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 「임꺽정」과 함께한 수요일 밤의 '낭독' (feat. 일종의 고백)


사계절, 「임꺽정」과 함께한 수요일 밤의 '낭독' (feat. 일종의 고백)
 
사계절 임꺽정 함께 읽기 (2023. 2월 1일 ~ 11월 22일)
임꺽정, 사계절출판사, 2014. 6월 (봉단편 1권, 피장편 2권, 양반편
구성: 봉단편1권, 피장편 2권, 양반편 3권, 의형제편 1권 ~3권, 화적편 1권~4권 (총 10권)

 
 
아들이 등교하고, 집안 정리를 시작했다. 아침 먹은 식탁을 정리하고, 설거지할 그릇을 싱크대에 넣는다. 남은 음식은 적당한 그릇에 담아 냉장고에 넣고, 청소기를 돌리기 시작한다. 어느 정도 쌓여있는 빨랫감을 세탁기에 넣어 전원 버튼을 누르고, 분리수거를 시작했다. '음 ~ 점심 먹고 해도 되는데..' 혼잣말을 하며, 분리수거하던 손을 멈추었다. 습관은 무섭다. 의식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여 움직이는 것이 재미있고, 서운하다.
 
​공교롭게 내가 사는 아파트 동의 분리수거는 수요일이다. 정한 규칙이 없었던 분리수거나 아들의 저녁 준비도 오전 시간에 맞추었다. 수요일은 약속을 잡지 않았다. 나의 일상은 '사계절 임꺽정 함께 읽기' 프로젝트가 완료되는 열 달 동안, '수요일 밤 9시'를 기준으로 움직였다. 지난 11월 22일 우리들의 긴 읽기 여정은 끝이 났다. 완독 후, 맞는 두 번째 수요일 밤이다. 여전히 귀에 맴도는 동무님들 음성이 줌(zum)을 통해 들려올 것 같은 기분이다. 마지막 밤의 고적함과 '청석골'에 홀로 남은 '오가'의 실없는 말투가1) 어른거려 자꾸 눈물이 난다.
 
​2월 첫날,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리더의 짧은 시대적 배경을 듣고 <임꺽정>의 서두 <봉단편 1권>을 낭독했다. 참가자들이 '동무'라는 호칭을 부르기 시작한 시점이다. 긴 여정의 길에 길동무가 있다는 위안과 중도 하차에 대한 염려로 양가적 감정이 들었다. 혼자 남더라도 가보자는 마음으로 7년간 책꽂이에 꽂혀있던 <임꺽정 1권>을 펼쳤다. 5권까지 한번 읽었던 경험이 무색했다. 타인의 목소리를 타고 들려오는 '이야기'의 물결은 홀로 읽는 느낌과 전혀 다른 몰입감으로 스며들었다. 각 지역 말투에 개별적 소리가 더해져 <임꺽정>을 읽는 시간은 '쪼의 향연'이2) 되었다. 울다. 웃다. 부럽다가 안쓰러웠다. 분노가 치밀다 침울해졌다. <임꺽정 1권>에서 <임꺽정 10권>의 사연 따라 나의 감정은 혼란스러웠다.
 
