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노 유목제국사』 저자 정재훈 교수 인터뷰




1. 교수님은 국내의 대표적 중앙아시아사 연구자로 손꼽히는 분입니다. 어쩌다 이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셨는지, 그동안 어떤 연구를 해오셨는지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동양사학과를 나왔는데요, 수업 대부분이 중국사 위주였고 일본사가 일부 있는 정도였습니다. 연구 경향도 주로 외국의 연구를 수용하는 식이었고 중국 중심의 설명이 주류였지요. 한국인의 입장에서 좀 더 객관적으로 접근할 수 없을까 하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 무렵, 그러니까 1986년 2학기에 학과에 새로 부임하신 김호동 선생님의 ‘중앙아시아사’ 수업을 들으며 장성長城 너머 유목민의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관심이 이어져 1987년 학부 졸업 논문에서 후한 말 중국 내지로 들어온 남흉노의 후예(병주 흉노 또는 오부 흉노)를 다루었습니다. 중국사가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는 데 유목민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오호십육국시대에 접근해본 것이었죠.

대학원에 진학해 처음에는 몽골 제국사를 공부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어학 공부나 자료 확보에 어려움이 많아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요.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뒤로는 전공을 고대사로 바꿔 돌궐 유목제국 시기에 자신의 묘비를 남긴 킹메이커 톤유쿠크에 대한 논문을 작성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고대 투르크 비문을 한문 사료와 연결하는 연구를 시작할 수 있었고요. 1999년에 위구르 관련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2002년부터 경상국립대에서 일하면서 중국 수당시대의 북방 대책에 대한 유목민의 대응을 정리하고, 돌궐과 위구르 자체에 관한 연구도 계속했습니다. 유목사와 중국사의 전개를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과정이었죠. 그 결과물로 박사 논문을 정리해 2005년에 『위구르 유목제국사 744~840』을 출간했고, 2016년에는 『돌궐 유목제국사 552~745』를 출간했습니다.

2015년에 (사)중앙아시아학회 회장을 맡았습니다. 때마침 실크로드를 비롯한 유라시아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현실 문제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중국 정부의 민족사 왜곡 문제 등을 집중적으로 다루었지요. 이전부터 관심이 있었던 디지털 콘텐츠 제작도 함께 했고요.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2016~2019년 ‘실크로드 문화지도 DB 제작’(www.silkroadatlas.net) 사업을 주도해 중앙아시아 역사 지도 제작을 위한 사료 DB와 지도 등을 만들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실크로드 관련 오픈 플랫폼이 만들어졌고요. 이후 2020년 팬데믹 상황에서 현지 조사가 불가능해지면서 중국 정사 역주 작업과 고고학 발굴 성과를 바탕으로 『흉노 유목제국사 기원전 209~216』을 저술해 출간했습니다.
 
 
2. 2005년 『위구르 유목제국사』, 2016년 『돌궐 유목제국사』에 이어 이번에 『흉노 유목제국사』를 출간하셨습니다. 이로써 고대 유목제국사 3부작을 완성하셨는데요, 20년 가까이 이 작업을 이어온 이유가 궁금합니다.
 

