 질서를 상징하는 조선의 조공 사절은 청의 영토에 들어가서 무엇을 했는지, 그들은 어디에서 잠을 자고 무엇을 먹고 누구와 만나서 어떤 일을 했는지를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청과 조선의 관계에는 북경의 황제와 한양의 조선 국왕, 혹은 북경의 한인 문인과 한양의 조선 사대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장백산, 압록강, 두만강 일대에서 인삼을 캐러 다니는 사람들이 양국의 조정을 흔들어서 서로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재검토하게 했습니다. 청과 조선의 조공 관계는 결코 주어진 고정된 것이 아니라 양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계속 변화하고 만들어져가는 과정이었습니다. 


Q6. 별의 순간 / 인삼으로 비롯된 청-조선의 변경/국경지대/국경 변화 양상을 연구하시다 경험한 특별한 순간이 있나요?

인삼으로 비롯된 청-조선의 변경/국경지대/국경 변화 양상을 연구하시다 경험한 특별한 순간이 있나요?
이 주제를 공부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아마 청의 성경장군 달당가를 만난 순간일 것 같습니다. 달당가를 처음 만난 것은 조선 조정이 편찬한 외교문서집인 『동문휘고』에서였습니다. 달당가는 만주에 만연한 불법 채삼을 근절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한 성실한 청나라 관리입니다. 그는 불법 채삼을 단속하기 위해 압록강 인근에 군사 초소를 설치하자고 건륭제에게 제안했고, 이 내용은 청의 예부를 거쳐 조선 조정에 전달되었습니다. 『동문휘고』에 조선조정이 전달받은 달당가의 보고문 내용이 상세히 수록되어 있는 덕분에 망우초 초소 문제를 분석할 수 있었습니다. 
박사논문을 제출한 후 한국에 돌아와서 계명대에서 일하고 있을 때 베이징 제일역사당안관을 방문했습니다. 그때 마이크로필름으로 보관된 만문 사료를 검토하다가 달당가의 이름을 만주어로 다시 만났습니다. 그 자료는 조선의 조공 사절을 따라간 조선인 노복이 청인을 무고한 죄로 심문을 받는 내용이었는데요, 조선인의 거짓말을 밝힌 뒤 이를 계기로 조선 조정을 압박해야 한다고 황제에게 보고한 사람이 바로 달당가였습니다. 조선의 한문 자료에서 등장했던 인물이 청의 만문 자료에서 다시 나타난 것이 무척 놀랍고 신기했습니다. 


Q7. 소감과 각오 / 독자들이 이 책을 어떻게 읽기를 바라세요? 그리고 앞으로 어떤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싶으신가요?

독자들이 이 책을 어떻게 읽기를 바라세요? 그리고 앞으로 어떤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싶으신가요?
한국인이 한국에서 청-조선 관계를 공부할 때, 흔히 양국의 규모와 힘에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을 잊기가 쉽습니다. 저는 청대 황제들이 만주를 언급한 기록을 볼 때마다 그들의 시야가 매우 넓다는 사실에 새삼 놀랍니다. 강희제가 장백산 탐사를 지시한 배경에는 러시아인들의 흑룡강 진출이 있었습니다. 강희제는 흑룡강 일대에서 소란이 일어나면 이곳과 연결된 쑹화강, 우수리강도 불안정해질 것이고, 결국 만주 전역에서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강희제에게 흑룡강, 쑹화강, 우수리강, 그리고 두만강은 모두 하나로 연결된 제국의 영토였습니다. 이것은 건륭제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황제는 만주의 귀중한 자연자원을 황실의 재산으로 독점하고자 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두만강 일대에 출몰하는 불법 채삼인을 단속해야 하고, 그러려면 이들에게 곡식을 제공할 수 있는 흑룡강 인근의 솔론이나 다구르 부족민들까지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건륭 연간에 두만강 일대에서 불법 채삼을 단속하는 일은 북쪽으로 쑹화강, 우수리강, 그리고 흑룡강 상류까지 순찰병과 감시 초소를 설치하는 일로 이어졌습니다. 
반면 조선의 관점에서 보면 두만강의 조선인 불법 채삼인은 흑룡강으로 이어지는 군사 안보의 문제라기보다 북경의 황실과 연결되는 외교적인 사안이었습니다. 청과 조선의 접경 지역에서 발생한 동일한 범월 사안에 대해 양국의 상황 판단과 대처는 매우 달랐습니다. 이러한 관점과 시야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청-조선 관계를 균형 있게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청과 조선 사이에는 영토와 국력의 측면에서 분명한 차이가 존재했음을 분명히 파악하고 이를 전제로 설명해야 비로소 한국 밖의 독자들을 설득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 차례 경험했습니다. 앞으로 저의 연구에서도 이 점을 늘 기억하려고 노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