​사계절, 임꺽정 시절 속에서 살았다. '조선실록' 기록에만 존재한 도둑 임꺽정을 탈주시킨 작가의 삶에도 서성거렸다. 북한에서 부수상까지 지낸 저자의 이력으로 <소설 임꺽정>은 전설로 남고, 침잠했다. 사계절출판사의 용감한 출간3)으로 1985년 독재 정권 시대에 또 한 번 탈주했다. 한국인들에게 '임꺽정'은 이념의 상징이면서 힘의 상징이 되어 세상을 떠돈다. 계절 따라 <임꺽정>과 이별하며, 편견은 무너졌다. 이념도 힘도 아닌 '삶'이 의식 속에 자리 잡아갔다.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해야 했다. 조선 왕의 계보를 펼쳐 놓았고, 저자가 살았던 시기를 나열했다. 책이 출간되는 과정도 연도별로 기록해 보았다. 그리고 내가 살아온 1970~90년대의 시대를 삽입했다. 시간의 나열은 살아온 날들 속에 이해할 수 없었던 많은 상황들을 알게 해주었다. 조선 중기에서 일제 식민지를 거쳐 한반도의 분단과 독재 정권, 그리고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소설 임꺽정> 속에 생명처럼 흐른다는 것을 알았다.
​<소설 임꺽정>은 조선 중기 연산군 때부터 명종 초의 혼란한 정치적 사건과 칠두령의 인생 스토리가 그물처럼 엮여있다. 저자 홍명희는 1928년 마흔한 살의 나이로 조선일보4)에 <임꺽정林巨正>을 연재했다. <봉단편 1권> '머리말씀'을 읽다 보면, 작품 구상이나 인물에 대한 연구를 꽤 오랜 시간 준비한 것 같다. 정사와 야사, 기타의 자료를 촘촘하고, 풍성하게 기록하여 칠두령과 다양한 인간 군상을 이야기 속에 배치했다. 연재 당시 위인이나 군주 중심의 역사소설이 주류인데 반해, '백정'이라는 조선의 가장 미천한 신분을 택한 작가의 기세가 대담하다. '사건이나 인물이나 묘사로나 정조로나 순조선 것으로 만들겠다.'라는 의지는 일본 식민 통치하에 있던 독자들에게 큰 정신적 힘이 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문학의 힘'이란 비현실을 현실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소설 임꺽정>에서 비현실적인 부분은 칠두령의 이름과 개인의 서사를 중단편 분량으로 기록한 것이다. <피장편, 양반편>에 등장하는 조광조나 이황, 문정왕후, 윤원형 같은 학자나 권력자는 어떤 이유에서든 역사의 기록으로 이름이 후대에 남아 불린다.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 속에 등장하는 많은 의병들은 평범한 백성이다. 그들의 이름을 후대에 우리는 그저 '의병'으로 기억할 뿐이다. <임꺽정>의 저자는 도입부터 <봉단편><피장편>에서 이름과 직업을 제목으로 설정했다. <의형제편> 3권은 이름이 소제목이다. 박유복이, 곽오주, 길막봉이, 황천왕동이, 배돌석이, 이봉학이, 서림 그리고 결의로 <화적편> 서막을 알린다.
 
<의형제편> 박유복과 곽오주의 개인사를 낭독한 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원수의 두상(頭上)을 부모님 무덤가에 놓고 통곡하는 유복이와 딸의 젖동냥에 지쳐 악패듯 우는 아기를 바닥에 떨어뜨려 죽인 오주의 사연에 가슴이 서늘했다. <임꺽정>을 읽는 동안 '욱'하는 '오주'를 미워할 수 없었다. 한 존재의 사연이 너무 짠해서 그냥 다독이고 싶었다. 그런데 이런 맘은 독자 입장이고, 칠두령은 사실 반전 캐릭터들이다. 다들 태어나는 순간부터 고난과 역경의 팔자들이다. 그렇다고 절대 슬픔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는 이들은 자존감 뿜뿜이다. 저자가 존재감 빵빵하게 넣어준 만큼 거침이 없다. 축지법 통신원 백두산의 아들 황천왕동이, 돌팔매 달인 배돌석이, 표창의 신 박유복, 쇠도리깨를 휘날리는 곽오주, 화살쏘기의 대가 이봉학, 대장감인 칼 잘 쓰고, 말 잘 타는 천하무적 임꺽정.
 
​'꽃'에 이름을 붙여주어 존재의 가치를 인정해준 것처럼, 소설이라는 공간에 천한 그들의 이름을 담아 독자로 하여금 계속 부르게 한 벽초 선생. 연재 당시 창씨개명으로 조선 이름을 잃었던 독자들에게 '순조선 이름'은 민족의 정서를 잃지 않게 했을 것이다. 나 또한 이들의 거침없는 삶의 여정을 따르며, 7년간 공황장애로 위축된 자존감에 기(氣)를 받는 느낌이었다. 삶에 기죽지 말라고, '인생 별거 없다. 그냥 사는 거야'라는 투박한 위로의 몸짓이 느껴졌다. 일제의 감시가 삼엄했던 식민지 시대에도 독재 정권의 '금서'로 낙인찍힌 <임꺽정>을 숨어서라도 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제야 나는 알 것 같다. 관념이나 이념에 우선하여 인간사의 우여곡절 삶이 신바람 나게 춤을 추는 <칠두령>의 이야기가 혼란한 시대를 살았던 개인의 삶에 힘이 되었을 것이다. 문학의 비현실이 독자로 하여금 승화되는 지점이다.
 
