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박지리문학상 심사평

안녕하세요, 사계절출판사입니다.
총 140편이 응모된 제4회 박지리문학상은 구병모 소설가, 정소현 소설가, 강지희 평론가 님이 예심과 본심을 맡아주셨습니다.
각 심사위원이 신인 작가들에게 보내는 응원과 애정 가득한 심사평을 공개합니다. 응모해주신 모든 분들과 심사위원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심사평 전문>

당신이 만약 소설 공모에 도전하고자 한다면, 한 편의 소설을 쓰기에 앞서 이 점을 기억해주기를 바란다. 당신이나 내가 지금 막 발굴한 아이디어와 소재가, 일찍이 지구상에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초유의 것일 가능성은 매우 적다. 거의 없다. 어쩌면 아예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우리가 만든 모든 이야기는 과거의 유산을 바탕으로 한다. 답습한다는 의미로서만이 아니라, 과거를 전복하려 할 때에도 과거라는 게 존재하는 이상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과거의 자장 안에 놓여 있다. 분야를 막론하고 과거에 영향을 받지 않는 예술가는 없다. 그러니 정작 중요한 것은 번뜩이는 아이디어나 기가 막힌 소재에 있지 않다. 무슨 소재와 주제라 할지라도 그것을 조리하는 방식, 때로는 플레이팅하는 요령과 심지어 그것을 담은 접시의 디자인까지, 전체적인 애티튜드가 중요하다. ‘무엇을’보다는 ‘어떻게’, 이는 ‘소설 쓰는 아이디어와 소재를 도대체 어디서 구하느냐’는 갈증 어린 질문에 대한 나의 일관된 대답이다.

어떤 소설을 읽고 ‘신선하다’나 ‘새롭다’는 평언을 남발하는 것은 오늘날 사어에 가까운 진부한 코멘트로 신뢰도가 떨어진다고 느껴서, 언젠가부터 사용하기를 피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한 표현이 되겠으나 이번 예심에서 ‘진부한 신선함’에 매달리고자 하는 조급함이 느껴지는 소설들을 여럿 만났다. 그 조급함은 주로 (스스로 기발하다고 생각할 듯한) 아이디어나 (충격적인) 소재에 집착한 소설을 쓰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그건 개인의 자유이므로 뭐가 됐든 상관없는 트렌드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아이디어와 소재에 쏟는 그 지대한 관심의 절반만이라도, 소설의 구조를 쌓는 연습과 문장의 정련에 배분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보석 구슬이 서 말인데 그걸 꿰지 않고 흩어놓아서 목에 걸 수 없거나, 꿰기는 꿰었는데 꿴 줄이 너덜거려서 조금만 잡아당겨도 끊어지는 형국을 반복하여 접하다 보면, 급기야 보석 구슬이 애초에 지닌 가치마저 의심스러워지는 부작용이 발생한다.

한편 문장의 정련이란 대단한 게 아니라 ①띄어쓰기와 맞춤법 등의 기초 문법을 익히고 ②최소한의 정제된 표현을 구사하는 것, 조금만 더 욕심을 낸다면 ③독창적이거나 풍부한 표현을 연구하는 것 정도일 텐데, ③은 필수라기보다는 옵션이지만 ①과 ②가 충족되지 않은 작품이 본심의 테이블에 올라오는 경우는 별로 없다.
‘최소한의 정제된 표현을 구사한다’는 말조차 너무 광범위하고 추상적으로 인식된다면, 하찮은 예시를 하나만 들어보자. 가령 소설 속 어떤 장면에서 창고가 폭발했다. 쾅! 건물이 무너졌다. 쾅! 대신 콰아아아앙―!을 써야 하는 불가피하고도 불가결한 이유가 있는지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거기서 조금만 더 나아가, 그 자리에 쾅!이라는 의성어가 어떤 효과를 발휘하는지 연구해준다면, 건물의 무너짐을 나타낼 때 단순한 쾅! 대신 다른 방법은 없을지도 고민해준다면 좋겠다. 하찮아 보이는 한 글자라도 영혼을 갖고, 고심 끝에 키보드를 두드려주면 좋겠다. 고심 끝에. 숙고하여. 우리는 생각이란 걸 하는 인간이고, 데이터를 딥러닝으로 수집하여 효율적으로 혹은 방대하게 조합 산출하는 AI와는 달라야 한다. 어차피 인간은 데이터 획득과 학습에 있어서 AI를 따라잡기 어렵다. 다행인 점이면서 유의할 점은, 소설은 데이터의 나열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앞에 도착한 예심작들 가운데 읽을 만한 이야기, 비교적 괜찮은 소설의 형태에 근접한 작품은 「어느 사적인 예지」였다. 주요 소재와 설정에 관한 스포일링을 방지하고 말해보자면, 일단 첫 페이지에서 독자의 시선을 낚아챌 법한 ‘소설적 아이템’에 속하는 요소들이 여럿 등장하는데 그중 하나가 괴팍스러워 보이는 캐릭터다. 이 캐릭터가 주제의식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으나, 메인 스토리와 핵심 인물들은 따로 존재한다. 작가가 야심차게 제시한 소재와 설정이, 정작 중요한 기둥을 이루는 이야기 및 인물들과 적절한 조응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는데, 그 점은 이야기 파트를 둘로 나누어 연작소설의 형태로 만들거나 하면 해결 방법이 없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서두 이후로 소설을 가득 채운 서구 사상의 역사, 가공의 고대 문명에 관한 지식, 사유의 직접적인 나열이 서사를 끌고 가는 역할을 하지 못하다 보니, 독자는 한 부부의 갈등과 고민을 응시하기보다는 선생님 앞에 앉아 철학 특강을 듣다 물러나오게 되어서, 작가는 자신이 지닌 풍부한 지식을 직접 강의 전달이 아닌 서사의 일부로 녹이는 작업을 선행하기를 권한다.

