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세계 끝까지' 나아가고 싶은 작가 - 제15회 사계절문학상 수상작가 김진나 인터뷰

사랑은, 그게 어떤 사랑이든 한 방울도 헛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두려울 땐 두려워하고 아플 땐 아파하고 실망할 땐 실망하고 내 꼴이 우스워질 땐 우스워지면서도 우리 계속 사랑해 볼까요? -작가 인터뷰 중에서




제15회 사계절문학상 대상 수상작은 김진나 작가의 『소년아, 나를 꺼내 줘』입니다. 세 시간의 만남을 되풀이하며 그리워하고 설레고 원망하고 미워하다… 대답을 얻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을 소중히 끌어안기로 하는 열여덟 소녀의 사랑. 잔잔하지만 긴 여운을 남기는, 한여름의 사랑을 그린 김진나 작가에게 작품 이야기를 들어 보았습니다.

*사계절문학상 대상 수상 축하드립니다. 큰상을 받으신 게 처음은 아니시지만, 당선 소식 들으셨을 때 어떠셨어요? 예상하셨나요?
당연히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당선 연락 받았을 때 저는 하동의 어느 마을에서 물을 보고 있었습니다. 겨울 빛이 투명하게 쏟아지는 바닥에 앉아 그저 떠오르는 대로 문장을 쓰고 있었습니다. 흔들리는 억새를 보고 있기도 했습니다. 눈을 반쯤 감고 언제나 여기 나와 앉아 졸았던 것처럼 아늑하다고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전화를 받았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통화를 하며 주변을 다시 바라봤고, 그곳의 나무와 낡은 길과 물과 바위가 저를 축하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기뻤습니다. 굉장히 감사했습니다.
 
*『소년아, 나를 꺼내 줘』는 열여덟 살 시지가 겪은 ‘사랑’을 그린 소설입니다. 이 작품을 쓰시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저에게 전해지지 않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어디로도 갈 수 없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저는 어쩔 줄 몰랐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러면서 그 마음이 무엇일까 생각했습니다. 『소년아, 나를 꺼내 줘』는 미리 계획해서 쓴 소설이 아닙니다. 저는 몇 달 동안 글을 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내 문장은 진실하지 않은가?’ 하는 고민에 단 한 문장도 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저녁을 먹고 그릇 몇 개를 씻는데 불현듯 머릿속에서 첫 문장이 시작되었습니다. 문장들은 계속 이어졌고 쓸모없이 버려져 있던 제 마음이 어디론가 나아가고자 했습니다. 저는 바로 방으로 들어가서 쓰기 시작했습니다.    
 
*신시지, 이얼. 두 주인공의 이름이 다른 인물들에 비해 상당히 독특해요.
두 인물을 생각하며 여러 글자들을 조합해 입으로 소리 내어 읽어 봤습니다. 그러다 신시지와 이얼이란 이름이 각각의 인물에 딱 맞아 떨어진다고 느꼈습니다.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상한 열여덟’입니다. 아무 이유도 계기도 없이 누구하고도 이야기하고 싶어지지 않는 순간에 대해 많은 청소년들이 공감할 것 같아요. 선생님의 열여덟은 어떠셨나요.
저는 열여덟 살에 고등학교를 자퇴했습니다.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 자퇴하고 서울로 왔습니다. 많은 친구들 속에 있다가 갑자기 혼자가 되었습니다. 종일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거리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저를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지내다 보니 어느 날 큰언니가 멀리서 저를 발견하고 불렀는데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소리는 분명히 들었습니다. ‘누가 누구를 부르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부러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게 제 이름이란 걸 몰랐습니다. 지금은 제가 제 이름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요?(웃음)

*시지는 많은 청소년소설 주인공들이 특별하거나 아픈 사연을 가진 데 비하면 언뜻 평범해 보이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사소한 습관이나 심리가 아주 구체적이에요. 혹시 모델로 삼은 인물이 있으신가요?
시지가 겪은 사춘기의 심리, 일상의 행위들은 조카의 도움으로 썼습니다. 신시지란 이름을 듣자마자 “소시지?”라고 말해 준 것도 조카였습니다. “아침에 학교 가는 과정을 상세히 말해 줘.”, “친구들이랑 뭐하고 놀아?”, “작년에 네가 이러저러했잖아. 그때 기분이 어땠어? 왜 그랬어?” 아무 때나 전화해 물어보는 저에게 늘 자세히 얘기해 주었습니다.