대학원에 진학해 고대사로 전공을 바꾼 다음 중앙아시아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인 ‘투르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목과 투르크를 연결해 공부했지요. 이렇게 해서 투르크, 즉 돌궐의 역사에 접근하게 되었습니다. 돌궐은 유목민 최초로 자신의 문자인 고대 투르크 문자(오르콘 룬 문자)를 만들어 그들의 생각을 보여주는 자료를 남겼습니다. 현재 몽골 초원에 8세기에 만들어진 비문이 남아 있어요. 이를 해독하여 한문 자료와 연결하면서 돌궐의 역사상을 새롭게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박사 논문 주제를 정하는 과정에서 지도교수인 김호동 선생님이 위구르 역사를 정리해보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하셨습니다. 그전까지는 학술적인 접근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거든요. 이후 튀르키예 이스탄불대학교에 가서 연구를 진행해 박사 논문을 작성했습니다. 때마침 사계절출판사에서 중앙아시아사 서적들을 출간하기 시작했는데요, 김호동, 유원수 선생님과 함께 르네 그루쎄의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번역에 참여했습니다. 이 작업을 계기로 위구르뿐만 아니라 돌궐, 그리고 그 이전 시기 유목사의 전개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죠. 이 책은 1998년에 출간되었는데 최근에 19쇄가 나왔을 만큼 국내에서 유목사 이해의 저변을 넓히는 데 큰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작업들을 이어오면서 고대 유목제국들의 역사가 연결성을 갖는다는 것, 초원이라는 세계가 하나의 역사 단위라는 점을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초원을 무대로 한 유목사의 정통성이 흉노에서 이후의 유목제국들로 이어진다는 가정하에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할 필요를 느꼈지요. 이를 위해 우선 건국 신화를 분석해 체계화하는 작업을 했고, 같은 맥락에서 최초로 유라시아 초원을 통합한 돌궐 유목제국사를 정리했습니다. 이후 중국 정사의 흉노 관련 열전 역주, 부경대학교 주도의 흉노 연구 사업에 참여하기도 했는데요, 학계 동료들이 그 경험을 바탕으로 흉노사도 저술하면 좋겠다고 권유하여 이번에 『흉노 유목제국사』를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몽골 초원을 중심으로 한 북아시아가 흉노 이래 정통성 계승 의식이 존재하는 역사 단위였다는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위구르, 돌궐, 흉노 이 3부작을 통해 고대 유목제국사가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정리했다는 것에 보람을 느낍니다.


 
3. 신간 『흉노 유목제국사』는 문헌 연구자로서 『사기』, 『한서』, 『후한서』 등의 한문 사료를 새롭게 해석하여 고고학 발굴 자료와의 간극을 설명하는 데 초점을 둔 책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흉노에 관한 기록은 한문 자료뿐입니다. 그 대부분이 중국 정사 기록에 한정될 만큼 양이 많지도 않고요. 과거에는 한문 사료의 역주와 정리 작업이 활발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반면에 몽골공화국에서 대대적인 고고학 발굴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최근의 흉노사 연구는 거의 고고학이 주도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발굴 자료들이 흉노사 연구를 크게 발전시킨 것은 사실이나, 역사 기록과 발굴 자료를 연결시키지 못하는 것이 큰 문제가 되었죠.

발굴 작업이 활발한 몽골공화국, 즉 막북(고비 사막 이북)에는 거대한 고분을 비롯해 많은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400여 년에 걸친 흉노사 가운데 140년 정도의 시기에만 한정되고, 건국 이후부터 한 무제의 공격으로 막북으로 밀려나는 기원전 119년까지의 상황은 이 자료들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이런 한계가 있는데도 여러 개설서나 고고학 논문에서 마치 흉노의 중심지가 줄곧 막북에 있었던 것처럼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는 흉노 연구가 몽골공화국 위주로 이루어진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문헌 연구자로서 발굴 성과를 참조하면서도 사마천이 ‘현재사現在史’로서 저술한 기록을 바탕으로, 또한 초원의 생태 환경에 기초해 흉노사를 재해석하려고 했습니다. 몽골공화국 중심이 아니라, 중국 북변의 장성 주변과 막남, 막북을 무대로 전개된 흉노사의 다면적인 성격을 논증하고자 했습니다. 장성 주변에서 목축 위주의 생산 활동을 하던 ‘목농복합구역’을 흉노사의 무대로 설정하고, 이를 초원과 연결해 서술한 것이 기존의 이해와 가장 다른 점입니다. 또한 흉노는 유목민과 목축민, 중원에서 이탈한 사람, 오아시스 주민 등 다양한 세력이 결합한 거대 제국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했고요. 이는 고대 유목제국사 가운데서도 흉노사만의 특징적인 면모입니다.
 
 
4. 한국의 역사 독자들은 아마 중국사의 진한 시대를 통해 흉노의 역사를 접한 경우가 많을 텐데요, 그런 분들이 이 책에서 새롭게 발견할 점이 있을까요?
 