본심에서 만난 「점거당한 집 외 2편」이 당선작으로 결정되기까지 그리 많은 논의가 오가지 않았다. 일종의 근미래 미디어아트 연작으로, 머나먼 미래가 아닌 불과 10~20여 년 뒤라는 배경이 주는 긴장감이 돋보인다. 허구인 줄 알면서도 깜박 속아 넘어가는 것이다. 작가는 소설과 전시미술의 경계를 자유로이 해체하고 때로는 공간과 지명과 소설적 자아와의 경계를 지우면서 독자에게 혼란을 유도하는, 소설 자체로 세 편이자 한 편인 퍼포먼스를 펼쳐 보인다. 서사의 배열과 인식의 전개에 있어 모두 기품 있는 플레이팅을 보여주며,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그 의도를 감지하기 어려운 퍼포먼스의 현장에 함께 있는 것만 같다. 이 소설은 최근 수년 새 문화시장―그중에서도 콘텐츠 업계의 주요 미덕인 것처럼 언급되곤 하는 가치와 표현을 빌리자면, 도파민을 분비하는 일에 최적화된 소설이 아니다. 메타소설이 탑재한 속성으로 인해, 우리의 기대나 소망과는 별개로 대다수 독자님의 환영을 받기는 어려워 보인다는 점이, 이 소설을 당선작으로 정하는 데에 따라온 거의 유일한 우려였다. (이것이 불식된다면 기쁠 것이다.) 그다지 멀지 않은 미래에, 창의적이고 의욕적인 젊은 예술인들이 이 소설과 컬래버 전시를 해보고 싶다고 사계절출판사에 제안해 오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박지리문학상을 통해 또 한 명의 저력 있는 소설가를 만나게 되었음에 감사하면서 축하와 응원을 전한다. _구병모(소설가)



박지리문학상을 처음 함께했던 나는 응모작이 담긴 상자를 받았던 순간을 기억한다. 세상에 발표되지 않은 소설들을 가장 먼저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기도 했지만, 아직 규정되지 않은 문학상의 정체성을 만들어가기 위해 어떤 작품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스러웠고, 새로운 감각의 태동을 알아채지 못하거나 다름을 틀림으로 받아들이는 옹졸한 우를 범하게 될까 두려웠다. 취향이나 나태함 때문에 좋은 작품을 놓치면 어쩌나 싶은 마음에 응모작을 두세 번씩 읽고 나서야 겨우 걱정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때의 과정과 결과가 모두 좋았고, 그 후로 많은 예비 작가들의 응모작을 읽어왔기에 이번에도 심사가 조금은 수월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3년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걱정에 사로잡혀 원고를 쉽게 손에서 놓지 못했다.
눈이 번쩍 뜨이고, 자세를 고쳐 앉게 할 작품이 나오리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시작했던 심사는 쉽지 않았다. 그리고 심사보다 심사평을 쓰는 것이 훨씬 더 어려웠다. 심사가 쉽지 않았던 이유는 본심에 올릴 만한 작품을 좀처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고, 심사평을 쓰는 것이 더 어려웠던 이유는 이렇게 기본적인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고민, 적나라한 평가가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 불쾌한 행위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솔직하게 심사평을 쓰려는 이유는 단 한 명에게라도 도움이 되고자 하는 바람에서다.

