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 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서현이 글을 쓰고 그림까지 곁들인 그림책 『커졌다!』는 아주 평범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나는 작아요.’ 물론 키가 작다는 뜻인데,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나도 모르게 명치끝이 콕 찌르듯 아파왔다. ‘나는 작아요.’라는 문장 속에 아들 녀석의 우중충한 목소리가 겹쳐졌기 때문이다.

아들 녀석은 키가 작은 편이다. 그렇지만 나보다는 분명히 크다. 아들 녀석은 사춘기 때부터 키가 작다는 한탄을 입술 끝에 주야장천 매달고 살았다. 게다가 다음과 같은 언사를 덧붙여서 사태를 더욱 절망적으로 떡칠하곤 했다.
  “열심히 공부하면 성적은 얼마든지 올릴 수 있지만, 키 작은 건 아무리 노력해도 극복되지 않는다.”
이 정도에서 그쳤으면 그냥저냥 참고 넘어가겠는데, 제 에미에게 이렇게 따져 물어서, 기어코 내 가슴을 후벼 파는 것이었으니, 어찌 내 마음이 편하기만 했겠는가.
“왜 아빠 같이 키 작은 남자랑 결혼했어? 남자가 그렇게도 없었어?”
즉 애비의 DNA에 심각한 하자가 있다는 걸 지적한 것인데, 나는 정말 억울하다. 치사한 녀석. 아내는 나보다 훨씬 키가 작다. 그런데도 단 한 번 내게 이렇게 따져 물은 적이 없다.
“왜 엄마 같이 키 작은 여자랑 결혼했어요?” 
 
 
서현의 그림책 『커졌다!』를 보면,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주인공의 키가 실제로 커진다. 하지만 문학적 텍스트 속에서는 결코 키가 커진 게 아니다. 그 대신 상상의 힘이 커졌다. 상상력의 증폭, 이것이 이 그림책의 핵심 요소이다. 작가가 보여주고자 한 것도 이것이다. 상상의 힘이야말로 어린이문학이 갖추어야 할 가장 미더운 요소가 아니던가. 그러니까 이 그림책은 지극히 문학적이다.
키가 작은 건 현실적인 문제다. 현실적인 문제라고 해서 현실적인 관점으로 풀어내면 현실 속에 매몰될 위험성이 있을 뿐 아니라, 필연적으로 교훈적 메시지를 혹처럼 달게 될 가능성도 높다. 그러나 이 그림책의 서사는 다르다. 현실적인 문제를, 상상력의 거울에 굴절시켜, 문학으로 한 단계 끌어올렸다. 그리하여 문학이 현실을 극복했을 뿐 아니라, 현실의 문제를 멋지게 해결했다. 이건 결코 교훈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질적인 변화를 통해 근사하게 문학적 성취를 획득했다.
 
 
책 속에서 키 작은 아이는 키를 크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한다. 우유를 닥치는 대로 마시기, 손과 발을 사정없이 잡아당겨 늘이기, 발목에 돌멩이를 매단 채 철봉에 매달리기,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몸뚱이 늘어뜨리기 따위이다. 하지만 그런다고 키가 팍팍 커질 리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그 돌파구가 바로 책에서 나무가 자라는 것을 보고 스스로 상상의 나무가 되는 것인데, 이 부분이 현실에서 상상의 세계로 넘어가는 통로이다. 키 작은 아이는 나무가 되어 비를 맞고 키가 자란다. 하늘 위로 구름을 뚫고 쑥쑥 자란다. 구름 위에서 예수와 부처가 배드민턴을 치는 장면은 상상력의 압권이다. 이때부터 즐거운 상상의 세계가 화들짝 펼쳐진다. 키 작은 아이는 한없이 커져서 우주 속으로 쭉쭉 뻗어나간다. 즉 끝없는 상상의 세계를 마음껏 경험하는 것이다.
키가 커진 아이는 키가 다시 작아져서 현실로 돌아온다. 키가 다시 작아지는 건 그다지 중요한 장치는 아니다. 키가 작아져야 그림책이 끝날 테니까. 그런데 마지막 문장이 참으로 인간적이다. ‘배고파요.’
그리고 아이는 돌아온 현실에서 키가 한 뼘 자란다. 이 아이의 키가 한 뼘 자란 건 두말 할 나위도 없이 상상의 힘 때문이었다.
 
아들 녀석 책상 위에 이 그림책 『커졌다!』를 휙 던져놓아야겠다. 이 그림책을 읽어보고도 아들 녀석이 툴툴거리면 이렇게 한 방 먹여줘야겠다.
“키가 작은 건 용서받을 수 있어도 꿈이 작은 건 용서받을 수 없다. 그리고 키를 키우는 건 너의 상상력이다.”
 
  
 
글_송언 (동화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