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서평] 『라인』 - 몸으로 말한다

몸으로 말한다

김 서 정 | 동화 작가, 평론가

  글은 생각의 산물이다, 라고 우리는 말한다. 그래서 글 쓰는 사람은 생각이 많은 사람으로 여겨진다. 틀린 말은 아니다. 글은 생각의 결과가 언어라는 매개체에 의해서 종이나 화면 위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면 무용은? 그림은? 음악은? , 색깔, 악기 등 눈에 보이는 매개체가 먼저 떠오르는데 그게 생각과 연결되지는 않는다. 부단한 연습, 아름다운 몸, 감수성, 미적 감각, 음악적 재능 이런 것들이 먼저 연상된다. 하지만 문학 이외의 예술 장르도 생각의 산물이다. 모든 예술은 자기표현의 장인데, 생각 없는 표현이 있을 수가 없다. 생각 없는 표현은 반응일 뿐이다. 이걸 바꿔 말하자면, 모든 표현에는 생각이 뒷받침된다. 무용에도 생각이 있고 그림에도, 음악에도 생각이 있다. 저 움직임, 저 색깔과 소리에는 어떤 생각이 들어 있을까? 그게 우리가 공연장이나 전시회에서 뭔가를 감상하면서 하는 생각이다.

  청소년소설 라인에 대해 쓰면서 서론이 이렇게 장황해진 것은, 이 이야기가 몸이 하는 생각, 혹은 몸을 통해서 드러내는 생각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쌍둥이 아닌 쌍둥이로 함께 자란 18세 남자아이 둘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형제와 부모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하는 생각들은 말과 함께 몸으로 표현된다. 말보다 몸으로 더 극명하고 밀도 높게 전달된다.
 

우리에겐 와이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안전장치가 없다는 유일한 공통점, 그래서 서로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야, 이도! 그 줄, 썩은 동아줄은 아닌지 확인하고 올라가.”
도가 줄 위에 올라설 때면 나는 도에게 장난삼아 한마디씩 하고는 했다.
“너나 잘해.”
도가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그리고 정작 머리가 깨진 것은 나였다. 나는 벽도 뚫지 못하고 대신에 내 머리를 깼다.

  작품 시작 부분의 이 문단은 두 아이가 어떤 자세로 세상과 맞서는지를 명료하게 드러낸다. 열여덟 남자아이는 세상과 맞서는 존재다. 대들고, 들이박고, 결국 머리가 깨진다. 이유? 존재 자체가 이유다. 그리고 나름의 이유도 있다. 도는 미혼모 엄마에게 출생 직후 버림받고, 같은 병원에서 같은 날 출생한 율의 부모에게 입양된 혼혈아다. 율은 비행기 조종 중 사고로 추락해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율은 장난으로, 도는 시큰둥으로 자기방어를 하고 있지만, 내부에는 격렬한 흔들림과 뒤엉킴이 있다. 왜 아니겠는가. 그것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해서 풀어야 할 터이다. 그 표현의 매개체로 아이들이 선택한 것이 라인, 그러니까 줄타기이다.

  도는 남사당의 전통 줄타기, 율은 한 독일 청년이 그 줄타기를 보고 영감을 받아 창시했다는 슬랙라인. 줄의 높이도 타는 방법도 다르지만 둘 다 안전한 땅을 거부하고, 땅으로 자신을 끌어내리는 힘을 뿌리치며, 흔들리는 외줄 위에서 자기 한계를 넘어서겠다고 안간힘을 쓴다는 공통점이 있다. 안전장치가 없다는 공통점도 있다. 이렇게 위태로운 극한으로 치열하게 자신을 몰아가면서 아이들이 오히려 굳건하게 자기 자리를 찾아내고 거기에 발을 붙이는 과정, 그 행로가 라인이다. ‘삶의 무게를, 인생이 자신에게 던져 준 무게를 아무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혼자 이겨 내기 위해 줄을 타는 도, 수십 번 줄에서 떨어져 가며 미숙한 육신을 넘어서는 것은 정신이다를 깨우치는 율. 두 아이가 안쓰럽지만, 안쓰러운 과정을 거치지 않고 믿음직해질 수 없으니 말리는 대신 가슴을 쓸어내리며 지켜봐 주어야 한다.

  이 이야기가 몸을 통해 말한다는 점을 언급하는 이유는, 몸과 생각의 상호작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두가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다. ‘몸은 없다!’를 선포하는 듯한 교육 제도 안에서 옴짝달싹 못 하는 아이들은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몸의 다양한 움직임, 거기서 얻는 수많은 감각들이 아이들의 감정과 생각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를 안다면, 아이들을 이렇게 미라처럼 꽁꽁 싸매 앉혀 둘 수는 없는 일이다. 떨어지고 깨져 가면서 자기 한계를 극복하고, 껍질을 깨고 새 세상으로 나아가는 아이들이 소설 속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라인은 던져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