응모작의 다수는 소설이 무엇이고 다른 장르와의 차이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것 같은 인상을 보였다. 소설은 언어와 문자를 매체로 하는 예술 작품이다. 작가가 만들어낸 허구의 세계를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해 기본이 되는 것은 정확한 문장이다. 유려하지 않더라도 소설을 지탱할 수 있는 단단한 문장이면 된다. 그러나 많은 응모작이 서툰 문장과 빈약한 어휘력으로 소설을 전개해나가고 있었다. 그런 문장으로 세계를 그려나가는 것이 쉽지 않다 보니 긴 대화와 짧은 지문, 설명을 주로 사용해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급급하다. 최근 신인 공모의 응모작에서 보이는 이런 형식은 시나리오나 웹소설, 영상물 등의 영향으로 보이는데, 그런 장르의 강점인 이야기의 참신함이 빠진 채 형식만을 답습하고 있어 아쉬웠다. 문장이 잘 쓰인 응모작들 중에도 아직 소설화되지 않은 아이디어를 시놉시스처럼 서술하거나 내러티브를 그대로 서술한 경우가 많았고, 날것 그대로의 관념과 감상을 나열하거나 아포리즘 같은 문장으로 연결해가려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응모작들이 소설로 완성되기 위해서는 사건을 구성하고 의미화하는 가공의 과정이 더 필요하다.
상자 안에 있는 응모작 중 완결성을 가진 작품은 열 편이 되지 않았다. 그중 완성작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드물었고, 결점이 적은 작품은 더욱 찾기 힘들었다. 많은 분량을 채워 형식적으로 완결된 것으로 보일 뿐,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채 전달하지 못하고 용두사미로 끝나거나, 의미화되지 않은 서사만 있거나, 주제만 앙상하게 그려놓은 경우가 다수였다. 결말에 이르긴 했으나 인물이 소설을 통해 무엇을 얻거나 잃었는지, 변화했거나 변화하지 않았는지, 이 긴 이야기를 통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납득하기 어려웠다. 응모작에서 보이는 인물을 그리는 방식도 극과 극이었는데, 기계적 pc함에 매몰된 경우와 편견과 혐오가 엿보이는 경우가 동시에 존재했다. 둘은 전혀 달라 보이지만 인물을 납작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런 인물들은 간파되기 쉬우며 그로 인해 이야기의 전개가 예측 가능했다. 또, 소재와 주제 선택에 있어서도 순문학이나 장르문학에서 기성작가들이 다루고 있는 것들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도 예측 가능한 이야기를 만드는 데 한몫했다.
나는 상자를 열기 전, 신인의 패기를 느낄 수 있는 신선한 이야기, 어디서도 보지 못한 이야기를 만난다면 완성도가 떨어진다 해도 선택하리라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런 작품을 찾기 어려웠다. 놀랍게도 완성도가 낮은 작품은 참신함도 떨어졌다. 놀랍다고 한 것은 여러 번의 심사를 경험하면서 완성도와 참신함이 반비례라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이 또한 편견에 지나지 않음을 깨달았다. 앞에서 말한 기본적인 조건들을 충족시키고 완성도와 참신함을 지닌 두 작품, 「맨투맨」과 「점거당한 집 외 2편」을 어렵게 골라냈다.
본심에 올라온 다섯 편의 소설이 각자의 박스에서 골라낸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비단 내 상자만의 문제가 아니었고, 나만의 곤란함도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심은 지난했으나, 최종심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다섯 편 중 상대적으로 흠결이 적은 작품이 「점거당한 집 외 2편」이라는 공통적인 의견이 나왔고, 올해 당선작으로서 손색이 없는 완성형 작품이라는 데 금세 뜻을 모을 수 있었다.
「점거당한 집 외 2편」은 기고문 형태의 연작소설이다. 미래 시점에서 쓰인 회고록 형식인 이 소설이 다루고 있는 과거 또한 아직 오지 않은 우리의 근미래이다. 회고록에는 실제 우리가 겪었던 일들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이 서술자의 과거에 뒤섞여 있다. 이런 흥미로운 설정하에 쓰인 세 편의 기고문을 통해 우리는 아직 오지 않은 동시에 이미 죽고 없는 인물을, 아직 일어나지 않은 동시에 이미 일어나버린 사건을 알게 된다.
‘작가가 창조해낸 작가의 창작과정 탐색기’를 창조해낸 작가에 대한 회고인 동시에 소설에 등장하는 작품 제목이기도 한 「점거당한 집」과 소설가가 원전 사고 이후 사고 지역인 고향으로 돌아가 쓰게 되는 소설의 제목이자, 소설을 창작하는 과정을 회고한 「금일의 경주」, 원전 사고 직후 무등산 일대에 나타난 빛의 장벽으로 인해 고립된 광주에서의 시위를 다룬 「길 위의 희망」. 이 세 편의 소설을 읽는 데는 약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독자는 인터뷰와 작품, 전시 책자, 연구서 등으로 모자이크를 스스로 완성해야 하고, 그것이 재현하고 있는 인물과 사건, 배경을 능동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그리고 소설 속 여러 이야기와 이미지들, 이를테면 예술가 남매와 그들이 재현하고 있는 작품 속의 남매 이야기, 존재했다가 사라진 공간, 남자이기도 하고 여자이기도 하고, 죽은 누나 본인일 수도 있는 인물, 과거 전시의 회고전, 실제로 우리가 겪은 재난과 참사와 그 이후 불합리한 처리 과정과 유사한 원전 사고, 광주에서 벌어진 사건의 반복과도 같은 사건들을 중첩시켜 보아야 한다. 수고스럽지만 읽는 즐거움을 주는 이런 작업이 끝난 뒤, 우리는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르고, 이미 일어났던 일들이 도사리고 있는 세계를 만날 수 있다. 그 세계는 지금과도 크게 다르지 않아 독자는 기시감과 미시감을 느끼는 동시에 언캐니한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미래 시점에서 쓰인 소설을 읽고 지나간 시간에 대한 애도를 느끼는 아이러니를 체험하게 된다.
이 소설이 지닌 큰 장점은 설정과 소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와 주제를 전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특유의 정서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이 작가가 앞으로 어떤 소재와 형식으로 어떤 이야기를 전달할지보다 어떤 정서를 체험하게 해줄지 더 궁금하다. 그래서 더욱 기쁜 마음으로 이 작가가 보여줄 세계 속으로 함께 들어갈 준비를 할 것이다. 오랜 시간 소설 때문에 즐거워하고 아파했을 작가에게 축하와 응원의 마음을 보낸다. _정소현(소설가)