진한시대와 흉노는 그 역사적 전개가 완전히 맞물려 있습니다. 따라서 흉노사를 중국사의 전개 과정에 맞춰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흉노의 관점에서 중국사의 전개를 바라보고, 양자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다시 정리해보려 했습니다. 장성 이남의 중국은 문명, 이북의 유목민은 야만이라는 이분법적인 이해를 극복하고, 전국시대 이래 탄력적인 모습을 보였던 장성을 중심으로 중국과 흉노가 서로 계속해서 넘나들고 섞이고 변동하면서 존재했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진시황제가 오르도스 지역을 차지하고 신진중을 개척한 다음 직도를 건설해 이를 장성과 연결하면서 그 바깥으로 밀려난 흉노가 이후에 세력화한 상황도 기존과 다르게 설명했지요. 장성 주변에 있던 목축민 융戎과 유목민 호胡의 결합이 일어났다는 점, 전국시대의 종언과 함께 반진反秦 세력이 흉노를 중심으로 진에 대응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진의 통일과 함께 중국이 하나가 되었으며, 마치 그것이 완전체였던 것처럼 설명하던 기존의 관점과 다른 접근입니다. 또한 진의 북방 진출 역시 이른바 ‘전국 팔웅’의 하나로 인식되기 시작한 흉노를 비롯한 유목 세력에 대한 대응 또는 통합 시도로 보았고요.

한나라 초기에 흉노가 발전하면서 양자 간에 화친과 혼인 관계가 성사되었음에도 흉노가 계속해서 약탈전을 전개한 이유도 다르게 설명했습니다. 흉노가 장성 너머 중국 내지를 공격하고 약탈한 것을 원래 장성 주변 목농복합구역(잡거지)에 살던 융이 흉노와 결합해 한으로부터 원주지를 회복하려는 움직임으로 보았지요. 그 연장선상에서 한 역시 이런 융의 욕구를 수용해 이들을 기미羈縻함으로써 흉노에 반격할 기회를 마련하기도 했음을 지적했습니다. 융은 흉노와 한 양쪽 모두에게 중요한 존재였는데, 지금까지는 이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습니다. 중국사에서 융을 발견하고 이들의 존재에 주목한 것이 제가 가장 주안점을 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장성 주변 융의 움직임을 인식하면서 흉노와 한의 대결 구도를 다르게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장성 주변과 막남 초원을 중심으로 초기 흉노사를 정리하는 것은 기존의 막북 중심 이해와 다른 점입니다.

기원전 50년대 흉노의 1차 분열과 호한야 대선우의 남하, 이후 48년 2차 분열과 막남 초원으로의 귀환 움직임의 배경도 이러한 맥락에서 설명했습니다. 막남 초원, 이후 더 남쪽의 장성 이남으로까지 내려온 남흉노가 한의 기미 지배를 받은 것은 세력의 약화로만 보이지만, ‘자발적 투항’을 통해 과거의 원주지를 회복하려는 의지이기도 했습니다. 기존에는 흉노의 활동 무대를 장성 밖에 설정해서 그 남하 이유를 제대로 말할 수 없었거든요. 흉노의 입장에서는 원주지로 돌아오는 것이었고, 한의 입장에서는 군사적 장점이 있는 목축민을 수용해 이들을 통해 다른 세력을 막으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죠. 기존의 중국사 중심의 관점에서는 초원의 유목민이 내지에 들어와 농경에 종사하면서 한의 문화에 동화되었다는 식으로 설명했는데, 저는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접근한 것입니다.
 

5. ‘유목민의 역사’라고 하면 보통 문명을 파괴하는 야만, 잔인한 정복자라는 이미지가 강한데요, 유목 국가의 고유한 특성이나 세계사 전개에서 지니는 의미를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유목민의 역사는 정주 농경 지역, 이른바 문명 세계에서 야만으로 여겨지며 멸시당하거나 무시되어왔습니다. 이런 입장에 따른 역사 설명을 ‘문명 사관’이라고 하는데요, 유목 세력의 공격을 당한 정주 세계에서만 주로 기록을 남겼기 때문에 이런 이해가 많았습니다. 유목민 스스로 남긴 기록이 많지 않아 ‘바람의 역사’라는 말이 있기도 한데요, 유목민이 세계사에 끼친 영향과 의미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유목 세계는 정주 농경 세계와 함께 세계사를 이끌어간, 두 개의 수레바퀴 중 하나라고 할 만큼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초원의 유목민은 ‘기마궁사’의 특기를 최대한 발휘해 유목 권력을 형성했으며, 국가를 건설하고 운영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중국 출신이나 오아시스 주민 등의 정주민을 끌어들였습니다. 이후에 이는 이른바 교역국가를 지향하는 ‘권위주의적 상인관료체제’라는 형식의 국가를 만드는 것으로 이어지기도 했고요. 정주 지역과의 ‘공생’을 바탕으로 국가 체제를 고도화해나간 것이죠. 유목 국가는 전쟁, 화친, 호시 등의 방법으로 중국으로부터 물자를 획득하고, 스스로 확보한 초원의 교통로를 이용해 이 물자를 유통함으로써 이익을 극대화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유라시아 세계가 연결되고 발전할 수 있었지요. 다만 흉노는 중국에서 많은 물자를 얻어내지 못했고 동서 교통로의 확보에도 어려움을 겪어 중국에 의존하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이 점이 이후에 등장한 유목제국과 비교했을 때 흉노가 보인 한계였지요.
 