*얼이 시지에게 들려준 새끼 바다거북이의 여정이 인상적이에요. 
‘알에서 나오기도 전에 내벽을 깨기 위해 생기는 임시 치아’가 있다는 건 다큐멘터리로도 보고 이런저런 책에서도 읽어 제 마음에 놀랍고 아름답게 남아 있어 자연스럽게 쓰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새끼 바다거북이의 여정을 생각하면 감동합니다.

*책을 읽는 청소년 독자들에게 인상적일 또 한 대목은, ‘난간에 선 여고생’ 뉴스에 대한 시지의 생각이 드러나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실제로 2016년 4월에 일어난 일이기도 하지요. ‘난간에 서게 된 건 고의가 아니야.’라는 말은 시지와 그 여고생을 비롯해서 모든 청소년의 마음을 대변하는 대사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장기 내내 저 자신이 그렇게 느꼈습니다. 나도 내가 엉망이라는 건 알겠는데 이렇게 된 게 내 고의는 아니라고, 일일이 설명하라고 요구하지 말라고. 그러나 그 말 속엔 나도 날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날 이해해 달라는 간절함이 들어 있습니다. 얼핏 보고 다 안다는 듯이 굴지 말고, 섣불리 짐작하고 판단하고 충고하려 들지 말고, 그냥 내 존재를 한 순간이라도 온전히 봐 달라는 간절함이 있습니다. 그러기만 한다면 나도 날 추스를 힘이 생길 거라고.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나는 왜 내가 엉망이라고 느꼈을까요? 나는 정말 엉망이었을까요? 제 생각엔 아닙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성과를 빗대며 꿈을 가져라, 노력하라고 강요하는 사회의 시선에 오래 노출되다 보니 그 기준과 다른 내가 엉망으로 느껴졌을 뿐입니다. ‘난간에 서게 된 건 고의가 아니야.’라는 말은 그런 외부의 시선과 강요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고 또한 청소년기의 특별한 성장을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고 있는 처지에 대한 호소이기도 합니다.  



*시지가 얼과 만난 시간은 단 3시간이지만, 시지에게 그 만남은 61일 동안 계속됩니다. 같은 공간과 시간에 함께 있었는데도 시지와 얼에게 그 3시간이 상대적인 길이를 가지는 것처럼요. 그 ‘상대적인 시간’이 시지와 얼 사이에 감정적인 거리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 시간은, 상대적인가요?
네, 저에게 시간은 상대적입니다. 시간이 한 방향으로만 흐를까요? 시간을 되돌릴 순 없을까요? 혹시 나선형처럼 돌아가며 매 순간 새로운 과거와 미래를 만들어 내지는 않을까요? 우리는 시간 안에서 때로는 시간 밖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태양과 달과 별의 움직임으로 지구에 시간이 생겼나요?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과 삶의 순간들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를까요? 죽으면 시간도 사라지나요? 생명의 한 호흡 속에 시간이 들어 있나요? 저는 이런 질문들 속에서 이전에  『숲의 시간』이란 소설을 썼습니다. 여전히 지금도 시간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답은 모릅니다. 그래도 시간에 대해 더 많은 질문을 가져 볼 생각입니다.    

*시지는 자기 마음속을 계속 들여다봅니다. 지금 내 기분은 어떻지? 이 감정의 정체는 뭐지? 하고요. 그랬기 때문에 ‘내 초라한 마음을 갖기로 했다.’는 결론에 다다를 수 있는 것 같아요. 선생님은 자신과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이세요?
나를 상대해 주는 외부가 있을 때는 자연스레 그에 반응하고 자극을 받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혼자 남겨지기도 합니다. 어린아이라 해도 모두 어디 갔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집에 혼자 있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혹은 누군가와 함께 있어도 막막하게 외따로 떨어져 있는 기분을 느끼기도 합니다. 누굴 만나도 어딜 가도 무엇을 먹어도 어떻게 해 볼 수 없이 고독할 때가 있습니다. 저에게는 그런 부분이 컸습니다. 겉으로 드러나고 누군가와 쉽게 공유할 수 있는 삶이 30퍼센트라면 70퍼센트는 그늘 속에 숨겨진 그림자 같이 설명하기 어렵고 막막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글을 씁니다. 글을 쓰며 그 그림자에 대해 알아 가고 있습니다.      

*좀 엉뚱한 질문일 수도 있지만, 이 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궁금해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새벽 3시에 엄마를 깨워서 시지가 산 동화책 세 권은 어떤 책들인가요?
유리 슐레비츠의 『월요일 아침에』 , 『비 오는 날』,  『새벽』입니다.

