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_자신만만 생활책] 잘 먹고, 잘 입고, 안전하게 잘 자라기


 
꽤 오래전 1학년 아이들을 가르칠 때다. 학기도 다 끝나 가고 뭐 재미있는 게 없을까 했는데 아이들이 고학년처럼 음식을 만들어 먹자고 했다. 요리는 재미있지만 가스불과 칼을 써야 하기에 1학년을 데리고 요리를 할 엄두가 안 났다. 그렇다고 어른들이 다 준비해서 아이들은 시
늉만 하는 요리 활동은 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이 원하니 아주 간단한 요리라도 해 볼까 궁리하다가 어묵을 끓이고 달걀과 감자를 삶아 먹기로 했다. 어묵을 꽂고 감자를 깎고, 달걀도 한 개씩 물에 넣어 보는 정도는 직접 할 수 있겠다 싶었다. 부모님들께 말씀드리고 집에 있는 감자칼을 보내 달라고 전했다. 생각지도 못한 문자를 꽤 여러 통 받았다. 대부분은 “위험하지 않을까요?”였고, 그다음은 “아이들이 하기 힘들 테니 필요한 만큼 깎아서 보내 드릴까요?”였다.
다음 날 부모님들의 걱정을 신경 쓰며 평소보다 훨씬 차분하게 어묵 꽂기를 시범 보이고 육수에 넣게 했다. 그리고 몇 번이나 감자칼 사용에 대해 주의를 주고 큰 대야에 둘러앉아 감자를 함께 깎았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부모들의 걱정이 민망할 정도로 아무런 어려움 없이 감자를 잘 깎았다. 너무 잘 깎아서 주먹만 했던 감자가 메추리알만 해졌다. 이제 달걀을 삶을 차례였다. 작은 것이라도 직접 해 보면 좋겠다 싶어 물을 담은 냄비에 달걀을 넣어 보라 했다.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싶어서 별 신경도 안 썼는데 아뿔싸!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한 아이가 냄비 옆에 서서 팔을 높이 올려 한참 위에서 달걀을 떨어뜨렸고 당연히 달걀은 파삭 깨졌다. 그 아이는 일부러 장난을 친 것이 아니었다. 생전 처음 달걀을 삶아보는 데다가 엄마가 음식을 하는 데는 위험하니 절대 가까이 오지 말래서 본적도 없다고 했다. 그래서 안전(!)하게 냄비 저 멀리서 달걀을 그야말로 던져 넣었던 것이다. 너무 쉬운 음식들이라 시시할까 봐 걱정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요즘 아이들은 할 줄 아는 게 없다.” 달걀 하나도 제대로 냄비에 넣을 줄을 모르니 맞는 말 같다. 하지만 아이들은 억울하다. 스스로 하라면서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위험하다, 정신없다면서 어깨 너머로 볼 기회도 주지 않는다. 게다가 바쁜 부모들은 아이들이 스스로 먹고, 입고, 씻을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는다. 그러니 공부는 엄청 많이 하는데도 정작 생활에서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아이는 점점 보기 힘들다.

 



