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다시 거인이 되세요

우리 반에는 아버지와 함께 살지 않는 아이도 있고 아버지하고만 사는 아이도 있다. 같이 살아도 아버지 이야기를 아예 꺼리는 아이도 있고 직장 때문에 주말에만 만나는 아이도 있고 1년에 한 번 겨우 만나는 아이도 있다.

아이들에게 종이 한가운데 자기를 그리고 과녁판처럼 동그라미를 여러 개 그린 후에 자기와 가깝거나 영향을 주는 순서대로 가족을 넣어 보라고 했다.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아빠가 있는 아이는 거의 없다. 가족과 떨어져 사는 한 아이는 돈이 많아져 식구들과 같이 살고 싶은 마음에 돈과 식구를 모두 한곳에 써 넣기도 했다. 돈 때문에 아빠가 고생하고 떠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른 명 중 스무 명 이상이 아빠를 엄마나 형제 다음에 그려 놓았고 그 중 일곱 명은 아빠를 맨 바깥 원에 그려 놓았다. 할머니, 할아버지, 사촌, 키우는 강아지보다도 먼 순서에 있다.심지어 종이 한쪽 구석에 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으로 아빠를 써 넣은 아이도 있다.
 
 
과녁판처럼 동그라미 여러 개를 그린 후 자기와 가깝거나 영향을 주는 순서대로 가족을 넣어 보았다.
 
 
원래 대부분의 아이들은 아버지보다 엄마를 가깝게 여긴다. 하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다. 아버지는 점점 작아지고 가족에게서 멀어지고 있다. 우리 집만 해도 엄마와 딸이 똘똘 뭉쳐 아버지를 내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이제는 바깥 세계에서도 내쳐지고 움츠러 들고 있다. 이러다간 아버지들의 반란이 일어날지 모른다. 아니, 그랬으면 좋겠다.오늘은 아버지 이야기를 해야겠다.
 
 
 
“너희들의 아버지는 어떨 때 거인 같아?”

『우리 아빠, 숲의 거인』책을 보여 주고 제목을 읽은 후에 처음 던진 질문이다. 아이들이 무슨 말인지 몰라 대답을 하지 못한다. 거인이라 하면 당연히 덩치가 산만큼 커야 하는데 말이다. 다시 물었다.
 
“언제 아버지가 커 보여? 나는 어릴 때 아버지가 회사 가는 길과 학교 가는 길이 같아서 아침마다 같이 갔는데 따라가려고 늘 빨리 뛰어야 했거든. 그때 정말 커 보였는데…….”
“선생님 아버지는 키 커요?”
“아니, 키 작아. 그런데 어릴 때는 진짜 커 보이더라고. 우리 아버지가 쉰다섯 됐을 때 회사를 퇴직하고 집에 계시는데 그때 정말로 작아 보이시더라. 그래서 마음이 안 좋았어.”
“선생님 아버지도 회사에서 잘렸어요?”
“잘린 건 아니고 나이 많은 사람이 퇴직하는 나이가 쉰 다섯 살이야.”
“우와. 너무 젊은데요. 그런데도 회사 그만둬야 돼요?”
“그러게. 여전히 일을 잘할 수 있어도 그래. 그렇게 나이 많다고 자르고 다시 돈 조금 주면서 일 시키는 데도 많아.”
“맞아, 맞아. 보니까 주로 경비원 하던데요.”
 
 
그렇게 아버지 이야기를 하고 책을 읽어 주기 시작했다. 그림책은 아니지만 글만큼 그림도 읽는 재미가 커서 아이들을한곳에모아놓고그림을보여주며읽었다.‘ ~요’로끝나는 문체 때문에 대번에 저학년이 읽는 책 같다는 말이 나오긴 했지만 금세 그림 보는 재미에 빠져 방해가 되진 않았다. 자기 부모님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편안한 글과 만화 같은 그림 덕에 토 달기 좋아하는 아이들이 트집 한 번 잡지 않았다. 부모마저도 듣지 못하는 엄마의 작은 목소리를 숲의 거인, 아빠는 어떻게 들을 수 있냐 할 것 같았는데‘사랑’하면 그럴 수 있고 사랑에는 이유가 없다는 것에 아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작 아이들의 말문을 열게 한 것은 사랑에 빠진 엄마와 아빠를 막는 부모 때문이었다. 부모님이 반대하는 1000가지나 되는 이유에 아이들이“헐~”한다. 다른 사람과 다르게 ‘이상하게 생겼기’때문에 싫어하는 경우도 많다 하니까 그러면 안 되지요, 차별이에요 하면서도 거인은 너무 크잖아 하는 아이도 있다. 그래도 너희들 같으면 어떡할까 하는 물음에는 사랑하니까 허락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아직까지는‘사랑’이 모든 것인 아이들이다.
숲의 거인 아빠는 슬픔도, 눈물도, 숲만큼 크다. 책장을 여는 순간 거인이 워우어~ 하고 우는 모습에 아이들은 하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지만 아무도 거인과 엄마를‘우습게’보지는 않았다. 마침내 엄마와 아빠는 결혼을 한다. 결혼사진속에 있는 아빠의 커다란 맨발은‘숲’에 있는 커다란 나무 기둥 같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부터다. 결혼을 한 엄마는 숲에서 살수 없다고 말한다. 이유는 아흔여덟 가지이고 마지막 이유는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없기 때문이라 했다. 조용히 듣던 아이가 “우리 엄마도 저래. 만날 애들 때문이래.”했다. 옆에서 딴 여자아이가“결혼하고 나면 현실이지.”한다. 아마도 부모님에게 들은 소리일 거다. 또“좋아해서 만났다 해 놓고는 만날 싸워요. 싸우지 마라 하면 우리 때문에 싸운대요.”한다.
 