 
6. 과거 유라시아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거대한 제국을 세우고 수많은 교통로를 개척했던 유목 국가들은 오늘날의 국제 사회에서는 존재감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유목 세력이 급속히 몰락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흉노를 시작으로 초원만이 아니라 해양으로도 세력을 확장한 몽골 제국까지 유목민들은 유라시아 대륙의 역사 전개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몽골 제국이 붕괴된 이후 유라시아 대륙의 정주 농경 지역을 차지한 세력들이 오스만, 무굴, 청, 러시아 등 내륙을 차지하려는 지향을 보이며 충돌하는 과정에서 과거 강력했던 유목 세력들은 해체되거나 정주 세계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유목민의 군사적 바탕이었던 기마궁사는 화포를 이용한 공격 앞에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게 되었고요. 유목민들은 내륙으로 진출한 여러 거대 세력에게 분할 지배당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해상 교통이 발달하면서 내륙 중심의 교통로가 상대적으로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유목민의 주무대였던 초원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 것이죠. 최근 시베리아 횡단 철도 등을 통한 내륙의 연결에 관심이 집중되기도 했으나, 이 역시 과거 유목민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고 볼 수 있지요.
 
 
7. 끝으로 한국 독자들이 중앙아시아사 혹은 유목제국의 역사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 연장선상에서 교수님은 이후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제가 유목민의 역사에 관심을 가진 것은 그 자체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기도 하지만, 중국사를 이해하기 위한 거울로서 장성 너머의 세계를 제대로 이해해보자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오랜 시간 관련 연구를 진행하면서 유목과 초원에 대한 이해를 심화할 수 있었고, 이 과정에서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세계사의 비어 있는 여러 구석을 채울 수 있었습니다. 유라시아라는 커다란 퍼즐의 빈 부분을 채우고, 흐릿했던 부분을 선명하게 구체화할 수 있었고요. 독자 여러분도 유목제국사를 깊이 이해하면서 그와 맞물려 있는 중국사를 다시 보고, 또 유라시아 대륙과 연동되어 있는 세계사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신다면 좋겠습니다.



이후 계획을 물으셨는데요, 출간된 지 20년이 넘은 위구르 유목제국사를 재정리하고 보완해서 내년쯤 출간하려고 합니다. 이어서 유목제국사에 대한 이해를 더욱 확장해 오호십육국 시대를 기존과 다른 관점으로 접근해보려 합니다. 장성이 무너진 이후 북중국과 초원을 중심으로 여러 나라가 명멸했던 복잡한 상황을 체계적으로 이해해보려는 시도입니다. 기존에는 중국사의 전개 과정에서 이 시기를 ‘분열기’로 부정적으로 보거나 호胡와 한漢의 융합이 이루어지는 과도기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와 달리 저는 오호십육국시대부터 남북조시대까지의 사적 전개 과정을 중국사에 한정하지 않고 초원의 역사 전개와 연결해보려고 합니다. 흉노 붕괴 이후 돌궐이 등장하는 6세기 중반까지 중국과 초원의 역사가 맞물려 있는 새로운 환경에서 다양한 족속이 다양한 성격의 국가를 건설했음을 정리하는 작업이죠. 중국사를 기존과 다르게 서술하는 시도이기도 하고요. 이 작업이 잘 마무리된다면, 독자 여러분께 초원과 중국이 하나로 연결된 넓은 범위에서 다원적인 세계가 어떻게 공존하고 발전해왔는지를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흉노 유목제국사』 도서 보기
▶ 『돌궐 유목제국사』 도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