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코 부도리의 전기』 작품해설 : 삶의 두 갈래 길 (3) 맺음말

삶의 두 갈래 길
-‘구스코 부도리의 길’과 ‘펜넨넨넨넨 네네무의 길’
 
(3) 맺음말
 
우리는 처음에 「구스코 부도리의 전기」와 「펜넨넨넨넨 네네무의 전기」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또 겐지가 왜 이런 전기 형식의 작품을 썼을까 하는 의문에서 출발했습니다. 아마도 겐지는 어떤 인물의 일대기라는 전기 형식의 작품을 통해 ‘어떻게 살아가는 게 바람직한가?’ 하고 묻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부도리와 네네무, 이 두 인물을 통해 ‘당신은 어떻게 살고 싶은가?’ 하고 말입니다. 겐지는 이러한 질문을 창작 초기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줄곧 자신에게 또 독자에게 던졌던 것이고, 그것이 바로 이 두 작품으로 구체화된 게 아닐까요?

처음에 두 인물이 맞닥뜨린 상황은 아주 비슷합니다. 조금만 실수하면 목숨을 잃을 만큼 냉혹한 자연, 즉 ‘숲’에 던져진 존재입니다. 둘 다 일을 하다가 나무에서 떨어져 죽을 뻔했던 것을 생각해 봅시다. 그러나 이 숲을 벗어나서 두 인물이 가는 길은 아주 다릅니다. 네네무는 곧장 도시로 가서, 이런 ‘숲’과 무관한 일을 하며 살아갑니다. 부도리는 그렇지 않지요. 부도리에게는 ‘수렁논’의 경험이 있습니다. 부도리는 ‘수렁논’에서 농부와 함께 농사를 짓는 과정에서 자연의 냉혹함도 경험하지만 그와 동시에 농부들과의 연대감을 익혔기 때문에, 도시에 가서는 일과 공부를 병행하면서 자연에 대처하는 방법을 강구하며 농사일을 돕는 것입니다.

두 작품에 나오는 ‘숲’, ‘수렁논’, ‘무무네 시’와 ‘이하토부 시’는 겐지가 인식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대비되는 곳이 도시인데, 네네무의 ‘무무네 시’는 도무지 살 만한 데가 못 되는 곳입니다. 아부와 칭송, 명성과 지위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곳입니다. 타인의 시선에 좌지우지되는 그런 곳입니다. 그러나 부도리의 ‘이하토부 시’는 전혀 다릅니다. 그 곳은 ‘수렁논’에서 일하는 이들을 염두에 두고 학자와 기사가 협력하여 일하는 곳입니다.

기근이나 냉해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자연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냉혹합니다. 그렇지만 어떤 자세로 살아가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세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겐지는 이 작품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를 변화시키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은 바로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실천이라는 사실을 이 작품들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두 작품의 상이한 결말은 바로 작품에 나오는 인물의 성격과 직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근으로 부모를 잃고 누이와 헤어진 채 숲에서 힘겹게 살았지만, 자신의 입신출세만을 위해 공부하여 마침내 바라던 대로 출세를 하자, 모든 것을 다 잊고 화산이 폭발하는데도 아무 걱정 없이 춤과 노래를 즐기는 네네무. 이런 삶에는 어떤 미래도 없다는 것을 겐지는 파국적인 결말을 통해 보여 준 것이 아닐까요? 반면 이러저러한 시련을 겪은 것은 네네무와 같지만, 자신의 모든 경험을 잊지 않고 농부들이 걱정 없이 농사짓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일도 하고 공부도 하는 부도리. 이러한 부도리 같은 삶이 바람직하다고, 이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겐지는 묻는 것이 아닐까요? (각주)

「구스코 부도리의 전기」의 결말을 읽어 봅시다. “모든 준비가 다 끝나자, 부도리는 사람들을 전부 배로 돌려보낸 뒤 혼자섬에 남았습니다. (……) 하지만 사나흘이 지나자 날씨는 점점 따뜻해졌고, 그 가을에는 거의 평년 수준의 농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시작처럼 되었을지도 모를 많은 부도리의 아버지와 어머니들은 많은 부도리와 네리와 함께 그 겨울을 따뜻한 음식과 밝은 장작불로 즐겁게 살 수 있었습니다.”(75~76쪽) 비록 부도리는 죽지만, 그의 희생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어쩌면 「구스코 부도리의 전기」는 과학이 자연의 한계를 극복하고 인류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줄 것이라고 믿었던 근대의 관점이 담겨 있는, 따라서 시대적인 한계도 안고 있는 작품일지도 모릅니다. 또한 이 작품을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본다면, 과학적 사실로서는 올바르지 않은 부분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세한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 과학자로서 부도리의 자세가 아닐까 합니다.

부도리는 일과 공부가 따로따로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과학이 ‘인간을 위한 과학’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어디 과학뿐이겠습니까? 모든 학문이 ‘인간을 위한 학문’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인간을 위한 학문’이라는 기본을 잃어버릴 때, 학문이 인간을 억압하는 무서운 폭력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은 또한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이유를 찾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 줍니다. 자기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공부하며 일하는 것이라는 메시지 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이 시대에 필요한 공부에 관한 새로운 관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법화경』의 비유처럼 세계는 ‘불타는 집’일지도 모릅니다. 이 세계는 불타는 집과도 같은데, 사람들은 미망에 빠져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지요. 「펜넨넨넨넨 네네무의 전기」에 이러한 인식이 깊게 배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좀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가슴에 희망을 품고 무엇인가 꾸준히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한, 그래도 이 세계는 살 만한 곳이 아닐까요? 혼자 잘 살겠다고 해서 과연 혼자 잘 살 수 있을까요? 온 세계가 살 만한 곳이 되지 않는 한, 혼자만의 행복한 삶은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겐지는 이 두 작품의 주인공을 통해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각주)
겐지는 왜 이렇게 농사를 중요하게 여겼을까? 그건 농사야말로 먹고사는 일과 직접 연관되기 때문일 것이다. 생명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농사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농사야말로 자연과 연결점을 갖고 있으며, 인간 또한 자연 속의 한 존재임을 잊지 않게 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미야자와 겐지의 이러한 관점은 농부와 농업을 소중하게 여긴 작가 톨스토이나 권정생과도 비슷하다.
 
 
 
 
글 - 엄혜숙 (아동청소년문학 기획·번역·평론가, 그림책 작가)
 
※ 『구스코 부도리의 전기』에 실린 작품해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