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저항도 있다

여자라는 이유로 부여되는 굴욕을 내면화하지 않아도 되는 가정에서 자라나, 학교를 거치며 평등과 자유에 대한 인식을 키워 가면서 평등한 가정과 자유로운 가족을 만들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했던 한 여성이 있다. 다른 조건 따지지 않고 상대를 만나면 얼마든지 그런 꿈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남자 친구를 만나 그에게 할 수 있는 것을 열심히 했지만 여자에게 돌아오는 유일한 칭찬은 파트너를 잘 만났다는 것이었다. 그 열심은 파트너가 용케 견디는 센 ‘기’가 되어 다시 한 번 파트너를 추어올릴 이유가 되었다. 갈등 속에서 여자의 노동과 기다림과 슬픔은 휘발되어 화만 남았고, 남자의 폭력과 아집은 무지라는 강력한 면죄부로 금세 무마되었다. 만화 『평등은 개뿔』의 아내 이야기다. 그리고 나의 이야기였다.



만화에서는 남편이 아내에게 저지르는 폭력, 타인이 저지른 폭력 가운데 아내를 버려둔 비겁함, 성역할에 기대어 아내에게 기생해 자신의 노동을 의탁하는 치졸함, 그 와중에도 페미니스트라는 호칭으로 인정을 얻고자 하는 시도가 끊임없이 그려진다. 나 역시 차별을 받아들일 수 없게 길러졌기 때문에 오로지 ‘나는 다를 수 있어’라는 희망만으로 관계 맺기를 오랫동안 시도했었다. 끊임없이 노동했고 포기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나가떨어지고 나서야,





 

‘나는 다를 수 있어’라는 말도 다 똑같이 하니까 결혼하지 마




라는 말이 귀에 들어왔다. 그런 말이 당시의 내 주변에 조금 더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일이 일어나기 전에 속단하기를 싫어하고 미리 경험해 보지 않고는 결론 내리고 싶지 않은 성격상 아마 또 다시 뛰어들지 모른다. 게다가 그 결론이 믿고 싶어 하는 바와 정반대의 내용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만화 속의 아내와 내가 만난 적은 없지만 똑같은 마음으로 똑같은 결정을 내리고 똑같은 노력을 이어 가고 있는 것을 보자면 오늘날에도 수많은 여성들이 수많은 모습으로 동일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리라.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이런 서사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방점을 찍고 싶지 않다. 친밀한 관계에서 여성들이 남성에게 들이붓는 공력은 블랙홀 속으로 끊임없이 빨려 들어가고 공력을 쏟아붓는 동안 여성들의 몸과 정신은 서서히 소진되기 때문이다. 남편 아닌 아내의 공로에 조명을 비추는 일마저도 아내의 소진을 부추기는 일이 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마음에서다. 노력하는 모습과 그것을 긍정해서 현상을 강화하는 것보다는 소진이 소진임을 짚는 일이 나의 역할일 것 같다.


 

부부 이야기가 많이 나와 있지만 『평등은 개뿔』의 미덕은 무척이나 솔직하다는 점이다. ‘작가의 말’에 언급된, 아내가 너무 세 보이게 그려졌다는 우려에 동의하는 동시에 내게는 그 모습이 과도한 화가 아닌 과도한 친절과 아량으로 보인다. 여태까지 페미니즘의 이름이 여성에게 부여한 선택은 차별에 순응하지 않고 협상하고 갈등을 일으켜 평등한 가정을 만들어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게 이 만화가 가진 강점은 갈등을 해결해 가는 과정이 아닌 갈등 자체를 대하는 솔직함에 있다.

여성은 이미 너무 많이 희망한다. 내가 그러했듯이, 만화 속 아내가 그러했듯이 달라지리라는 희망은 여성이 무척이나 능동적으로 품는 것이되 사실상의 유일한 선택일 수밖에 없다. 아내가 가장 친밀한 상대에게서 존재를 부정당할 때, 제 몫 아닌 노동에서 성별을 강요당할 때, 명백한 팀플레이에서 혼자 빠져나가는 파트너의 뒷모습에 치미는 분노를 토할 수도 없고 삼킬 수도 없어 얼어붙을 때, 굴욕과 수모와 부당함을 혼자 감내하는 순간들이 가슴에 박혔다. 이제까지는 그 갈등이 봉합되는 순간에 다다라 ‘이런 가정도 있다’는 데 희망을 품었다면, 이제는 그 순간들이 다른 저항과 선택을 가능케 하는 균열을 내 줄 것을 기대해 본다.

-이민경(페미니스트,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