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홍명희 문학제 강연 : 근대 민족문학에 있어서 『林巨正』의 위상

 
근대 민족문학에 있어서 『林巨正』의 위상

 
임형택(林熒澤) /성균관대 한문교육과 교수


1. 머리말
소설 『임꺽정』이 민족문학의 고전적 성과라는 점은 이미 합의사항에 속하는 것이다. 예전에 좌파와 우파가 사상적 으로, 문학적으로 대립하던 상황에서도 『임꺽정』에 이르러는 이구동성으로 찬사를 보냈던 터이며, 그에 대한 '금지'의 사슬이 풀려나가서 널리 읽혀지고 비평적 논의가 되 살아난 이즈음엔 『임꺽정』을 빼놓고 민족문학의 수준을 운운하기 어렵게 되었다. 지금 우리의 민족문학에 있어서 『임꺽정』의 위상을 논의하자면 그것이 산생된 시대로 일단 올라가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논리가 추상화로 흐르지 않고 역사적 구체성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임꺽정』은 1928년부터 1940년에 이르 는 기간에 창작, 발표된 것이다. 일제 식민지라는 특수 상황의 1920-30년대가 그 원위치이다. 응당 이 원위치로 돌아가 서 자리매김을 해야 할 일이다. 그 당시의 관행적 구분에 따르면 문학계는 민족문학 진영과 계급문학 진영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런데 『임꺽정』과 그 작가는 어느 편에도 소속이 되어 있지 않았다. 당시 관행적 개념의 민족문학의 범주에 속하지 않았음은, 물론 , 계급문학 으로도 파악된바 없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하여 자리매김을 할지, 하나의 쟁점으로 제기된다. 비단『임꺽 정』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고 일제시대의 문학전반에 관련이 있기도 하다. 위의 내세운 제목을 보면 '민족문학에 있어서 '가 대전제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문학사적 평가와 민족문학적 평가가 따로 있다거나 달리 따져져야할 성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직 어느 문학사를 똑바로 인식하기 위에서 , 그리고 오놀 의 우리의 입장에서 민족문학적 관점을 강조하게 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지금 논제는 『임꺽정』이 한국의 근대문학 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라는 물음 그것이다.

2. 1920년대 신문학의 발전과정에서 계급문학의 대두와 민족문학
3.1운동은 식민지 피압박 민족의 운동사에서 세계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거니와 , 문학사적 측면에서도 신문학을 불러일 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의 3.1운동은 중국 대륙에서 5.4운동을 촉발하여 신사상, 신문화 운동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우리의 경우 해방 독립 을 위한 투쟁에 민족의 역량이 사활적으로 바쳐졌던 반면, 사상. 문화의 방면에서는 눙동적 형태로 뚜렸이 전개되지 못했 다. 하지만 3.1운동의 고조된 분위기가 문화예술의 여러 분야에 이르기까지 창조적 활기를 불어넣은 것이다. 계몽기에 싹이 텄다가 식민지로 전락되면서 말살, 왜곡되었던 신문학 또한 이때 드디어 본격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학사는 2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좌파적 계급문학(당시의 용어로는 과 프롤레타리아 문학)으로 비약을 하게 된 다. 한편 계급문학의 기치에 맞서는 입장에서의 우파적 민족문학(처음에는 국민문학이란 용어를 들고 나왔으며 민족주 의 문학 혹은 민족문학으로 일컬어졌음.)이 등장하게 된다. 신문학은 근대적 시민문학의 범주이다. 이에 반해 계급문학은 액면 그대로 말하면 질적으로 구분되는 새로운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과연 그러했던가? 그 운동의 주도자들이 주관적으로 그렇게 주장했으며 종래의 문학사론 또한 어쨌건 대 개 그 주장을 수용했던 셈이다. 