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사계절문학상 대상 수상작 [소년아, 나를 꺼내 줘] 작품 해설(문학평론가 김지은)

"동화에서 잠들어 있는 정적인 아름다움은 언제나 공주의 몫이고 잠든 공주의 사랑을 깨우는 것은 왕자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소년을 깨우고자 다가가는 것은 소녀다."

 

새끼 거북이가 모래 더미를 뚫고 나오듯
김지은|문학평론가


“왜 소설을 읽어요?”라는 질문과 “언제 소설을 읽어요?”라는 질문이 있다고 할 때 더 관심이 가는 건 두 번째 물음이다. 소설은 내가 모르는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며 사실도 아니다. 처음부터 허구의 모래밭에 지어진 이야기를 읽는 일에 무슨 실질적인 소득이 있겠으며, 거기 굉장한 까닭이 담겨 있을 리도 없다. 소설을 읽는 일에는 이유를 뛰어넘는 어떤 두툼한 미적 체험이 있다. 우리는 삶이 너무 평평하고 그저 그런 것의 반복이며 아무런 아름다움도 발생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날에 소설을 집어 든다. 한 권의 새로운 소설을 펼쳐 들 때만 해도 우리는 그 밀집된 낱말들 속에 공간이 있고, 그 책 속 인물이 우리와 마주 보면서 걸어오고 있다는 것을 정확히 실감하지 못한다. 그러나 책장을 넘기면서 조금씩 알게 된다. 어느새 그 이야기 안에 사는 생소한 인물이 지금 나와 무릎을 맞댄 채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 주고 있음을 깨닫고 조심스럽게 그 호흡의 결을 존중하게 된다.
더불어 좋은 소설은 나를 알아본다. 나 자신도 몰랐던 내 모습을 꺼내 준다. 소설 속 인물과 독자는 그 제한된 독해의 순간에만 일어나는 감정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책 밖에서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각별한 연애의 경험을 나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문학을 읽는 일은 독자와 인물 뒤에 서 있는 작가가 서로 사랑하는 과정이다. 인물은 작가의 간절한 마음을 이야기 안에서 대행하며 결국 그 뒤에는 작가가 있다.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는 종종 엷은 탄식을 내뱉는다. 인물이 처한 상황과 그때 그 인물의 마음을 너무 잘 이해할 것 같을 때 그 숨이 터져 나온다. 우리 귀에는 들리지 않지만 아마 책 속 인물을 내놓은 작가도 독자와 같은 마음으로 짧은 한숨을 쉬며 호소하고 있을 것이다. 당신이 나를 읽음으로써 이 이야기의 새로운 의미를 꺼내 달라고.

『소년아, 나를 꺼내 줘』는 바로 그런 연애처럼 각별한 소설이다. 책 속에 생각지도 못한 깊은 공간이 숨어 있어서 안으로 한참 손을 넣은 뒤 끝까지 만져 보고 싶어지는 이야기다. 꿈도 없고 특별히 하고 싶은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걱정도 없는 고등학생 ‘신시지’는 ‘생각지도 못한 풍경’을 만난 것처럼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얼’이라는, 공명이 큰 외자 이름을 가진 시지의 첫사랑은 시지의 마음에 선명한 기억을 저장시켜 놓고 연락을 멈춘다. 얼의 마음을 확인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시지의 사랑은 훌쩍 깊어 간다. 순식간에 깊어진 사랑이라고 해서 저돌적인 것은 아니다. 이 소설은 여러 겹의 얇은 커튼이 시지의 진심을 감추고 있어서 열흘 하고도 51일이라는 시간을 두고 한 장씩 걷어 내어야 비로소 그 실체에 가닿을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거대한 사건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이야기 깊숙이 손을 넣은 사람은, 그런 사건 없이도 한 사람의 감정이 그려 내는 윤곽이 이처럼 생생하게 손에 잡힐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어떤 독자는 책을 덮으면서 『소년아, 나를 꺼내 줘』가 사랑 이야기일 줄 알았지만 결코 그것만은 아니었다는 소감을 전하게 될 것이다.