이번에 사계절출판사에서 ‘자립’을 돕는 책이 나왔다. 자신만만 생활책 시리즈로 『몸, 잘 자라는 법』, 『음식, 잘 먹는 법』, 『안전, 나를 지키는 법』, 『옷, 잘 입는 법』 이렇게 4권이 출간되었다. 제목을 보고 처음엔 몸의 각 부분의 이름과 기능, 음식의 종류와 영양소, 안전 수칙, 옷의 종류와 쓰임 등을 알려 주는 여느 지식 정보책으로 여겼다. 그런데 이 책은 흔히 볼 수 있는 정보책이 아니라 시리즈 제목처럼 ‘생활책’이다. 다시 말해 사는 법을 알려 주는 책이었다. 『음식, 잘 먹는 법』 안에 나오는 ‘내 힘으로 먹고 살기 위한 첫 번째 기술은 밥짓기야.’라는 문장이 이 시리즈의 목적을 잘 말해 주고 있다. 그래서 책 속의 정보들은 ‘내가 스스로 한다.’로 모두 연결된다. 가령 음식 만들기의 청결함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먹었으면 치우자’라며
설거지하는 방법이 나온다. 또 옷을 깨끗하고 단정하게 입어야 할 때를 말하면서도 빨래 잘 개는 법을 제안한다.
책 속에 쓰인 말은 아이가 하는 말처럼 아주 쉽게 쓰여 있고, 그림은 자세하지만 지나치지 않고 간결하다. 귀여운 그림으로 그려진 양말 개기, 수건 개기는 당장 따라하고 싶을 정도이다. 아이들에게 소개해 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지만 두 아이의 엄마인 나에게도 솔깃한 정보가 가득했다. 살림살이가 시원찮은 나에게는 알짜 정보가 정말 많았는데 인터넷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지 않고 생활 언어로 설명되어 있어 훨씬 수월했다. 부끄럽지만 내가 만든 볶음밥이 왜 그렇게 질었는지 이제야 알게 됐다. 또 그동안 아이에게 씻어라, 먹어라, 치워라, 소리만 질렀던 것들도 ‘아, 이렇게 말해 주면 되는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이제 8살이 된 내 아들은 씻기를 엄청나게 싫어한다. 겨우 세수라도 하게 하면 정말 얼굴에 물만 묻히고 나오기가 일쑤이다. 그 녀석에게 이제 윽박지르지 않고 ‘제대로 세수하자’를 보여 줘야겠다. 물론 책을 통해 아는 것보다 실제로 얼마나 잘 씻는지가 백 배 더 중요하겠지만 솔직히 제대로 세수하는 법을 가르쳐 준적도, 보여 준 적도 없었던 게 사실이다.
 
이 책에서 또 인상 깊은 것은 아이들에게 알려 주는 수많은 정보가 어른들의 훈계로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옳다 그르다를 떠나서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게다가 가끔은 어른들의 고집에 항의하는 방법도 알려 준다. 무조건 편식은 나쁘다고, 모든 음식을 골고루 먹게 하려는 어른에게 그들의 모순을 슬쩍 찔러주기까지 한다. 뿐만 아니라 『음식, 잘 먹는 법』은 남자아이가 컵라면만 먹는 옆집 다 큰 형에게 밥해 먹고 살아남기를 가르치는 설정이다. 별거 아닌 듯해도 거의 모든 어린이책에 요리의 주체가 여자로 나오는 것을 비교하면 흔하지 않은 설정이다. 통쾌하다.

 



“우리 애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안 해요.”라고 한탄하는 부모가 많지만 정작 그 속을 들여다보면 아이를 믿지 못해 늘 부모가 미리 챙겨 주는 경우가 허다하다. 『몸, 잘 자라는 법』에서는 몸에 대해서 아는 것도, 몸을 씻는 것도, 몸을 잘 챙기는 것도 바로 ‘나’를 세우고 내 정체성을 찾아가는 시작이라고 말하고 있다. 많은 부모들이 좀 더 깨끗하게 아이를 돌본다는 명목으로 아이들이 자신을 찾아가는 그 첫 번째 시작을 빼앗아버리고 있는 건 아닐까?
몸뿐 아니라 음식, 안전, 옷 또한 마찬가지다. 온전한 나로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적인 것이지만 우리 아이들은 언제부턴가 그것들은 다른 사람이 다 해 주고 오로지 책상에 앉아서 공부만 하고 있다. 그러면서 어찌 스스로 잘 살길 바랄 수 있을까? ‘잘 먹고, 잘 입고 안전하게 잘 자라는 것까지 책으로 배워야 하는 세상이구나.’ 하는 마음이 들어 서글프기도 하지만 이렇게라도 배우고 익혀 아이들이 자립하는 기쁨을 조금씩 되찾아, 마침내 온전한 사람으로 우뚝 설 수 있길 간절히 바란다.



오은경|노음초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