​칠두령 외에 <임꺽정>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 꺽정이 누나 섭섭이, 이교리와 인연으로 백정 딸에서 정부인이 되는 신분 상승 신화 봉단이, 백정 학자 병해대사 양주팔, 화적패를 밀고하는 서림이, 잔꾀에 능한 노밤이 그리고, 청석골 터줏대감 오가. 헤어질 결심을 해야 할 만큼 정이 들었던 인물들이다. 계절의 시간마다 만났던 사연과 사람들이 유독 기억나는 것은 '수요일 밤'의 낭독 때문이다. 이야기체의 <임꺽정>은 낭독으로 읽기에 가장 적합한 방식인 것 같다. 수많은 대화가 오가고, 이야기 속에 또 다른 전설이나 야담을 말해주는 서술은 마을 정자에서 누군가 들려주는 옛이야기 같다.
 
​<봉단편>에서 이교리와 봉단의 정분5)이나 게으른 사위를 구박하는 장모의 비난을 듣다 보면 웃음이 난다. <피장편>에서 백두산 기행 중 만나는 연인 커플, 청년 꺽정과 운총의 눈 시린 사랑의 대화가 너무 예뻐 설레기도 했다.6) 이웃집 최가의 밀고(密告)로 꺽정이 아버지 돌이는 문초당하여 죽는다. 아버지 주검 앞에서 꺽정이가 울부짖는 장면7)은 소리꾼 동무의 낭독으로 뭉클함이 더했다. 읽기가 끝나고도 짠한 마음에 잠들지 못했던 초여름 밤의 감정이 기억난다. <임꺽정>이라는 역사 장편소설을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로 완독할 수 있었던 추억은 2023년 나에게 온 큰 행운이었다.
 
​'모든 시작은 우연이다. 우연에 우연히 더해져 그 연쇄고리는 '시절 인연'을 만나 필연이 되고, 운명이 된다.'라는8) 고미숙 작가의 말을 빌리지 않을 수 없다. 페이스북에 올린 노명우 교수님의 결심. '2023년에는 홍명희의 <임꺽정>을 읽어야겠다고 결심하는 것이다.'라는 글은 김태희 편집장님의 마주침으로 하나의 기획이 되었고, 완독을 결심한 동무들이 접속하여 현실화 되었다. 2015년 '임꺽정 읽기 독자모임'에서 <임꺽정 전집>을 받았지만, 완독하지 못했다. 이듬해 공황장애로 인해 오랜 시간 책을 제대로 읽을 힘이 없었다. 사계절출판사에 마음의 빚이 켜켜이 쌓여가다 잊어질 즈음, 시절 인연으로 '빚'이 '빛'이 된 것 같다.
 
고미숙 작가의 말을 또 빌린다. '니체가 그랬다던가. 운명은 길섶마다 행운을 숨겨두었다고.'9) 날마다 공황증상 속에 허우적거리는 일상에 '사계절 임꺽정 함께 읽기' 동무들과 유복이, 오주, 막봉이, 봉학이, 돌석이, 천황동이, 운총이, 봉단이, 섭섭이, 서림이, 노밤이, 그리고 꺽정이 다 불러주고 싶은 이름들.. 함께 웃고, 울고, 분노하고 복수하던 시간들이 오랜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저자 벽초 홍명희. 조선의 산도적 임꺽정(林巨正)을 깊은 청석골 숲에서 내려오게 하여 민중의 삶에 배치시켰다. 당신은 북에 남으셨고, 당신이 탈주시킨 임꺽정은 저 홀로 당당하게 저잣거리의 밥이 되고, 술이 되고, 고기가 되어 사람 속에 살고 있다. 우정과 사랑을 나누는 곳에 분노와 결의를 다지는 곳에서 미완의 임꺽정은 삶에서 계속 살아가고 있다. 시간의 공력과 '위대한 혼(魂)'을10) 다해 본인이 지향한 '순조선 정조'의 신념을 한국문학사에 남겨둔 위대한 업적을 독자인 나는 추앙함을11) 고백한다.
 
