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 전 연재] 구원의 미술관#.⑤_흰색白에 대한 탐닉

제5화하얀 꽃·하얀 옷·하얀 그릇. 흰색白에 대한 탐닉



 



『구원의 미술관』이 기대되는 이유는, 지금까지 ‘경계인’ ‘비판적 지식인’ ‘인생의 탐구자’ 등으로 익숙했던 강상중 선생님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날것으로서의 ‘인간 강상중’을 맛볼 수 있다고나 할까요?
 
강상중은 어떤 맛일지,
​지금부터 한 자 한 자 음미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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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꽃, 하얀 옷, 하얀 그릇
 
백白, 이것은 색인가, 아니면 색이라는 것을 초월한 색이라 할 수 없는 색일까? 저는 왜 흰색이 좋은지, 그 이유를 생각할 때마다 언제나 흰색의 신비함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사람은 왜 어떤 색에는 애착을 가지면서 어떤 색에는 혐오에 가까운 감정을 품게 되는 걸까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각자 선호하는 색상에 따라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즐기거나 또는 꺼려 하거나 합니다.
 
저는 흰색 옷을 좋아해서 서랍장을 열어보면 흰색 옷뿐입니다. 흰색이 아닌 것은 감색紺色 정도일까요. 그리고 흰옷을 입은 여성을 좋아합니다. 꽃을 살 때도 무의식적으로 하얀 백합을 고르게 됩니다. “왜 강상중 씨는 항상 흰색을 고르세요?”라고 이젠 지겹다는 듯 이유를 물어보는 사람이 있을 정도입니다.
 
흰옷, 흰 꽃 그리고 흰 그릇. 저는 조선의 백자를 아주 좋아합니다.
   
 
 
한반도에서는 고려(918-1392) 말기 무렵부터 백자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백자는 순도 높은 백토白土를 사용하여 투명한 유약을 발라 고온에서 구운 도자기인데, 처음에는 청록색을 띤 청자와 함께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청자는 점점 쇠퇴합니다. 하얀 바탕 위에 산화철로 된 안료로 그림을 그려 넣은 철화백자鐵華白瓷를 많이 만들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철화백자는 쇠퇴하고 색과 형태가 심플한 순백의 도기만이 사랑받게 되었습니다.
 
도예의 전통을 가진 나라들은 세상에 많지만 이렇게까지 하얀 도자기를 사랑한 나라는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흰색에 끌리는 것이 제 뿌리인 부모의 나라 문화와 상관없다고는 못하겠지요. 하지만 이것이 원래 제 유전자에 새겨져 있어서 좋아하는 것인지, 제 뿌리가 되는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알았기 때문에 나중에 좋아하게 된 것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결국 모든 것은 백白으로
 
흰색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무채색, 다시 말하면 색채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공허vacant’와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공허가 아니라 아마 그 반대 아닐까요. 속이 빈 것이 아니라 모든 색의 요소 혹은 모든 색의 가능성이 거기에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모든 색의 주장을 다한 그 끝에 흰색이 있습니다. 기쁨과 슬픔이 끝까지 간 그곳에서 흰옷을 입는 것은 이런 의미가 아닐까요.
 
회화에도 이와 관련된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19세기 프랑스에서는 인상파가 등장한 이후로 어두운 아틀리에를 나와 야외의 햇빛 아래에서 붓을 드는 화가들이 늘기 시작했습니다. ‘더 많은 빛을, 더 많은 빛을’이라면서 빛을 추구하던 그들이 사용한 기법은, 그리는 대상의 색을 무수히 많은 순수한 색으로 분해하고 그 수많은 색을 모자이크처럼 점묘하여 캔버스를 가득 메우는 것입니다.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를 그린 조르주 쇠라(1859-1891) 같은 신인상파로 불린 그룹입니다.
 

 
신인상주의 회화는 아주 가까이에서 보면 야단스러울 정도로 극히 채도가 높은 색들로 꽉 채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떨어져서 바라보면 정반대입니다. 이 기법을 사용한 결과 캔버스 안은 점점 밝아지고 눈부신 하얀 빛이 넘쳐흐르는 세계가 되었습니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색을 극한까지 추구하면 한없이 흰색에 가까워집니다. 반짝이는 빛이 되는 것이지요. 마치 색채의 마법 같은 흥미로운 현상입니다.
 
 
공허가 아닌
 
여러 가지 요소가 비상한 밀도로 들어가 농축된 결과, 하얗게 발광發光하는 색깔인 것입니다. 모든 색이 빛으로 환원된 색인 것이지요. 그러니까 흰색을 비애나 허무의 색이라 여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런 생각에는 근대 특유의 니힐리즘적 가치관이 투영되어 있는 듯합니다.
 
흰색을 ‘비애의 아름다움’이라고 보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데는 제 어머니와의 추억이 크게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좀 마마보이 같아 보이는 에피소드인데, 어릴 적에 새하얀 치마저고리를 입은 어머니가 예뻐 보여서 아주 기뻤던 적이 있습니다. 남자아이들이란 엄마가 예쁘면 좋은 것입니다. 단순히 기쁠 따름입니다. 어쩌면 제가 흰옷을 입은 여성을 좋아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색깔이 극에 달한 색, 기쁨도 슬픔도 넘어선 색, 삶도 죽음도 초월한 색.
 
저는 가끔 세상일을 너무 비관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동시에 낙천적인 부분도 있습니다. 겁쟁이인 주제에 반대로 이상하게 뻔뻔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작용과 반작용처럼 겨우겨우 균형을 잡으며 살아올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제 마음속 어딘가에서도 광대무변이자 뇌락인 흰색이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이것이 제가 가진 감동할 수 있는 힘의 근원이기도 하며 또 받아들이는 힘의 근원이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6화에서 계속)
 
 
  • 작가
  • 강상중
  • 출판
  • 사계절
  • 발매
  • 2016.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