 
 
결국 아빠는 숲의 거인에게는 터무니없이 작은 아파트에 살게 되었고 숲에서와는 전혀 다른 일을 해야 했다. 열심히 하지만 해고를 당할 때마다 아빠는 작아졌다. 그러다 다른 사람과‘겉모습’이‘비슷’해지자 그제야 거인 아빠는 외할아버지에게 인정을 받는다. 외할아버지 마음에 들만큼 작아져서 피자가게 계산기를 두드리는 아빠의 무표정한 모습이 워우어하고 숲처럼 큰 울음소리로 울던 거인의 모습보다 훨씬 슬퍼 보인다.
이제 아빠는 작아졌고 아빠의 그림자는 울고 있다. 아빠를 둘러싸고있던 나뭇잎들도 사라지고 급기야 인형처럼 작아진 아빠는 엄마의 목소리도 알아듣지 못한다.왜 이렇게 되었을까?
“하고 싶은 일을 못하니까요.”
“아빠는 엄마한테만 맞춰서 살잖아요.”
“아빠는 노력했는데 회사에서 자꾸 해고 당했잖아요.”
“아빠가 원하는 것은 못하고 싫은 것을 억지로 하니까요.”
“숲에서 못 사니까요.”
“아무도 몰라주잖아요.”
“결혼하기 전에는 아무도 못 듣는 엄마 목소리도 들을 줄 알았는데 지금은 엄마 말을 못 알아들어요. 이제 마음도 안통하나 봐요.”
“너희 엄마, 아빠는 어떤 것 같아?”
대답이 없다.
“나는 결혼하고 나서 많이 달라졌는데…….”하니까 그제야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왜 결혼했는지 모르겠다, 우리 아빠는 원래 꿈은 다른 건데 지금은 먹고 살아야 되기 때문에 바뀌었다 하더라 한다. 아이들 스스로 우리를 키우기 위해서 그런 거다는 말도 덧붙였다. 아빠가 갖는 부담이 아이들에게도 넘겨졌다.
이제 어떻게 할까? 책을 들고 가만히 있으니 아이들끼리 이야기를 나눈다.
“이번엔 엄마가 양보해야지요.”
“그러면 엄마가 또 불행하지 않을까?”
“아빠도 노력했잖아.”
“엄마도 열심히 했는데……. 엄마가 잘못한 거는 없잖아.”
“엄마도 한 번 숲에서 살아 보고 결정하면 되잖아.”
“나는 숲에서는 못 살겠다.”
“그냥 따로 살면 안 되나?”
다행히 엄마는 여전히 아빠를 사랑하고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알아차렸다. 엄마는 아빠를 숲으로 데려갔고 아빠는 다시 거인이 되었다. 그리고 숲에서는 절대 기를 수 없다던 아이도 태어나 세 식구는 행복하게 노을을 바라본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갔다.
“너희들 아빠는 언제 거인처럼 느껴져?”
물음은 이해했지만 대답은 망설인다.
“몸이 크다고 거인이라고 하지 않는 것 같은데. 어떨 때 거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때요.”
“행복하게 살 때요.”
“든든할 때요.”
“그래, 그럼 아버지가 어떨 때 그렇게 느껴지는지, 아니면 아버지가 어떻게 하면 거인처럼 될 수 있을지 한 번 써 보자.”
자기와 가족의 관계도를 그릴 때보다 훨씬 어려워했다. 아마도 줄어든 어른의 삶, 자기 자신을 찾는 삶에 대해 고민한 적이 없어서일 거다. 어쩌면 숲의 거인처럼 자신의 삶을 찾아 행복하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아빠의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일지도 모른다.
 
 
* 아빠는 힘의 거인이다. 팔씨름같이 힘에 관한 운동을 해서 지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그때 아주 자신 있어하신다.
* 아빠는 우리 가족의 거인이다. 우리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니까 거인처럼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그런데 아빠는 항상 우리를 도와주시는데 그때 아빠가 크게 느껴진다.
* 아빠는 우리 집의 거인이다. 물건이 고장나면 아빠가 다 고치고 버스를 놓치면 아빠가 태워 주고 내가 못하는 것은 아빠가 다 해 주기 때문이다.
* 아빠는 발 넓은 거인이다. 아는 사람이 무지 많고 사람들을 만날 때 아주 좋아한다.
* 아빠는 낚시의 거인이다. 낚시에 대해서는 뻥도 잘 친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노력, 고달픔은 알지만 아버지의 꿈, 아버지의 거인 같은 모습은 모르고 있다. 아버지뿐만이 아닐 것이다. 바쁘게 경쟁하며 돈을 벌고 공부를 해야 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진짜 모습, 진정으로 행복한 때를 찾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한다. 아버지에게 간절히 말하고 싶다.
“아빠, 다시 거인이 되세요.”
 
 
 
 
오은경│아이들과 가까워지고 싶어 읽기 시작한 어린이책에 푹 빠져 있는 초등학교 교사이다. 학교 도서관에서 아이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고 엄마들과 어린이책을 공부하고 있다. 지금은 동쪽으로는 바닷가, 서쪽으로는 깊은 숲이 있는 부구초등학교 삼당 분교에서 다섯 명의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사계절 즐거운 책 읽기 2011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