 
​"상봉은 겨울같이 치웁다." ....
​추워지니 운총이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1) "가만 내버려 두지 않으면 네가 쫓아가서 붙잡아 올라냐." 하고 오가는 평소에 흔히 하는 실없는 말투로 대답하였다. <임꺽정 10권, 화적 편 4, 이하 미완>
2) 5월 <임꺽정 4권, 의형제 1> 완독 후, 소감 나눔 시간에 부산 장재선 동무님이 "듣다 보면 개인마다 '쪼'가 느껴진다"라는 소감이 재미있었다.
3) 강맑실 사계절출판사 대표, 글 참고 <조선의 임꺽정 다시 날다, 사계절출판사 5쪽~8쪽>
4) 홍명희, 조선일보 연재, 1928년 11월 21일 ~ 1939년 3월까지, 초기에는 <임거정전>으로 기록.
5) 봉단이가 남 보는 데서는 김서방과 서로 말을 하지 아니하여도 단둘이 있어서는 정답게 속살거리고 더욱이 베개 위에서 이야기할 때는 재미가 참깨같이 쏟아졌다.
<봉 단편 1권/ 83쪽>
6) 이와 같이 사랑스럽고도 거룩한 눈동자는 온 세상을 다 뒤져야 또다시 보기 어려우리라고 꺽정이는 생각하였다. ... "아내가 이뻐서." "남편? 그럼 남편도 이쁘다." 하고
운총이는 하하 웃었다. "아가야." <피장편 2권 370쪽>
7) 눈에 뜨이는 것은 얼굴 덮은 홑이불폭이요, 코를 찌르는 것은 살 썩는 시취라 꺽정이는 정신이 아뜩하며 눈앞이 캄캄하여 털썩 주저앉았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서서 방으로 들어왔다. "아버지, 나 왔소, 꺽정이 왔소." ~ ~ ~ 꺽정이는 울음을 겨우 그치고 자기 손으로 머리를 푸는데.. <의형제편 3권/ 130~131쪽>
8)9) 임꺽정, 길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 '고미숙의 유쾌한 임꺽정 읽기' / 사계절출판사, 18쪽, 338쪽
10) 위대한 혼魂, 위대한 천재일 때 그는 학적 교양보다 자기 속에 전개되는 세계와 현실생활에서 예민한 피부로 흡수하고 생활로 세워 나가는 ... <화적편4/ 174쪽>
11) JTBC 2022. 4월~5월에 방영한 <나의해방일지/ 박해영작가> 미정이 구씨에게 하는 대사를 따옴.
"난 한번은 채워지고 싶어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사랑으로 안돼 추앙해요."

 

 

오장이 당기기는 일반이라 그는 아까 밥으로 속던 것을 다시 한번 가보려고 간신히 일어서서 비척거리며 걸어갔다. 가서 보니 똥은 똥이나 보리 쌀알이 그대로 많이 있다. 그는 이것저것을 생각할 것도 없이 손으로 움키어가지고 도로 시냇가로 나와서 보리 쌀알을 물에 일어 골라서 입에 넣어 목으로 넘기었다. <봉 단편 1권 / 54쪽>
 
 
새삼스럽게 운총의 얼굴을 들여다보니 맑은 눈 속에 박혀 있는 예쁘장스러운 눈동자에 천왕의 모양이 비치어 보이는 것 같았다. 이와 같이 사랑스럽고도 거룩한 눈동자는 온 세상을 다 뒤져야 또다시 보기 어려우리라고 꺽정이는 생각하였다. <피장편 2권/ 370쪽>
 
 
꺽정이가 해거를 부리러 들자마자 백손 어머니 입에서 발악이 막혔던 물 터진 것같이 쏟아져 나왔다. "오냐, 어디 해보자. 네가 나를 죽이기밖에 더하겠느냐? 내가 네 손에 죽지 않으면 내 손으로 자격해서라도 죽지, 뒷방에서 천덕꾸러기 노릇하고 살지 않는다. 첩도 안 얻겠다던 놈이 본기 집이란 게 자그마치 셋씩이야? <화적 편 1권/338쪽>
 
 
정영경
작성: 2023. 12월 6일 ~ 12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