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의 살아 있는 고민을 담은 Who am I? 그 생생한 목소리들

십대를 위한 자아 탐색 교과서 『Who am I? 나는 내가 만든다』를 책임 집필한 안광복(서울 중동고 철학 교사)씨가 『1318 북리뷰』 독자를 위해 특별히 <Who am I?> 수업 후기를 써 주었다. ‘나를 찾는 수업 시간’은 아직 우리 교육 환경 속에선 낯설기 그지 없다. 이미 세 해째 이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안광복 교사의 예는 자아 찾기 교육에 관심 있는 학교와 교사, 학생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 편집부
 
 
‘나’를 위한 수업을 만들기까지
“샘 수업 짱으로 잼있어요!”
“수업을 통해 제가 모르던 나의 모습을 많이 알게 되었답니다. 선생님께 고맙다는 말씀 드리고 싶어요.”
 
교사인 나는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들을 때가 제일 기쁘다. 사연도 많고 말도 많았던 <Who am I?>에 매달린 지 어느덧 5년, 마침내 책자로 거듭난 수업의 결실을 보는 순간 내 귀에는 수많은 학생들이 그간 주었던 감사의 말들이 되살아나 울리고 있는 듯했다.
<Who am I?>는 교수요목(敎授要目)부터 교수 설계, 교과서 개발까지 교과 개발의 전 과정을 일선학교에서 실현해 낸 최초의 교과다. 그러나 최초의 시도는 항상 최고의 비판을 받는 법, <Who am I?>는 개발 초창기부터 수많은 의문과 반대에 부딪히곤 했다.
 
“세상에 ‘나((자아)’를 교과 내용으로 하는 과목이 어디 있어요? 도대체 ‘나’에 대해 가르칠 거나 있나요? 이런 황당한 수업을 감당할 수 있는 선생님이 과연 있기나 해요?”
 
그러나 교과 개발에 대한 중동학원과 당시 중동고 교장이었던 정창현 선생님의 의지는 분명했다. 우리 나라는 교육열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다. 하지만 그 내면은 슬프기 그지없다. 아이들은 남들에게 뒤지지 않으려 아등바등하고 있을 뿐, 진정 자기가 왜 공부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학생은 드물다. 자신의 장래와 꿈을 위해 공부를 ‘견디고 있다’고 하면서도 정작 “나는 누구일까?”, “정말 내가 원하는 바는 무엇일까?” 라는 가장 근본적인 물음에 대해 생각해 볼 시간은 우리 교육 과정 속에 없다. 이런 기묘한 역설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공부를 시키면서도 학업 성취도는 지극히 낮은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나에 대해 고민해 보는 수업이 왜 필요한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
 
 
난제 중의 난제, 모순되는 두 개의 길
예상하기는 했지만, <Who am I?> 수업은 ‘미치고 팔짝 뛸 만큼’ 힘들었다.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 교재 개발은 ‘맨땅에 헤딩하기’일 수밖에 없었지만,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Who am I?> 교과에 대한 모순된 요청이었다.
첫째, <Who am I?>는 시험을 보지 않는 재량 시간을 위한 과목이다. 당연히 학생들에게 수업에 대한 의무감을 지우기 어렵다. 그런데도 학생들을 긴장시켜서 자신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길로 이끌어야 했다.
둘째, 자신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려면 상당한 자기고백이 필요하다. 그러나 산만한 교실 상황에서 학생들이 내밀한 이야기를 털어놓게 하기는 무척 어렵다. 설사 털어놓는다 해도 문제다. ‘나’를 찾는답시고 아이의 은밀한 고민들을 들추어 낸다면 더 큰 상처를 받는 상황이 생기지는 않을까? 이 때문에 왕따라도 당하게 되면 큰일 아닌가?
이 두 가지 사항은 정말 해결책을 찾기 어려운 난제 중의 난제였다.
 
 
이론을 죽이고 살아 있는 이야기를 담다
그러나 세상에 불가능한 일은 없다. 필요가 있으면 어떻게든 방법은 찾게 되어 있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연구팀은 이 모순되는 요구들의 해결책을 찾아 낼 수 있었다. 먼저, 수업의 분량을 대폭 줄이면서 딱딱한 이론 설명을 없앴다. 대신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를 풍성하게 집어넣었다. 영양가는 그대로 두고 당도(糖度)만 높이는 묘안을 짜낸 것이다. 수업에 참여했던 김성민 군의 말을 들어 보자.
 
