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탐방 : 그림책을 짓는 사람, 화가 이억배



 
연둣빛으로 물든 논밭을 옆에 두고 한참을 길 따라 가다 보면, 풍정마을이라고 쓰인 표지석이 보인다. 표지석 따라 좁다란 외길로 들어서서 조금 더 가니 온통 초록 일색이라 어느 살림집 마당인지, 무성한 풀밭인지 가늠할 길 없는 곳이 있다. 문이랄 것도 없어 한참을 기웃거리며 서 있는데, 풀 한 자락을 젖히고 낯익은 아저씨가 하나 등장한다. 바로 일러스트레이터 이억배다.
평소 일 마무리가 깔끔하고 꼼꼼쟁이로 소문난 그가 사는 곳은 어떻게 생겼을까? 풀 한 포기 허투루 두지 않았을 성싶었는데, 웬걸? 살림집 초입부터 숲 속 길이 따로 없다. 웃자란 풀들에 여기저기 멋대로 핀 들꽃들, 군데군데 솟아 있는 키 큰 나무들이 그야말로 야생의 기운을 듬뿍 발하고 있으니, 먼 길 온 나그네 마음속은 도리어 편안해진다.
“원래 여기 텃밭을 했어요. 근데 지금은 야생화랑 나무랑 그야말로 꽃밭이지. 봄만 해도 저들끼리 구역이 있었는데, 여름이 되면 다 섞여. 가을엔 그냥 한 덩어리가 돼서 구역이고 뭐고 같이 사는거지 뭐, 험하게.”(웃음)
안성 시골마을에 살림을 부린 지도 어느덧 십수 년이 되어 가는 부부, 이억배와 정유정은 동시대를 살아온 동갑내기 화가이다. 93년 같은 해에 그림책 작가의 길에 들어섰으니, 경력도 고만고만 똑같은데, 어쩜 살림집 한 켠에 마련된 두 화가의 작업실 방 크기도 똑 떨어지게 같다. 확장 공사를 하며 작업실을 하나 더 넓혔는데, 똑 고만하게 만들어 달라고 했단다. 화가가 작업실 규모를 욕심내는 건 당연지사인데 부부라고 다를까. 둘은 바닥에 큰 종이 펼쳐 놓고 물감이라도 한 번 뿌려 볼 공간은 꼭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둘은 이렇게 마련된 작업실에서 그림 농사지으며 딸아이, 아들아이, 남매를 다 키워 놓았다.
“이사 와서 한 4년은 열심히 농사를 지었어요. 배추 심어서 김장도 하고. 그런데 농사일이란 것도 순서를 잘 알아야 해. 순서를 제대로 알아야 전문간데 우린 뭐 얼치기 농부지. 그러다 보니 농사일도 서툴고 본업(그림)도 잘 못하겠고 어우, 이건 안 되겠다 싶더라고. 그래서 그 뒤로는 텃밭이 점점 줄고 꽃밭이 늘었어요.”
그래도 시골서 사는 덕에 먹거리 걱정은 덜고 사는 편이다. 봄나물이 나올 무렵부터 겨울 김장 전까지 밭에서 올라오는 건 뭐든 뜯어먹어도 탈이 없고, 상추며 토마토, 깻잎, 오이, 고추 등은 텃밭에서 키워 먹는다. 심심치 않게 동네 어르신들이 가져다주는 호박이며 가지, 쌀도 살림살이에 넉넉한 보탬이 된다.
“우리가 어디 잠깐 나갔다 오면 현관 앞에 뭐가 잔뜩 놓여 있어요. 먹을거리들인데 누가 가져다 놨는지도 몰라. 그럼 이제 추적해 보는 거지. 어느 집 할머니가 가져다 놓으셨을까 하고. 그래도 요건 아무개 할머니네, 또 저건 아무개 할머니네 이러고 짐작은 가거든. 나중에 할머니 만나서 물어보면‘먹어 보라고 가져다 놨지, 뭐’이러고는 그만이야. 이런 건 참 도시에는 없죠.”
그저 남는 먹거리 좀 나눠 먹는데 내세울 것도, 대수로울 것도 없다는 동네 어르신들의 인심이 참 넉넉하다. 이날도 마침 중복 날이라서 마을 잔치가 열린 모양인데, 부부는 참석을 하지 못했다. 말씀은 안 하지만 꼴난 인터뷰때문일 게 분명하니, 괜히 좀 미안해진다.