작가는 이 모든 과정의 조용한 설계자다. 그러나 작가가 설계한 이 일렬의 회로는 독자가 신시지의 자리에 들어서야만 불이 들어오는 1인칭 함수다. 처음 열흘까지는 순차적으로 날짜를 센다. 그리고 더 이상 메아리 없이 견딜 수 없는 아픔의 날들을 기록할 때는 ‘열흘+x’의 방식으로 흐르는 시간의 속도를 붙잡는다. ‘열흘+3’, ‘열흘+5’, ‘열흘+51’은 차곡차곡 쌓이는 주인공의 감정을 상징한다. 모두 스물한 개의 독립된 장 가운데 스무 장의 제목은 오직 날짜를 세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숫자들은 잠들지 못하는 밤에 양을 헤아리는 것과 비슷하지만, 얼을 향한 시지의 마음이 훌쩍 달려갔다가 주춤거리듯 불규칙적이다. 작가는 유일하게 숫자가 아닌 제목의 첫 장 ‘그런 하루’를 통해 독자에게 이 작품은 근사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는 선량한 양해를 구하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사랑이었다가 우정이었다가 마침내 자기 자신에 관한 탐구가 되는 61일 동안의 기록을 입 안에서 작은 사탕을 녹이는 것처럼, 주인공의 말을 빌리자면 ‘지구처럼 성실하게’ 들려준다.

신시지의 눈에 비친 이 세계는 돌고 돌아가는 ‘범생이 스타일’이며 그 안의 ‘나’는 ‘아무 데도 가지 않는 것 같지만 광대한 공간을’ 지나는 중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게 재미없는 신시지의 눈앞에 불쑥 나타난 건 어렸을 때 자신에게 ‘소시지’라는 별명을 만들어 준 엄마 친구의 아들 이얼이다. 이얼에 대해 신시지가 아는 것이라고는 아주 오래전 엄마들과 함께 동네 놀이터에서 몇 시간 만났던 불분명한 기억이 전부다. 그사이 훌쩍 자라 어린애티를 완전히 벗은 열여덟 살의 얼은 어른처럼 낯설었고, 힘주어 밀지 않아도 저절로 문이 열리듯 신시지의 벽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얼이 웃으면 웃음이 시지의 마음에 ‘깊고 둥글게’ 퍼졌다. 그 우연한 여름날 오후 동안 시지는 얼과 대학로의 커피숍, 낙산의 언덕, 동숭동 공원을 걸으면서 마로니에 열매의 독과 새끼 바다거북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1년 남짓한 실종의 기간과 그의 임시 치아인 ‘카벙클’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얼은 시지의 번호를 저장하고, 다음에 만나면 서촌에 놀러가자고 한다. 둘은 헤어진다. 걱정거리가 없는 것이 유일한 걱정이었던 시지의 일상은 이 만남을 기점으로 미묘한 걱정으로 채워지기 시작한다.

『소년아, 나를 꺼내 줘』는 몇 번이고 첫 장으로 돌아와 읽게 만드는 작품이다. 시지가 홀로 얼에 대한 감정을 진전시킬 때마다 ‘잠깐만, 그 하루를 다시 읽어 봐야겠어.’라는 생각으로 독자도 시지와 얼이 만난 장면을 펼쳐서 둘의 촉촉한 말을 복기한다. 첫 장에는 얼과 시지가 놓여 있는 ‘청소년’이라는 시기를 상징하는 장치가 인상적으로 배열되어 있다. 시지네 집 방충망에 달라붙은 매미는 무덥고 지루하기만 했던 시지의 삶에 찾아온 쨍한 신호다. 시지는 자동차 안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자신이 늦여름 아파트 창문에 바짝 매달린 매미 같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날 오후 얼을 만나면서부터 시지는 자각하지 못했던 중력을 되찾고 얼이 들려주는 새끼 바다거북 이야기와 함께 깊은 해저로 헤엄쳐 내려간다. 카벙클 일화는 얼과 시지가 성인이 되기 위해 앞으로 겪어야 하는 과정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알 속에서 깨어난 새끼 거북이는 카벙클로 두꺼운 알 껍질을 깨뜨리면서 입 안이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분투한다. 그러고도 30센티미터 두께의 딱딱한 모래 더미를 뚫어야 한다. 그 모래 더미를 빈틈없이 다져 놓은 것은 다름 아닌 새끼 거북이들의 부모다. 부모들은 왜 그랬을까. 역설적으로 좀 전까지 알이었던 새끼 거북이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우리들의 부모가 그러한 것과 놀랄 만큼 닮았다. 그리고 그건 새끼 거북이가 죽을힘을 다해서 빠져나오듯이 얼과 시지도 각오하고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다.
시지는 자신이 실종의 기간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모래 더미로부터 천천히 나오기 시작한다. 얼에게 자신을 비춤으로써 자기 얼굴을 처음으로 말갛게 바라본다. “내가 조금 더 좋은 사람이었다면 좋았을 걸 그랬어.”(52쪽), “지금부터라도 좋은 사람이 되어 볼게.”(52쪽) 하고 생각한다. 이 흔한 첫사랑을 앓는 시지 곁에는 오랜 친구 윤아가 있다. 윤아는 이 작품에서 시지의 망설임, 시지의 착각, 시지의 흔들림을 온전히 이해하고, 메아리를 받아 주는 숲처럼 시지의 독백을 듣는 포용의 우정을 보여 준다. 주변 인물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이 작품에서 윤아는 마지막까지 침착한 존재감을 빛내는 매력적인 친구다.

