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외 없는 원칙주의를 넘어 융통성 있는 원칙주의로

 

요즘 세상에는 만만한 사람이 없다. 저마다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저 할 소리를 한다. 잘못을 손가락질하면 되레 눈을 치켜뜨고 달려들기도 한다. 그럴듯한 이유를 둘러대면서 말이다. 사람을 끔찍하게 죽인 이들도 나름 사연이 있다. 힘겨운 어린 시절, 괴롭히고 버림받은 기억 등등. 성격이 비뚤어질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듣고 나면 어느덧 용서하고픈 마음이 샘솟을지도 모른다. 인권을 존중하는 사회라면 변명의 말도 흘려들으면 안 된다. 이럴수록 원칙은 무너지고 처벌도 흐릿해진다. 보듬어야 할 것이 너무 많으면 좀처럼 되는 것도 없다. 끝없는 말잔치 속에서 사회는 점점 침울해질 테다.

 

반면, 독재자가 다스리는 사회는 어떨까? 그들은 ‘예외 없는 원칙’을 내세운다. 규칙을 어겼다면 반드시 처벌받아야 한다. 절절한 사연을 늘어놓아도 소용없다. 사람들 얼굴에는 긴장감이 맴돌고, 사회는 기계처럼 착착 돌아간다. 그러나 인류가 독재자 밑에서 만족한 적은 없었다. 내가 행복하지 않은데 사회가 잘 돌아가면 뭐 하겠는가?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유를 꿈꾼다. 원칙은 흔들리고 사회는 또다시 불안해진다.

 

올곧은 원칙이 있으면서도 사람들이 제각각 품은 사정도 소중히 여기는 사회는 불가능할까? 유학자 신정근 교수는 이 물음의 답을 『중용』에서 찾는다. 『중용』은 ‘융통성있는 원칙주의’를 일러 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을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것으로 본다. 예컨대, 용기는 만용과 비겁의 중간이다. 그러나 동양 고전인 『중용』은 다르게 본다. 자비로움과 엄격함의 중용은 적절한 엄격함이 아니다. ‘관대하면서도 엄격하게’ 하는 것이다. 부드러울 때는 부드럽지만, 다그칠 때는 강하고 당당해야 한다는 뜻이다. 상황에 맞게 적절한 감정을 내보이고 행동하는 것이 중용이다.

 

이러한 융통성 있는 원칙주의를 세우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중용』은 특별한 훈련을 해야 한다고 하지 않는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을 진심[忠]과 관용[恕]으로 대하려고 노력하면 된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람 사이는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누어진다. 부모와 자식, 지도자와 따르는 자, 아내와 남편 ,선배와 후배, 친한 친구들. 이 다섯이 바로 오륜(五輪)이다. 이 다섯 가지 인간관계를 훌륭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누군가에게 대접받기를 원하는 것처럼 상대를 대해 주면 된다.” 아랫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으면 윗사람을 먼저 존경하도록 하라. 친구가 나를 믿고 따르게 하고 싶다면, 나부터 상대에게 마음을 열어야 한다. 이럴 때,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친밀함이 있고(父子有親), 지도자와 따르는 자 사이에는 의로움이 있으며(君臣有義), 아내와 남편 사이에는 구별이 있고(夫婦有別), 친구들 사이에는 믿음이 있는(朋友有信) 아름다운 관계가 맺어진다.

 

말은 쉽지만 실천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을 테다. 그래서 『중용』은 끊임없이 노력하라고 말한다. “주위 사람이 한 번 해서 잘하면 나는 백 번을 할 것이며, 주위 사람이 열 번 해서 잘하면 나는 천 번이라도 할 것이다.” 이런 태도로 살다 보면 나는 어느덧 좋은 사람으로 바뀌어 있을 테다.

 

또 상대를 내 마음이 원하는 대로 대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중용에 어긋나는 소인(小人)의 삶은 이해관계를 우선시하여 어려워하거나 거리끼는 것이 없다. 이익과 손해라는 잣대로만 사람을 대했다가는 갈등만 커지곤 한다. 마음을 얻으려면 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군자(君子)는 스스로 중(中)을 현실에 적용하려고 한다.” 무엇이 사회 전체에 가치 있고 바람직한지 가늠해 본다는 뜻이다.

 

이렇듯 융통성 있는 원칙주의를 세우려면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해야 한다. ‘좋은 사회를 만들고 싶으면 이렇게 하라’는 딱 부러진 답을 찾고 싶은 이들에게 『중용』은 답답하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중용을 따르는 삶에는 정답이 없다.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큰 원칙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다르게 생각하고 움직여야 한다.

 

그런데 절대적인 잣대가 없다면 혼란에 빠지기도 쉽지 않을까? 하지만 유교를 따르던 우리와 중국, 일본의 모습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신정근 교수는 유교를 받들었던 곳에서는 전쟁이나 혁명이 훨씬 적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유교에서는 힘으로 상대를 누르려 하지 않는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고 이기심을 다독여 평화를 지키는 데 힘을 쓴다. 갈등을 터뜨려 해결하기보다 다툼의 씨앗을 다스리려는 구도다.

 

에릭 홉스봄(1917~ )은 20세기를 ‘극단의 시대’라고 표현했다. 합리적인 기준을 세워 잘못을 싸잡아 고치는 것이 옳다고 여기던 시대다. 그러나 자로 재듯 잘잘못을 따질 수 있는 세상일은 별로 없다. 큰 틀에서 바람직한 방향을 바라보고, 각자의 처지를 헤아리는 노력이 필요하겠다.

 

무상급식, 두발과 복장 자율화 등 교육계에서도 뜨거운 논란이 일고 있다. 군자의 태도로 원칙과 현실을 모두 헤아리려는 노력이 필요한 요즘, 『중용』의 지혜가 더욱 빛나 보인다.

 

 

 

글 · 안광복 (중동고등학교 철학교사)

 

 

 

*이 글은 1월 3일자 『한계레』에 실린 글을 다듬어 다시 수록한 것입니다.

1318 북리뷰 2011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