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 농장』 김영희 교사 서평


김영희(대평고등학교 교사)

『동물 농장』은 조지 오웰이 1945년에 발표한 정치우화입니다. 소련 스탈린 정권에서 일어난 부정과 부패, 모순을 폭로하지요. 학생들에게 『동물 농장』을 권하면 “80년 전 소설을 왜 읽어요?”라는 질문을 종종 받습니다.(섭섭하지만) 틀린 말은 아닌 것이, 권유의 이유를 ‘사회 문제를 고발하는 수작’에서만 찾는다면 그러한 콘텐츠는 21세기에 훨씬 많이 생산・유통되고 있기 때문에 『동물 농장』으로만 접할 필요는 없거든요. 그렇다면, 오늘날 독자가 『동물 농장』을 읽으며 얻을 수 있는 바는 무엇일까요?

눈을 뜨게 하는 언어, 눈을 가리는 언어
매너 농장이 동물 농장으로 바뀌고, 동물 농장이 다시 매너 농장으로 돌아가는 과정에는 모두 언어의 강력한 힘이 개입합니다. 매너 농장의 공기가 달라진 계기는 메이저 영감의 연설이었지요. “영국의 그 어떤 동물도 자유롭지 않소. 동물의 삶이란 비참한 노예의 삶이요. 이 점은 명백한 진실이오.”라는 말을 들은 동물들은 “그 어느 때보다 흥분”하며 몇 분 만에 메이저가 제안한 혁명의 노래 전체를 외웁니다. 그리고 밤늦게까지 목소리를 높여 노래를 부르지요. 그들은 “메이저 영감의 연설로 인해, 전적으로 새로운 관점에서 삶
을 바라보게 되었”으며, 봉기를 일으켜 인간들을 몰아냅니다. “살아 생전 그런 반란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던” 동물들을 움직인 것은 메이저 영감의 연설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언어는 삶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계기가 된다고 볼 수 있지요.

아이러니하게도, 동물 농장의 몰락 또한 언어에서 기인합니다. 나폴레옹은 경쟁자 스노볼을 몰아낸 뒤 언어를 오염시키는 방식으로 동물들의 눈을 가리기 시작합니다. 나폴레옹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스노볼을 향한 비방 때문에 동물 농장에서는 “무엇이든 잘못되면 스노볼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하나의 문화가 됩니다. 본래 스노볼은 동물들의 삶을 증진하고 권력을 나누는 일에 집중하던 인물이었으나, 어느새 동물들은 “스노볼이 주변 공기에 스며들어 온갖 위협으로 그들을 위협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동물들에게 자신을 “우리의 지도자, 나폴레옹 동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하며 “모든 동물의 아버지”나 “인류의 공포” 같은 용어로 수식되길 즐겼지요. 그러한 분위기에 익숙해진 동물들은 종국에는 “돼지와 다른 동물이 길에서 마주치면 다른 동물이 비켜서야 한다는 규칙”까지 문제의식 없이 수용합니다. 혁명의 시기에 매너 농장의 간판을 동물 농장으로 교체할 때에는 모든 동물이 평등했으나 점차 돼지들은 농장에서 권력 집단으로 군림합니다. 그들은 동물들이 불만을 품겠다 싶은 시점에는 노래와 연설의 횟수를 늘립니다. 그러면 동물들은 “아주 잠깐이라도 굶주린 배를 잊고” 행사를즐겼지요.

돼지들은 동물주의의 원칙 7계명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조금씩 고치고,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나쁘다”라는 구호를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더 좋다.”로 수정합니다. 동물들은 ‘현재’ 벽에 쓰인 글귀가 무엇인가에만 집중하며 그것의 의미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습니다. 결국 동물들이 주인이라는 의미였던 동물 농장이라는 농장명이 매너 농장으로 돌아가고, 돼지들이 두 다리로 걷기 시작하며, 인간들과 교류를 시작해도 다른 동물들의 눈에는 그것이 “하나도 이상해 보이지 않”게 되어 버리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에 기대를 품을 수 있는 이유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작품을 써냈다는 점에서 조지 오웰을 ‘사회주의에 반하는 인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오웰은 죽는 순간까지 자신을 사회주의자라 칭했다고 합니다. 그는 사회주의 자체가 악이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권력자들이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부패와 모순을 비판하려고 『동물 농장』을 썼습니다. 어떤 이념에 기반한 사회이건 교묘하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구별하며 이득을 취하는 존재들이 있기 마련이니 민중들은 각성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작가는 독자들에게 각성은 혁명이라는 특정한 이벤트의 순간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일상의 모든 영역에 촉을 열어 두고 있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요.

인생을 걸었던 이념을 향해 예리한 비판의 말을 던지겠다는 작가의 결의는 분명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이 작품을 읽은 독자들이라면‘현재’를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 나가기 위한 고민을 할 수밖에없으니까요. 『동물 농장』에 등장한 우둔하고 불쌍한 동물들같이 살지 않기 위해서라도 권력자들이 구사하는 오염된 언어를 향해 예리한 안테나를 세우겠지요. 이것이 악인들에게 언어로 대적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것이 『동물 농장』의 성과일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언어의 힘을 믿습니다.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실패
했으며, 병약했던 오웰은 47세에 눈을 감지만, 『동물 농장』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시민의 각성을 촉구하는 작품이 되었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그래픽 노블 『동물 농장』을 읽을 때에는 구도와 색감에 초점을 두어 보시길 권합니다. 색채와 화풍은 그림 작가가 구사하는 언어이기 때문이지요. 21세기의 작가가 왜 20세기의 작품을 각색한 작품을 써내었을지, 작품에 담아내려 한 생각은 무엇이었을지 그림을 ‘읽어’ 가며 파악해 보세요. 이 과정에서 새로이 알게 되는, ‘언어의 힘’을 담아낼 수 있는 수단은 말과 글 외에도 아주 많고, 이렇
게 많은 언어들이 이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분투하고있다는 깨달음은 여러분에게 큰 용기가 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