예심은 투고된 140편을 심사자 세 명이 나누어 읽고, 각자 본심에 올릴 후보작을 추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장편에서 가독성을 획득하면서도 일정 이상의 서사적 밀도를 유지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알고 있다. 내가 읽은 예심 응모작 안에서 이런 어려움을 나름의 방식으로 타개하고 있는 경장편 한 편과 단편 세 편을 각각 하나씩 본심에 올렸다. 다른 심사자 두 분의 추천작까지 포함해 총 다섯 편의 본심 진출작이 추려졌고, 이를 두고 본격적으로 논의를 진행해나갔다.

내가 본심에 올렸던 소설은 「구덩이로의 초대 외 2편」과 「별의 가장자리에서」였다. 「구덩이로의 초대」는 정치역사적 문제를 희미한 배경음으로 깐 채 구체적인 일상과 미학적 논점을 교차적으로 조명하는 작품이다. 함께 보낸 다른 작품들을 통해서 작가가 자신만의 서사 기법을 확립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작가는 매끄럽게 포장된 기만적인 일상과 가공된 미학적 언사들 사이에서 이를 어떻게 깨뜨리고 이면의 뾰족한 조각들에 가닿을 수 있을지 고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에피소드 사이를 잇는 이음매가 다소 어색하게 느껴졌고, 주제를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듯한 중요한 문장들에 개념적 지식이 개입하며 생경한 관념어들이 자주 끼어든다는 것은 아쉬운 지점이었다.
「별의 가장자리에서」는 SF와 역사물을 결합시키는 시도 속에서 시적인 도약을 꿈꾸는 소설이었다. 소설은 과학 문명이 정점에 이른 행성이 순식간에 불기둥에 잠식되면서, 무한한 차원의 경계를 떠도는 하나의 상념으로 남은 정신인 ‘나’의 발화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영혼인 ‘나’가 정처 없이 떠돌다가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와 닮은 소녀 ‘단풍’과 그의 연인 ‘경헌’을 발견하면서, 일제 시기의 지옥 같은 역사와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다. 소설은 미래 사회에서 완벽한 아이 유전자를 선택하거나 육체의 시간을 되돌리는 방식이 어떤 폭력성으로 사랑을 파괴했는지, 이런 미래 사회에서 자발적으로 퇴장해버린 사랑하는 연인의 선택을 어떻게 이해할지 알아내기 위해 과거가 하나의 해답이 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그래서 ‘미래 사회에 대한 회상’과 ‘오래된 과거의 현재적 관찰’을 오가는 가운데, 일제 시기 식민지 조선에서 한갓 실험체나 성노예로 전락한 인물들 사이에서 삶과 사랑이 극적으로 완성되는 한 순간을 조명한다. 자칫 통속적으로 읽힐 수도 있는 줄거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을 끝까지 읽게 만드는 힘은 과거와 현재를 탄력적으로 오가는 구조에 있었다. 어느 육체에나 접속 가능한 영혼이 풀어내는 단상들은 다인칭 서술을 어색하지 않게 만들어주면서도 지루함을 지워주는 기능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소설의 마지막 순간에 화자의 오래된 의문이 단숨에 해결되면서 깨달음으로 도약하기에는 역사 속 사랑이 지나치게 추상화되어 있고 상투적이지 않은가 하는 의구심을 모두에게서 걷어내지 못했다.