문학사의 논리에 따라서는 근대와 현대의 전환점으로 잡기도 하였다. 과연 그러했던가? 그들은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표방하였으나 기실 진보적 지식층의 운동이었다. 그때는 물론 오늘의 우 리현실을 들여다볼 때 한국의 역사, 한국의 문학사는 새로운 시대로 진입할 시점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요컨대 계 급문학은 신문학의 발전과정에서 , 신문학이 민족 현실을 발견하게 되면서 대두한 것이다. 식민지적 억압과 봉건적 유 제로 얽힌 민족 현실을 해결하기 위한 처방을 일단의 지식인들은 사회주의 이념에서 찾았던 바, 곧 좌파노선의 계급문 학운동이었다. 좌파가 무산계급을 위주로 한 문학을 표방하고 나오자, 이에 우파적 입장이 드러나게 되었다. '국민문학' 혹은 '민족주의 문학'이 그것이다. 근대사의 과제가 '국민국가의 수립이라고 볼 때 신문학은 응당 국민문학 =민족문학이 되어야 할 것이 다. 신문학으로 근대적 민족문학의 형식이 마련되었던 것으로 볼수 있다. 신문학의 중요한 성과라 하겠다. 하지만 민 족문학의 내용을 확실히 갖추었던가를 따져 믈을 때 답변은 모호하게 된다. 일찍이 신채호는 "강토의 전부를 주고라도 재미있는 몇줄의 신소설을 바꿈"이라고 신문학에 대해 혹독한 어조로 질타를 가하기도 했다. 신채호의 이 발언은 애정 어린 '매질'로 이해해야겠지만 , 좌파적 주장에 자극을 받아 비로소 민족문학을 표방하게 된 사실만 보더라도 신문학의 초 창기에는 민족문학적 성격이 취약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3. 대립의 통일을 위한 움직임과 『林巨正』
1) 민족문확과 계급문학의 통일 논의의 추이
한반도상에서 통일국가의 출현을 고려로부터 잡더라도 우리민족은 천년 이상을 하나의 자립적 국가공동체를 구성하여 살아왔다. 그러나 최근 50년을 분단의 상태로, 분단의 상태로 그치지 않고 상호 대립갈 등을 치열하게 벌이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이러한 남북의 대결 구도는 냉전체제가 무너지고 급속히 변화하는 세계사적 추세에 역으로 그 경직현상이 풀 리지 않고 있다. 물론 이 대결구도는 1945년 국토의 분단으로부터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사상적으로는 이미 1920 연대 에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좌파적 사상과 우파적 사상의 대립이다. 계급문학의 조직체인 '카프'가 결성된 1925년은 조선공산당이 결성된 해이기도 있다. 이에 맞서 우파가 민족주의 이념을 내세우고 전열을 가다듬게 된다. 민족사에서 엄청난 통한과 상흔을 남기고 도 언제 다시 통합과 화해가 이루어질지 아득한 모순의 발단은 이때로 부터였다할 것이다. '分者必合"은 삼국지연의의 서두에 나오는 케케묵은 소리지만 , 이 네 글자 속에는 사물의 지극한 이치가 담겨져 있다. 좌우의 분열은 동시에 좌우의 통합을 요망하게 마련이다. 좌파문학의 이론적 맹장이었던 박영희(朴英熙)는 좌익의 당면 과제는 "조선 민족을 일본의 제국주의의 굴레에서 해방"그것이며, 민족주의자의 당면과제 또한 그와 동일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 좌우의 대립상태는 말하자면 적전분열이었던 셈이다. 대립의 해소는 실로 역사적, 민족적 요망사항이었 다. 하겠다. 이에 좌우합작의 '단일협동기관'으로 신간회, 그러나 근우회의 창립을 보게 된 것이다. 1927년의 일이었다. 사회운동, 정치운동에 있어서 는 좌우의 통일이 일단 성사되었다. "1922년 전후하여 민족주의적 운동으로부터 분리하여 가지고 맹렬히 싸우고 그 운동을 파괴하고서 다시 1927년에 이르 러서 민족운동을 자수(自手)로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면 1922년까지 의 민족운동과 1927년 이래의 민족운동은 동일한 것 이냐, 아니다. 그 본질에 있어서 판이한 것이다. " ( 10년간 조선문예의 변천과정) 
박영희와 함께 카프 진영의 이론적 맹장이었던 김기진(金基鎭)의 1929년 시점의 발언이다. 신간회 이후 민족운동은 그 이전의 민족주의 운동과는 본질에 있어서 판이한 것으로 진단을 내리고 있다. 물론 좌파적 입장에서의 견해다. 어째건 '민족운동'의 이름으로 '단일협동'의 전선이 성립된 것이다. 이때 문학계는 어떻게 되었다녔던 가? 다시 또 박영희의 증 언을 들어보자.