*『소년아, 나를 꺼내 줘』라는 제목은, 책을 다 읽은 뒤에 더 흥미로워지는 제목입니다. 시지는 다른 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오니까요.
시지는 얼을 좋아하며 한없이 밝아지고 어두워지고 한없이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편협해지고 한없이 기뻐하고 슬퍼하고 한없이 설레고 실망합니다. 양 극단을 격렬하게 오고 갑니다. 시지가 스스로 힘을 갖게 된 건 그러한 극단 속에서 마이너스에 속해 있던 자신의 무기력과 쓸모없음을 허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시지에게 ‘소년아, 나를 꺼내 줘.’라는 말은 ‘소년아, 내가 스스로 나가 볼게.’하는 말과 같은 말이 되었습니다. 

*작품 속에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에 대한 다양한 심상들이 등장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아, 어렵네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웃음) 소설 속의 한 부분으로 대신 답해 볼게요.
“밤사이 비밀스러운 밧줄이 내려와 나를 춤추는 언덕으로 데려갔다. 부러진 풍차에 별빛이 닿을 때마다 금으로 변하고, 우유 항아리에서 은여우 새끼들이 태어나고, 무화과 나무에서 레몬이 열리고, 파도 거품이 이불 위에서 부서져도 젖지 않는 순간이 있었다. 믿을 수 없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녹슨 철제 계단을 올라 허공 한가운데에 다리를 늘어뜨리고 앉았다. 너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모습을 떠올리지 않았다. 목소리도 말투도 기억하지 않았다. 그런 게 오히려 결핍이 되었다.”

*시지가 글을 쓰는 것이 자신에게 카벙클이 되어 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자판’을 두드리는 것으로 다시 시작하는 결말은, 혹 선생님 자신의 이야기일까 하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에요.
저는 중학생 때부터 글 쓰는 것이 제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란 걸 알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하든 진정한 제 글을 쓰지 못한다면 제 삶은 의미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두려웠습니다. 그러다 이런저런 혼란을 겪은 뒤 ‘난 글 쓰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구나.’ 하고 28살에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썼습니다. 

*『소년아, 나를 꺼내 줘』는 선생님의 전작들 『숲의 시간』, 『도둑의 탄생』, 『디다와 소풍 요정』과는 좀 다른 작품이에요. 전작들은 판타지이면서 뚜렷한 사건과 주제가 있는 반면, 이 작품은 김지은 선생님이 ‘신선한 파장’이라고 표현하셨을 정도로 낯선 문체를 가지고 있어요. 많지 않은 작품 속에서 다양한 색을 보여 주신 것 같아요. 이야기를 실마리는 어디서 얻으시는지, 또 이 작품은 작가로서 선생님께 어떤 의미가 될지요?
결이 다르게 느껴지는군요.(웃음) 이 이야기는 제 경험에서 나왔습니다. 『소년아, 나를 꺼내 줘』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저를 위해 쓴 것이기도 합니다. 저는 말을 믿습니다. 책을 읽을 때면 책에 있는 말을 믿고 누군가와 대화를 하면 그 사람의 말을 믿습니다. 길바닥에 버려져 찢어진 종이에 남아 있는 불완전한 문장도 전자기기의 사용 설명서도 믿습니다. 아직 말해지지 않은 말도 이미 오래전에 잊힌 말도 믿습니다. 제가 세상으로 나갈 힘이 없었을 때도 말은 늘 저와 함께 있었습니다. 저는 말을 통해 배웠고 말을 통해 밖을 내다봤고 말을 통해 삶을 조금씩 이해하고 있습니다. 『소년아, 나를 꺼내 줘』를 쓰며 다시금 말의 힘을 실감했습니다. 이제부터는 보다 제대로 말로써 울고 말로써 일어나며 말로써 살아 보겠습니다. 말의 세계 끝까지 가 보고 싶습니다.

*앞으로 꼭 써 보고 싶으신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꿈요. 잠의 세계에 살고 있는 꿈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이 책을 읽을 독자 여러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사랑은, 그게 어떤 사랑이든 한 방울도 헛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두려울 땐 두려워하고 아플 땐 아파하고 실망할 땐 실망하고 내 꼴이 우스워질 땐 우스워지면서도 우리 계속 사랑해 볼까요?

(인터뷰: 사계절출판사 기획편집부 장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