본심에서 눈여겨봤던 작품 중 하나는 「어느 사적인 예지」였다. 소설은 한 부부를 중심에 두고 계류유산과 이혼의 상처를 가지고 있는 여자 ‘지은’과 철학과 대학원에서 학문적 여정을 밟고 있는 ‘도훈’의 교차 서술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사실상 소설의 무게는 철학과 도훈이 유명 고고학자 ‘김철훈’의 새로운 학술적 주장인 ‘시간이 거꾸로 흐른다’라는 말을 탐색하는 여정에 기울어져 있다. 지은의 과거 회상은 깊은 상처를 품고 있음에도 단조로운 감정 서술로 시종일관 이어지는 반면, 도훈의 서술은 서구사상사의 인식론 전반을 훑으며 실천지라고 불리는 ‘프로네시스’ 개념의 지성사를 펼쳐낸다. 그리고 이 개념에 대한 설명 끝에 주인공이 맞닥뜨리는 것은 인간의 ‘운명론’과 ‘자유 의지’라는 오래된 대립각이다. 팽팽하게 맞서는 철학적 아포리아인 이 궁지는 소설에서 물리학에서의 ‘시간 역전 대칭’이라는 개념을 끌어오며 명쾌하게 해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지적인 여정의 끝에 마주하는 장면은 꽤 감동적이다. 그러나 미래를 예지하는 동시에 인간의 의지가 개입하는 결정적 장면을 위한 긴 서사적 여정에서 저자는 인물들의 변화를 위한 지적 지렛대를 다소 성급하게 독자의 손에 쥐여준다. 그리고 이 지식들은 아직 충분히 가공되지 않은 채로 날것으로 삽입되어 있다. 우리가 소설에서 바라는 인지적 충격이란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감정 구조를 구불구불하게 통과한 후 마주하는 놀라운 풍경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채우고 있는 지적인 의지나 인간의 마음이 변화하는 순간을 소중하게 붙들어내는 따뜻한 시선이 향후 이 소설의 변화에 기대를 걸게 만든다. 조금 더 달라진 모습으로 머지않아 세상에 나오리라 생각한다.

12월 중순 서울의 모처에서 열린 본심에서 수상작을 정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세 사람 모두 공통으로 가장 윗선에 올린 소설이 동일했기 때문이다. 그 소설은 바로 「점거당한 집 외 2편」이었다. 박지리문학상에서 경장편이 아닌 단편 묶음이 선정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분명히 하나의 시리즈처럼 읽히며 내용적으로도 얽혀 있는 세 단편이지만, 당선작으로의 선택이 다소 모험적이기도 했던 이유는 이 소설들이 결코 쉽고 편하게 읽히지 않는 작품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소설들은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아포칼립스이자, 메타적인 예술가 소설이다. 각각 용인, 경주, 광주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소설에는 가상으로 만들어진 역사적 사료, 일기장, 전시 팸플릿 등이 실재하는 역사나 소설, 영화 등과 함께 흘러넘친다. 이미 복잡하게 흩어져 있는 사료들은 충돌을 예비하고 있으며, 그 파열음 속에서 독자들은 자신만의 길을 트며 진실을 찾아가야 한다. 그러나 어떤 극적인 의미에 도달하지 않고 끝끝내 잔여물의 그물망으로 남기만을 자처하는 이 소설은, 선명한 서사적 줄거리로 소급되지 않는 까다로운 형식으로 인해 하나의 아름다운 미광(微光)이 되어 남는다. 완성된 대본보다 흩어진 파편처럼 자리한 녹음된 음성에 힘을 부여하는 이 소설은 완벽한 연주가 아니라 그 이면에 자리한 소음이나 잔향이나 침묵에 더 귀를 기울여온 현대 음악을 닮아 있다. 어쩌면 이 흩어지고 의미화되지 않는 잔여물들이 가장 아름다운 문학의 결정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당선자에게 큰 축하를 전한다. _강지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