“수업 시간에 들은 재밌는 이야기들이 나중에 알고 보니 문학·철학·심리 등의 깊은 지혜를 담은 것들이었다. 딱딱한 지식들은 생활 속에 녹아든 지혜로 바뀌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Who am I?』 책자에 담긴 이야기들에는 철학·문학·심리학·교육학 등의 정수가 압축되어 있다. 그럼에도 일화(逸話)를 중심으로 소개되어 대다수 학생들에게는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로만 여겨질 뿐이다. 그렇지만 읽고 나면 자신도 모르게 삶의 의미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게 만든다. 그만큼 이야기 하나하나가 거부감이 적고 흡수가 빠른 고농도의 지적 영양제들인 셈이다. 뛰어난 실력과 풍부한 상담 경험으로 다져진 중동고의 박사급 교사들이 아니었다면 이러한 콘텐츠 개발은 불가능했을 터이다.
 
 
조용히 마음을 열어 주는 프로그램
두 번째로, 점진적이면서도 무리 없이 자신을 열어 갈 수 있게끔 탐색 과제를 설계했다. <Who am I?>의 탐구 과제는 하나하나의 주제가 학생들이 의식하지 못한 채 반복되게끔 설계되어 있다. 내면을 털어놓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배려한 결과다. 처음에는 주변부 이야기로 말문을 틀 뿐이지만, 차차 자신의 깊은 고민까지 이야기할 수 있도록 여러 장에 걸쳐 동일한 주제의 탐구 과제가 흩어져 있다. 다음은 한 학생의 수업 회고다.
 
“첫 시간에 ‘자기 이름 분석’을 했다. 내 이름의 한자 뜻과 지어진 배경을 설명하는 시간이었다. 별 생각 없이 시시덕거리며 했는데, 그 후 언젠가 ‘내 인생의 10대 사건’을 하면서는 ‘쿵’하고 가슴을 때리는 게 있었다. 선생님 설명을 듣고 내가 적은 사건들을 분석해 보니, 내가 꼽은 10개 사건 중 6개가 종교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내 이름 聖基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내 이름은 ‘성스러운 기초’라는 뜻이다. 평소 내가 왜 종교적인 문제로 고민도 많이 하고 부모님과 다투기도 많이 했는지 그 이유가 어렴풋이 잡히는 느낌이었다.”
 
이렇듯 <Who am I?>는 자기도 몰랐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도록 끈질기게 반복적으로 성찰을 이끈다. 그러는 가운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대인공포에 시달리던 김진우 군(가명)의 고백이다.
 
“저는 항상 제가 소심하고 바보 같은 아이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체 이탈 게임’을 통해서 저는 제 자신을 다르게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 단짝 친구가 저를 ‘존재감 없고 어눌한 아이’라고 볼 것이라 추측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오히려 나를 ‘꼼꼼하고 덤벙대지 않으며 신중한 아이’로 평해주었어요. 학기 말에 반 아이들 전체에게 평가받는 시간도 있었는데, 그 때 다른 급우들의 평가도 비슷하더군요. 비로소 저는 제 자신을 스스로 얼마나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나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Why’에서 ‘How’로!
나아가 <Who am I?>에서는 “Why” 뿐 아니라, “How”에 대한 고민도 해결해 준다.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생활 계획은 어떻게 짜는지, 친구나 부모님과 대화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등의 고민을 풀어 줄 내용도 담겨 있다는 뜻이다.
미숙하고 여린 십대에게는 언뜻 사소해 보이는 충고 하나가 삶 전체를 뒤흔드는 것일 수도 있다. 공부 방식의 사소한 변화 하나가 커다란 진보를 부를 수도 있고, 감정을 표현하려는 작은 노력이 부모님과의 해묵은 갈등을 없애 줄 수도 있다. 홍서범(가명) 군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Who am I?> 시간 중 저는 학습법에 대해 배울 때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그 때까지 저는 텔레비전을 너무 많이 봐서 공부를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선생님 설명을 듣고 나니, 제 문제는 텔레비전이 아니라 어머니와의 갈등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머니하고의 사이가 편치 않으니 공부가 잘 되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텔레비전만 보게 되었던 거예요. 그래서 어머니하고 관계를 풀어 보고자 더 많이 노력했습니다. 이 때도 <Who am I?> 때 배운 ‘마음 알아주기 게임’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Who am I?, 이 땅의 십대에게 보내는 선물
앞서 말했듯, <Who am I?>를 개발하고 수업하는 과정은 힘들고 괴로웠다. 그러나 수업을 통해 변화하고 발전하는 학생들의 모습에는 모든 고통을 잊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었다. 이 점에서 <Who am I?>는 학생에게나 교사에게나 괴로우면서도 포기할 수 없는 ‘중독성이 강한’ 교과라고 할 수 있겠다.
이제 그 동안 수업의 고민과 성과를 추려 『Who am I? 나는 내가 만든다』라는 작은 책자에 담았다. 아울러, 중동고에서는 2007년까지 출간을 목표로 <Who am I?> 교사(부모)용 매뉴얼도 개발하고 있다. 아무쪼록 5년이라는 시간의 고민과 성과가 이 땅의 모든 청소년들과 그들을 위해 고민하는 선생님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 『Who am I?』 책임 집필자)
 
