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참 큰 소설을 읽었다

소설가 이경자의『순이』를 단숨에 읽었다. 그것도 버스 안에서 다 읽어 버렸다. 평소 나는 버스에서는 절대 무얼 읽지 않는다. 전철이나 기차로 움직일 때는 손에 늘 책이 있지만, 버스에서 읽지 않는 건 지독한 멀미 때문이다. 그런데 강릉으로 가기 한 시간쯤 전『순이』가 배달되어 왔다. 봉투를 뜯어 앞부분을 읽는데, 이걸 도저히 집에 놓고 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챙긴 것이 여벌의 멀미약이었다. 버스로 한 시간 이상 이동할 때 늘 멀미약을 먹지만, 이 소설 때문에 먹는 멀미약 외에 귀 밑에도 멀미약 하나를 더 붙였다.
 
 
소설의 주인공은 여섯 살의 순이다. 여섯 살 된 여자 아이의 성장 소설이다. 그러면 그 조그만 것에 무슨 인생이 담겼냐고, 되물을지도 모르겠다. 그 나이의 주인공들에겐 푸른 초원 위에 나비를 쫓고 비눗방울을 날리고, 세상 역시 비눗방울의 빛깔로 바라보는 동화가 제격일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 속의 주인공 순이는 한밤중에 온 식구가 둘러앉아 제삿밥을 먹을 때도 엄마에게서 이런 소리를 듣는다. “니 같은 건 나가 죽어두 눈 하나 꿈쩍 안해! 주제꼴두 모르고 어디서 울어?” 설마 엄마들이 이렇게 말할까 싶지만, 나도 강원도 산골에 살아 이런 엄마들을 많이 알고, 이런‘순이’들도 많이 안다. 동생 철이처럼 ‘고거’ 하나 안 달고 나왔다는 이유로 부모에게서 괄시받고 자라며 사회에서도 괄시 받는 순이의 어린 시절 이야기다.
 
나는 고향이 강릉이고, 작가의 고향은 강릉 바로 위쪽 양양이다. 해방이 되며 삼팔선이 그어졌을 때, 강릉은 남쪽 땅이었고, 양양은 북쪽 땅이었다. 그러던 것이 한국전쟁 이후 양양은 남쪽으로 편입되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수복 지구’라고 불렀다. 그런 수복 지구에서 순이는 태어났다. 아니, 태어난 것은 그 전이었고 서너 살에 전쟁을 치르고, 휴전이 되자 어느 결에 여섯 살이 되었다.
앞에서 엄마가 한 말이 아니더라도 전쟁 통에 너나없이 모두 목숨 내놓고 살고, 굶주림에 돌림병까지 돌아 서넛 낳은 아이들 중에 한둘 잃은 게 큰일도 아니던 시절, 정말 순이 같은 아이 하나 죽는다 해도 세상은 눈 하나 꿈쩍 안 하던 시절, 물방울처럼 작은 한 아이가 두려움 가득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세상을 바라본다.
전쟁이 터지자 피난 갔다 돌아온 아버지는 걸핏하면 어머니를 패고, 장거리에 옷 수선집을 하는 어머니의 유일한 희망은 어떻게든 돈을 모아 남매를 가르치는 것이다. 그런 엄마 눈에 순이는 동생만큼 눈에 차지 않아 늘 욕을 먹고 산다.
휴전이 되고 어른들은 마을에 또 하나의 38선 같은 보이지 않는 금을 긋는다. 누구네는 빨갱이라고, 어울리지도 말고 말도 걸지 말라고 어린아이들에게까지 그 집 아이와 놀지 못하게 한다. 어느 지역이나 비슷한 부분이 있었겠지만, 이 수복 지구는 운명적으로 더욱 치열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한가운데를, 또 그 시절을 작가는 살아왔고, 자신의 어린 날 분신 같은 소설『순이』를 썼을 것이다.
 
나는 특히나 이 소설의 결말이 아주 인상적이다. 굳이 세상 전체와 비유하지 않아도 물방울 같은 아이 하나가 이제 학교로 들어갈 때가 되었다. 오줌을 누기 위해 옷을 내렸다가 문득 자신의 어린 꽃잎을 본다. 이제까지도 무수히 봐 왔겠지만, 그날 순이는 아직 어리지만 자신의 신체를 통해 아주 홀연한 모습처럼 새롭게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다. 여자로서의 정체성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 한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깨달으며 세상을 향해 자신의 작지만 아주 큰 발자국을 내딛는다.
근래에 읽은 어떤 소설에서도 끝부분에 이만큼 감동을 받은 소설이 없었다. 책을 읽는 내내 불쌍하게만 여겼던 한 아이가 쿵, 하고 바윗돌을 움직이듯 새로운 화두를 제 앞과 내 앞에 동시에 던져 놓은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소설을 읽는 내내 흐뭇하게 미소 지었던 것은 내가 잘 쓰는 강릉 사투리와도 다르고, 좀 더 북쪽 사람들이 쓰는 속초 사투리와도 다른 양양 사투리가 아주 감칠맛나게 사용된 점이다. “밥먹었너?”, “마숩너?” 하는 말들이 왜 이렇게 살갑게 다가오는지.
책을 다 읽고 버스에서 내려 작가에게 전화를 했다. 서로 나눈 이야기 전부를 기억할 수 없지만 내가 마지막 한 말은 이랬다.“ 선배, 주인공 순이는 참 작은데,『순이』라는 소설은 참 큰 소설이에요.”
이 작품을 읽는 내 느낌은 그랬다. 소설 속의 순이는 물방울처럼 작고 여리지만, 이 소설은 참 크다. 어린 날 자기 자신에 대해 우주적 정체성을 깨닫는 순이의 모습이 내게는 더욱더 그랬다. 마지막 문장을 써 놓고도 ‘끝’자를 쉽게 쓰지 못했다는 작가의 마음 또한 그랬을 것이다.
 
 
글ㆍ이 순 원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