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을 읽고 : 김연옥

 
제1회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독서감상문대회
고등부 우수상 수상작
 


내가 임꺽정이라는 인물의 존재를 처음 안 것이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것은 그만큼 꺽정이라는 인물이 우리에게 친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천하고금에 다시 없는 장사였다고는 하지만, 홍길동이나 전우치처럼 황당한 도술을 부리는 것도 아니고, 가장 천대받는 백정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그의 출신 등이 그에게 남다른 친숙함을 갖게 해 주었던 것이 아닐까. 그런 측면에서 이번에 접한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은 내게 매우 소중한 만남으로 다가왔다. 

『임꺽정』의 작가인 벽초 홍명희는 1988년 충북 괴산에서 태어나 국권 피탈에서 광복, 그리고 분단에 이르는 격랑의 세월을 몸소 헤쳐 오신 분이다. 조선의 3대 천재 중 하나로 일컬어졌으며, 신간회의 주축이 되어 적극적인 항일 노력을 기울였다. 이처럼 현실에 대한 강한 열정과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문학 역시 현실이 바탕이 된 '산 혼에서 흘러나오는 문학'이기를 주장했다. 

『임꺽정』은 홍명희의 그러한 정신이 응축된 필생의 역작이었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경직되지 않은 각각의 독특한 개성으로 살아 움직이고, 작가는 그들의 행동에 역사적 검증을 거쳐 상상력을 불어넣었다. 

작품의 주인공은 꺽정이지만, 이야기는 그의 출생 전인 연산조로 거슬러 올라가 시작된다. 폭군을 피해 도망친 이교리가 백정의 딸 봉단과 혼인하여 장래 꺽정의 스승이 된 갖바치 양주팔을 만나는 것으로 서두를 열어, 작가는 꺽정이가 등장하기 전까지 당시 시대 상황을 소상히 풀어 적었다. 반정 후에 숙부인이 된 봉단의 주선으로 그의 친척 오빠가 양주 쇠고리 백정의 데릴사위가 되어 얻은 아들 꺽정이는 어려서부터 힘이 대단하고 용모가 훤칠했으며, 성격이 드셌다. 백정의 자식이라 멸시받는 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겼던 꺽정이는 어려서 동무였던 박유복이가 청석골 도적이 된 뒤로 청석골패와 연관을 맺게 된다. 그 후, 청석골에서 보내 준 도둑맞은 봉물짐이 관아에 발각되어 그 와중에 아버지와 동생을 잃고 나머지 식솔을 거느리고 청석골로 들어간다. 청석골패가 세력이 크게 신장하여 큰 무리를 이루자, 꺽정이는 총대장이 되어 여러 두령들과 형제 결의를 맺고 서림을 모사로 두어 대담한 행적을 벌인다. 여러 차례 낭패를 보았던 조정에서는 마침내 대대적인 토벌책을 강구하고, 서림의 배반으로 처세가 불리해진 꺽정은 부하들을 이끌고 자모산성으로 피신한다. 안타깝게도 소설은 여기에서 미완을 남겨지고 말았다. 한 사람의 독자의 입장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민족 문학을 위해서라는 측면에서도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임꺽정』을 처음 접했을 때, 기대와 우려를 함께 느껴야 했다. 이광수의 신문학에서 전형적인 인물상과 인위적인 줄거리로 인한 실망을 느꼈기에, 또다시 같은 경험을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였다. 그러나 홍명희는 그런 나의 우려를 부질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애초에 생각했던 것처럼 임꺽정을 범접할 수 없는 영웅으로 추켜세우는 이야기도 아니요, 백성은 무조건 약자고 양반은 모두 허울 좋은 도둑이라는 이분법 아래 꺽정이패들의 의적 행위를 부각시키는 이야기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꺽정이는 부족한 점이 많은 모습이었고, 청석골패는 무고한 백성들도 많이 해쳤다. 소설이 미완이므로 함부로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작가는 꺽정이를 '의적'이라는 측면보다는, 가장 박대받던 신분의 벽에 얽매였던 것을 뿌리치고 나와 잘못된 사회와 제도에 순장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자기만의 질서를 세웠던 점을 부각시킨 것이 아닐까 싶다. 홍명희가 『임꺽정』을 저술하던 당시는 과거의 낡은 관습에 무의식적으로 따르던 민중이 서서히 눈을 뜨고 새롭고 합리적인 질서를 모색하던 시기였다. 이에 대하여 민중의 각성을 촉진시키고 자칫 그 흐름에 휩싸여 사라져 갈지도 모를 우리 고유의 것을 간직한다는 두 가지 과제를 만족시키기 위해, 작가는 임꺽정을 그 모델로서 내세운 것이 아닐까. 작가는 그러한 변화와 개혁의 노래를 구수한 우리네 말씨와 정서로 이야기한다. 인물들이 주고받는 익살 넘치는 대화들이나 생동감 있는 묘사들을 모두 다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러는 중에도 가슴에 와닿는 정겨움은 아마도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우리의 고유함이리라. 

이제, 우리는 또 한번의 변화의 시기를 맞고 있다. 우리 자신의 소중한 것과 버려야 할 것을 현명하게 선택해야 하는 시기이다. 자신을 얽매는 잘못된 제도를 거부하고 새로운 질서를 찾아 나선 임꺽정의 용기를 우리는 본받아야 할 것이다. 비록 꺽정이의 저항은 강대한 세력 앞에서 스러져 버렸지만, 그가 그토록 원하던 세상을 완성할 책임은 우리에게 물려 내려왔고, 또 우리의 후손에게도 되물림될 것이다. 과감한 변화의 필요 속에서도 우리 본연의 것들이 더욱 소중해지는 지금,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은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