"... 드디어 '신간회'라는 민족단일당이 결성된 것이었다. 그때 우리의 예술동맹도 이에 참가해야 할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주저하였었다. 어느 날 벽초는 일부러 우리를 찾아와서 참가하기를 역설하여 나와 다른 사람들도 다 입회를 하고 말았었 다. 이로부터 조선의 정치운동의 방향은 새로운 단일적인 것, 거국적 통합운동으로 기울어진 것이었다. 이에 따라 문단 에서도 분열되어 있을 필요가 않으며, 넓은 의미의 민족주의로 합동 매진하자는 의견이 싹나기 시작하였었다. " (초창기의 문단 측면사) 
예술동맹(카프)의 문인들이 벽초 홍명희의 설득으로 신간회에 참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홍명희가 신낙회운동의 실질 적인 주도자였다는 것은 두루 알려진 사실이지만 , 문학쪽도 응당 '민족주의로 합동'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그러한 방향 에서 힘껏 노력하였음을 또한 알수 있다. 그런데 과연 '넓은 의미의 민족주의로 합동 매진'이 되었던가? 어찌된 영문인지 문학계의 실제 상황은 '합동 매진'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 사이의 정황을 대략 살펴보자, 좌우문학의 통합을 먼저 제안한 것은 김동환(金東換)이었다. 그 카프 진영이 계급주의에 집착하여 미적거리고 있을 때 선수를 친 것 이다. 카프진영은 김동환을 제명처분하는 조처를 내렸다. 그 즈음 양주동(梁柱東)은 문예공론(文藝公論)이란 매체를 만 들어 가지고 "민족문확과 사회문학이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이라고 보고 호상 배격하는 자류(者流)는 소위 종파주의의 여독(餘毒)이다. "고 기염을 토하며, "우리의 문학은 민족적인 동시에 무산계급적이어야 한다. "는 주장을 편다. 문학사 에서 절충파 논리로 규정된 것이다. (절충론으로 이름 붙여진만큼 큰 의미를 부여받지 못하고 있다. 신간회 이후 민족 운동으로 통합되는 동향을 반영한 것이라는 측면에서 그에 대한 재평가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본다. )카프 진영은 결국 또 선수를 빼앗긴 셈이다. 이에 민족주의 문학으로의 대승적 통합론을 카프 진영은 끝내 수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공박을 하 고 나섰다. 여기서 논전의 선봉장은 역시 김기진과 박영희였다. "이 논전은 서로 지지 않으려는 지력(智力)의 싸움이었 을뿐, 문학적 창조에 기여한 바는 심히적었다. )고 박영희는 후일에 자평(自評)을 한 바 있다. 지적인 '우김질'에 지나지 못했던 것이라고 스스로 치부한 것이다. 이처럼 문단은 신간회의 취지에 준하는 통일을 안타까웠어내지 못한채 30년대로 넘어섰다. 이 상황에서 신간회도 조직 체로 서 있기 어려웠는데, 1931년 '해소'라는 이름으로 그 스스로 종말을 내렸다. 좌파문학의 조직체 또한 붕괴되기에 이 른다. 정치성을 표방한 운동은 일체 불가능하게 된 것이 30년대의 상황이다. 이 엄혹한 분위기 속에서 학술 운동 및 문 예쪽으로 진전하게 된다. 신간회게 자절한 위에서 '조선학'이 발흥했거니와 , 이 기간에 문예의 창조가 다채롭고 훌륭했 음은 여러 작품들이 증언하는 바이다. 