 
 
학생 후기
<Who am I?> 수업을 받고 나서
작년 3월, 중동고등학교에 입학해 학기 초 시간표를 받았을 때 내 눈길을 끈 건 <Who am I?>라는 과목이었다. 제목만 봐도 대략 진로 탐색, 자아 찾기 등 이런 식의 프로그램이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여러 번 너무나도 똑같고 식상한 진로 탐색, 자아 찾기 검사 등을 받아 온 나에게는 이미 생겨 버린 고정관념 때문에 <Who am I?>도 시간표에 형식적으로 끼워 넣은 뻔한 과목으로만 보였다. 물론 제목이 특이하기 때문에 마음속 한편에서는 어떤 과목일까 하는 기대감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1년간 <Who am I?> 수업에 참여하면서 우왕좌왕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던 내 자신을 발견하고, 한창 부모님과 진로 때문에 생겨난 마찰을 비교적 쉽게 극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미래 토크 2038” (30년 후 나의 미래 구상하기)를 해 보면서 내가 세상을 너무 근시안적인 안목으로 바라본다는 것을 느끼고 좀더 장기적인 시각으로 미래를 바라보게 됐다. 안광복 선생님이 30년 뒤 동문 모교 방문의 날 행사 때 우리가 <Who am I?> 시간에 썼던 것을 그대로 주신다고 하셔서 나중에 내가 이 글을 읽고 무슨 생각을 할까, 상상도 해 보면서 혼자 흐뭇해한 적도 있다.
우리 청소년들은 사실 ‘진로 탐색’, ‘자아 찾기’ 이런 단어만 들어도 몸이 축 처지고 걱정이 앞선다. 그런데 특유의 프로그램과 학생들의 높은 관심이 더해진 <Who am I?> 수업은 학생과 선생님이 하나가 되어 흥미를 가지고 수업에 임할 수 있었다.
친구들이 <Who am I?> 시간만 다가오면 눈이 눈이다 초롱초롱해져서 선생님을 기다리던 게 기억난다. 공부 시간에 잠만 자던 아이들도 <Who am I?> 시간이 되기 전에는 잠을 깨고 기다렸으며, 또 모두들 자신이 써 둔 글을 열심히 발표했다. 자아 찾기, 진로 탐색에 대해 부정적이고 걱정만 하던 우리들 머릿속에 박혀 있던 고정관념 자체가 수업이 진행되면서 뿌리째 뽑힌 듯하다. 그리고 장래를 걱정하고 비관하던 아이들이 미래에 대해 좀더 자신감을 가진 것 같다.
아쉬웠던 점은 작년까지는 교재(책)가 없어서 수업을 받고 집에 가서 더 글을 써 보고 생각해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올해 반갑게도 『Who am I?』 책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제 후배들은 좀더 체계적인 <Who am I?> 수업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뿌듯하다.
 
김성우 (중동고 2)
 

 
1318북리뷰 2005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