 
사람 냄새, 풀 냄새 맡으며 그림책 짓는 화가, 이억배의 어릴 적 꿈은 신기하게도 화가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화가가 되고 싶었다니 비교적 일찌감치 꿈을 찾은 셈이다. 만화책을 굉장히 좋아해서 책가방의 반은 만화책으로 채울 정도였다. 돈이 생기면 먹을 걸 아껴 만화책 사모으는 데 쓰고, 그러다 보니 만화책으로 방 한 칸을 족히 채울 정도가 되었다.
“어느 날 보니 만화책이 너무 많네. 아, 이거 장사를 해도 되겠거든. 그래 집에 조그맣게 만화 가게를 차렸지요. 가게라고 해 봐야 만화 쌓아 놓고 그냥 소꿉놀이 한 거죠. 왜 애들이 어른들 흉내내듯이 말이에요. 어머니한테 들켜서 야단 엄청 맞았지. 우리 어머니 꿈이 아들이 상대에 가는 거였거든요. 근데 왜 만화 가게는 반대하셨는지 몰라.”
이때부터 그의 반항이 시작된 걸까? 공부를 잘해서 집안의 기대주였음에도 화가, 이억배는 자신의 꿈이 가리키는 대로 미대에 진학했다. 당시 80년대는 민주주의를 갈망하며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시기였고, 이억배의 고민 또한 어떻게 해야 예술이 사회 속으로 들어가서 대중과 깊은 교감을 나눌 수 있는가였다. 대중과의 소통을 꿈꾸는 현장미술 활동을 하며 정유정을 만났고, 둘은 함께 사람들 속으로 들어간다. 시민미술학교, 걸개그림, 만평, 노동자 판화강습 등 그림으로 사람들과 만날 수 있는 곳은 빼놓지 않고 찾아다니며 문화 운동을 하였으니 조직이 허물어져 내렸을 때는 깊은 상처를 받을 밖에. 이때 이억배가 찾은 소중한 출구가 바로 그림책이다.
“운동하던 사람들이 그림책 쪽으로 많이 왔죠. 그때 했던 일들이 어찌 보면 우리한테 학교 역할을 한 거거든요. 그림을 가지고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법을 배운 거니까. 그리고 그 대상이 어린이라면 좀 더 오래 함께 숨 쉬며 갈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림책을 시작한 건 93년부터였다. 당시 그림책 판도 막 태어난 상태여서 창작 그림책이랄 게 없는 황무지였고, 그림책을 내는 출판사들은 대부분 전집이나 외국 그림책에 매달리는 상황이었다. 힘든 상황에서 이억배는『솔이의 추석 이야기』를 준비했다. 93년부터 준비했으니 출간까지 이 년이 걸린 셈인데, 원화를 다 완성하고서도 책을 내줄 출판사를 찾지 못해 고생에 고생을 거듭했다. 그림책으로는 첫 데뷔작을 완성한 셈인데, 데뷔하자마자 바로 은퇴를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무도 안 내주겠대. 화가 나는 게 아니라 너무 망연자실하더라고. 글이야 부족한 거 알지. 그림도 부족한데, 뭐. 그래도 책은 내줘야 할 거 아니야. (웃음) 아무튼 어찌어찌 가까스로 연이 닿아서 출간이 되었는데 한 일 년 정도는 너무 미워서 책을 쳐다보기도 싫었어요. 근데 나만 미워하는 줄 알았는데 이 책을 대놓고 미워하는 사람들이 생기더라고. 아, 그래도 내 자식인데 방어를 해야 할 게 아니에요. 사람들이 미워하니까 막 애정이 샘솟더라고.”
그렇게‘솔이’를 내놓고 쭉 그림책 작업을 해 온 지 이십 년이 다 되어 간다. 작품 하나를 붙들면 삼 년은 걸리고, 또 두 작품을 한꺼번에 하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나온 책 수가 많지는 않지만, 만만찮은 공력이 들어간 책들이다. 특히 얼마 전에 나온『비무장지대에 봄이 오면』을 만들면서는 얼개를 다 갖추어 놓고도 마무리를 하는 데에만 일 년이 넘게 걸렸다. 마지막에 가서는 체력이 바닥나서 첫 작품 할 때 못지않게 고생을 하기도 했단다.
“이런 건 이래서 기억에 남고 저런 건 저래서 인상 깊고 그래요. 작품도 화가한테는 자식이다 보니, 콕 짚어 어느 자식이 가장 이쁘다, 이건 없지. 앞으로 옛이야기도 좋고, 허무맹랑한 이야기도 좋고, 내가 맘에 드는 글에 그림을 붙여도 보고 싶고, 하고 싶은 게 참 많아요. 근데 무엇보다도 지금 방식을 좀 바꾸고 싶어요. 좀 더 경쾌하고 가볍고 또 쾌활한 화풍으로. 이런 생각이 요번에 든 건 아니고 예전부터 있어 왔거든요. 답답하기도 하고 오래 해 왔으니 환기도 좀 하고 싶고 그렇지.”

 

힘을 덜고 조금 더 가벼워지고 싶은 화가, 이억배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이어 정유정의 다음 작품도 곧 나올 예정이라고 하니 부부가 똑같이 바쁘게 생겼다. 스물네 시간 동지처럼 붙어서 작업하는 화가 부부, 이들은 어떻게 싸울까? 마지막 질문에 대한 재미있는 답변.
“안 싸울 리가 있겠어요. 아주 대판 싸우지. 근데 화가나도 1박 2일로는 안 가. 바로 풀어야지 둘 다 못 견뎌요.남들은 한 달간 말 안 할 때도 있다는데 우린 그럼 이혼이야. (웃음) 근데 열에 아홉은 내가 사과를 해요. 그냥 우르르 화내다가 딴 문제까지 건드려 버리거든. 그러니 사과받을 일에도 결국엔 내가 사과하게 되는 거지. 아, 막 자존심이 상해.”
많은 걸 함께 한 동갑내기 부부, 이억배와 정유정에게는 단꿈이 하나 있다. 안성을 베이스캠프로 두고, 한 두어달씩 돌아다니며 살아보는 게 부부의 풋풋한 꿈이다. 아이들 다 키워 놓고서라니, 부부가 꿈을 이룰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썩 괜찮았던 만남을 뒤로 하고 작업실을 나오는데 삽사리 부숭이가 꼬리를 흔든다. 머지않아 부부의 꿈이 이루어지면, 부숭이 밥은 누가 챙겨 줄까?
 
                                                                                                                                                                                                                 
편집부_김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