새끼 거북이들이 카벙클로 세상에 대한 첫 감각을 경험한다면 시지에게는 발이 첫사랑을 감각하는 중요한 기관이다. 시지는 “사랑을 하면 발꿈치가 투명해진대.”(53쪽)라고 혼잣말을 하고 얼을 만나지 못하고 견디는 동안 “막막한 슬픔이 발목까지 찰랑찰랑”(84쪽)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사랑을 그리워하던 시지는 투명해진 몸으로 얼의 집을 찾아가 잠든 얼을 들여다보고 얼을 깨우는 꿈을 꾼다. 시지의 투명한 몸이 다가가자 얼이 눈을 뜨는 장면은 매우 서정적이면서 전복적이다. 동화에서 잠들어 있는 정적인 아름다움은 언제나 공주의 몫이고 잠든 공주의 사랑을 깨우는 것은 언제나 왕자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소년을 깨우고자 다가가는 것은 소녀다.

시지가 열흘 하고도 스무 날을 넘기는 지점에 이르면 독자는 이 작품이 사랑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얼과 시지는 왜 소설의 중반부가 넘어서까지도 사랑을 시작하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는 안다. 첫사랑은 대부분 상상 속에서만 달력을 갖는다. 시지의 독백은 대부분 ‘내가 얼을 좋아한다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관한 것이다. 그 질문을 따라가는 사이에 독자는 어느덧 얼을 향한 사랑의 이야기에서 시지 자신, 자아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이야기로 건너간다.

얼을 기다리는 이야기가 얼을 만나는 이야기로 마무리되었다면 이 작품은 평이한 사랑 이야기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사랑을 확인하고자 하는 외침도 없고 질투를 불러일으키는 연적도 없다. 짝사랑은 그 사랑을 하는 사람을 제외하고 세계에 아무 일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을, 김진나 작가는 냉정할 정도로 끝까지 보여 준다. 사랑의 자격은 자신의 내면과 끊임없이 충돌하여 존재의 윤곽을 알게 된 자에게만 주어진다. 시지는 이 작품을 통하여 자신과 세계의 경계를 발견했고, 사랑을 한 사람은 아니지만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윤아와 시지는 이 시절을 “이상한 열여덟”(170쪽)이라고 말한다. 서로 첫사랑의 경험을 토로하면서 “두꺼비가 심장을 먹은”(170쪽) 사건과 같다고 말한다. 둘의 대화는 사랑스럽다. 이 소설이 사랑의 이야기면서 우정의 이야기라고 보는 것도 바로 이런 대목 때문이다. 재채기할 때마다 가슴속 두꺼비가 튀어나올까 봐 두려워하던 두 소녀는 비로소 사랑하는 사람이 생각나지 않는 순간에 다다른다. 시지는 자신의 마음이 얼에게 닿지 않았다는, 독자는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을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받아들인다.

『소년아, 나를 꺼내 줘』라는 제목과 달리 자기 자신을 모래 더미 밖으로 꺼낸 것은 시지이다. 이 작품의 제목은 역설을 통해 읽어야만 의미가 더 정확히 보인다. 얼 또한 모래 더미를 뚫고 나오기 위해 나름대로 실종의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을 것이다. 그 실종의 시간이 어땠을지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이 작품이 이루어 낸 미덕이다. 우리는 그동안 완전한 사랑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어지러운 관계를 설명하는 작품들만 만나 왔다. 그러나 ‘내가 나와 맺는 관계야말로 사랑의 본질’이라는 것은 특히 사춘기의 첫사랑에 관한 매우 현명한 통찰이다. 김진나 작가는 모든 것을 차단하고 시지의 감정에 집중함으로써 그 일을 해냈다. “얼이 나에게 연락하지 않아도 얼은 그날 내가 만난 사랑스러운 아이였다.”(184쪽)는 시지의 말은 왜 우리가 첫사랑을 통해서 성장하는가를 가장 잘 보여 주는 문장이다. 나는 나를 얻기 위해서 사랑을 한다. 특히 사춘기의 사랑은 그렇다. 우리는 흔한 남녀 간 사랑의 모델에 의지하지 않는 소녀의 사랑을 기다려 왔고 이 작품에서 가능성을 보았다. 시지의 사랑이 새끼 거북이의 바다 탐험처럼 더 깊은 해저를 향해서 계속 순항하기를 바란다. 열렬한 응원의 마음으로 시지의 시작을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