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 작가 취재 노트5

⑤ 자유로운 상상을 허락하기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취재 노트 5
가 보지 않은 곳을 이야기하다, 하얼빈과 충칭




 
┃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지 진열관 전경과 내부 (사진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제공받았습니다.)

 
장편 역사소설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를 쓰기 위해선 내가 경험하지 못한 시간과 공간의 장벽을 뛰어넘어야 했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인 1920년부터 1954년까지는 일제강점기와 해방기, 한국전쟁과 휴전까지로 우리 근대 역사의 격랑기다. 공간적 배경은 한국을 비롯해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에 이른다. 그동안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주로 써 왔기에 나로서는 시공간을 뛰어넘는 것 자체가 새로운 도전이었고 전작들보다 더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다.
자료 조사 외에 소설 속 무대에 직접 가 보는 일은 무엇보다 필요한 준비였다. 제대로 된 무대가 내 안에 만들어져야 인물들이 자유롭게, 자신 있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곳에 간다고 해서 내가 원하는 시기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돼 있는 것은 아니다. 전쟁, 자연재해, 개발, 시간의 흐름 등으로 바뀌어 있기 십상이다. 현대적으로 탈바꿈한 장소에서 옛 흔적을 찾아내려면 사전 공부가 필수였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진리다.
어디를 가든 그 지역의 역사 자료를 모아 놓은 박물관은 아주 유용했다. ‘세관’, ‘우키요에’, ‘주택’, ‘선박’ 같은 특정 자료가 전시돼 있는 박물관도 열심히 찾아다녔다. 인터넷에서도 찾기 어려운 그 당시의 사진이나 실물 등의 자료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현장 취재의 가장 큰 장점은 등장인물들이 움직일 공간을 오감으로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수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무대에 모두 가 볼 수는 없었다. 중국의 하얼빈과 충칭도 가지 못한 곳들이다. 두 군데 다 우리 역사와 깊은 관계가 있는 장소로 하얼빈은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곳이며, 충칭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가 있었다. 두 곳은 주인공 수남과 강휘의 주요 무대다.
하얼빈은 1898년 러시아가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연장하는 철도 공사를 하면서부터 번성했다. 수많은 공업과 상업시설, 은행들이 세워지고 16개 나라의 영사관이 들어선 국제도시로 변모했다. 동양의 파리로 불리며 만주의 중심 도시로 성장하던 하얼빈은 1932년에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책, 논문, 인터넷 검색 등을 통해 역사나 지리에 대한 공부를 할 만큼 했지만 1930년대 말의 모습은 잘 그려지지 않았다. 소설 속 인물들이 머물렀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도 찾지 못했다. 고민 끝에 나는 그 시대 우리나라 작가들이 만주나 하얼빈을 무대로 쓴 작품을 찾아 읽었다. 당시의 모습이나 정서를 생생하게 묘사한 글을 읽는 동안 그곳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문자에 머물러 있던 자료에 숨결을 불어넣었다. 머릿속의 하얼빈이 점차 구체적이고 입체적인 공간으로 바뀌자 등장인물들도 비로소 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멋진 건물들 사이에 돌이 깔린 널찍하고 반듯한 도로가 나 있었다. 중앙로라고 했다. 그 위로 자동차와 마차와 말과 인력거가 뒤섞여 달렸고,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오갔다. 하얼빈에는 동양인뿐 아니라 브래들리 부인처럼 머리카락과 피부, 눈동자 색이 다른 사람도 많았다.
(… …)
“저기 보이는 동네는 부가전인데 중국 사람들이 많이 살아. 되놈들은 지저분하고 시끄러워. 저 동네 가면 아편굴 천지야. 저쪽 부두구는 딱 봐도 부자 동네 같지? 공원도 있고 호텔도 있고 은행도 있고, 하얼빈에서 제일 알아주는 동네야. 근데 거기 사는 쪽발이들이나 양코배기들은 우리 같은 사람 인간으로 쳐 주지도 않아.”
-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 2』, 「삶으로의 횡단」 중에서
 
┃ 백범 김구 (사진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제공받았습니다.)


하얼빈이 소설의 구상 단계에서부터 정해진 무대라면 충칭은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새롭게 등장한 곳이다. 중일전쟁의 전세에 따라 옮겨 다녔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해방을 맞이한 장소가 배경인데 그곳이 바로 충칭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하면 상하이만 생각날 뿐 솔직히 충칭은 지명조차 생소했다.
나는 우선 임시정부 상황이 자세히 기술된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와 충칭에 총사령부가 있었던 한국광복군 관련 책, 논문 들을 찾아 읽었다. 그리고 그 당시 중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을 찾아보며 전시 분위기나 사람들의 생활상을 익혔다.
충칭 장면에서는 백범 김구가 등장한다. 이번 소설에서 이광수, 최남선 등 실제 인물들을 거론했지만 구체적 역할을 맡은 경우는 티가든 대표 하기와라와 김구 선생뿐이다. 충칭이 계획에 없는 장소였던 만큼 백범의 등장도 예정에 없었다. 하지만 자료 조사를 하면서 김구 선생의 인간적인 매력에 흠뻑 빠졌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그릴 수 있었다.

수남은 감격에 찬 눈으로 충칭 시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도시의 첫인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거리는 마구잡이로 지어진 건물들로 어수선하고 지저분했으며 그늘마다 사람들이 자리를 깔고 누워 있었다. 남자들은 애고 어른이고 하나같이 웃통을 벗고 있는 데다, 시끄럽고 더럽고 공중도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뉴욕 차이나타운에 사는 중국인들은 양반이었다. 게다가 푹푹 찌는 더위와 악취 섞인 습기 때문에 가만히 서 있어도 숨이 차고 땀이 흘렀다. (… …)
경비병이 지키고 선 문 위에 쓰여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글자를 보자 수남은 조선이 벌써 독립한 것 같은 감동이 밀려왔다.
(… …)
그리 넓지 않은 집무실은 소박했다. 천장에 매달린 선풍기가 털털털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동그란 안경을 쓰고 회색 치파오를 입은 주석이 웃는 얼굴로 수남을 맞이했다. 웃을 때 얼굴 가득 주름이 잡혔다. 신문이나 잡지에 실린 사진 속에선 우락부락하고 건장한 느낌이었는데 직접 보니 순박하고 인자한 할아버지 같았다.
-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 2』, 「여기에서 거기까지」 중에서
역사소설을 쓰면서, 자료 조사나 현장 취재도 필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게 상상력임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풍부한 자료를 토대 삼아 자유로운 상상을 펼쳐놓을 때 공간과 시간, 인물과 사건은 작가인 나를 벗어나 독자적인 생명력을 가졌다. 그 뒤 필요한 것은 등장인물들을 믿는 일이었다. 수남, 채령, 강휘, 준페이, 정규, 형만, 곽 씨, 술이네, 태술…….
이번 작품은 등장인물들의 우여곡절로 가득한 인생행로를 뒤따르며 기록한 글이나 마찬가지다. 소설 속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든, 얼마만큼의 비중을 가졌든 그들은 치열하게 자신의 삶을 살았다. 그런 그들 한 명 한 명을 믿고 의지했기에 무사히 긴 여정을 마칠 수 있었다. 모두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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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 1
저자 이금이
출판 사계절
발매 2016.06.03.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 2
저자 이금이
출판 사계절
발매 2016.0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