박영희가 민족문학으로의 통일을 둘러싼 논전이 "문학적 창조에 기여한 바는 심히 적었다."고 본 것은 일면적 관찰로 여 겨진다. 논전 자체만으로 보면 그렇게 말할수 있다. 그러나 좌우대립의 통일을 시대현실이 근원적으로 요구하였던 터 이므로, 창작적 실천에서 계급문학과 민족문학의 대립을 지양하여 민족문한으로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2) 『林巨正』의 작가의식
『임꺽정』의 창출을 그 작가의 개인사에 비추어 대략 살펴보기로 한다. 홍명희(1988- 1967)는 최남선(1890-1957)과 이광수(1892-1950)와 나란히 신문학 제1세대에 속한다. 최남선보다는 2살, 이광수보다는 4살 위였다. 이들 3인은 구한만 계몽기에 우연히 함께 동결 유학알 하였다. '조선의 3천재'라는 명성은 그 시절 연유했던 것으로 전한다. 이 광수의 회상기에 의하면 "그 (홍명희)는 문학적 식격에 있어서나 독서에 있어서나 나보다는 엎섰다고 생각합니다. "고 하였거니와 , 최남선과 이광수를 연결시키고 이광수로 하여금 소년지에 글을 발표하 도록 주선한 것도 홍명희였다. 홍명희는 신문학 1세대일 뿐 아니라, 거기서 선배격으로 놀았다. 그럼에도 최남선이 소년을 창간하여 이 땅에 신문화 를 전파하는 등 활약이 눈부실 때 그는 기껏 평론 1편과 몇 편의 한시를 발표하는 데 그쳤으며, 이 광수가 (無情)을 발표 하여 신문학의 기치를 들고 명성을 날릴 때 , 그는 南洋(싱가포르)가 방황하고 있었다. 이후 신문학이 본격적으로 성립한 단계는 제2세대의 몫이었다. 이 시기에 그는 자기의 고향 괴산에서 만세운동을 주동 하여 옥고를 치르고 나왔으며, 문필활동으로는 서구의 단편소설몇 편을 번역한 정도였다. 신문학이 계급문학으로 비약 한 단계는 제3세대의 몫이었던 바, 이 단계를 지나서야 그는 창작의 붓을 본격적으로 들었다. "쓴다 쓴다 하고 질감스럽 게 쓰지 않고 끌어오던 이야기를 지금부터 쓰기 시작합니다. "이 얼핏 너스레처럼 들리는 말을 작가가 굳이 『임꺽정』 에 신문연재를 착수하였다. 30년대 일제 군국주의의 날로 가중한 압박을 체감하면서 침거해서 혼신의 정력을 『임꺽정』 창작에 바쳤다. 그러다가 군국주의의 막장에 다다라서는 부득이 붓을 꺾고 말았다. 『임꺽정』이 미완성의 거작이 된 소이연이다. 홍명희의 전생애에서 정치활동으로 신간회, 문학창작으로 『임꺽정』은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이 양자는 시간적으로 맞물려있다. 동일 주체의 정치적 측면과 문학적 측면은 서로 무관한 것이었을까?아무래도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신간 회 활동과 『임꺽정』의 집픽은 주체의 내면에서의 의식은 다르지 않고 하나인데, 요는 실천형식을 달리했을 뿐이다.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할 사실이 있다. 문예운동이란 잡지 1926년 1월호에 그는 신흥문예의 운동이란 평론을 발표한다. 그가 최초로 자신의 문학에 대한 견해를 이론적으로 표명한 글로서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현단계의 신흥문예로 규정하고, 이 신흥문예가 조선에 있어서는 헤게모니는 잡을 것으로 전망하는 내용이다. 문예운동은 바로 전해에 결성된 카프의 기 관지적 성격을 가진것이었다. 이 글은 그 창간호의 권두평론으로 실렸던 만큼 카프의 이론적 대변으로 간주할 수 있겠 다. 이 시점에서 홍명희는 계급문학의 입장에 서 있었다. 그런데 소설『임꺽정』은 계급문학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1927년 카프 진영이 정치투쟁으로 방향전환을 하고 있던 바, 그 방향과는 더욱더 상반되었다. 1926년 1월 신흥문예의 운동에서 들었던 이론적 기치와 1928년 11월에 착수한 소설 『임꺽정』양자 사이의 문학적 거 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그 중간에 신간회운동이 놓여 있다. 그는 밝히기를 "신간회의 나갈 길을 민족운동만으로 보 면 가장 왼편길이나 사회주의 운동까지 겸(兼)하여 생각하면 중간 길이 될 것이다. "고 하였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을 지양하는 '중간길'을 그는 모색한 것이다. 이 신간회운동으로 홍명희가 진보적 작가그룹을 끌어들이려 했던 사실을 앞서 주목했었다. 그는 신간회노선을 문예운동 에 까지 관철시키혀 했던 것이다. 그의 노력은 우위로 돌아갔다. 하지만 창작적 실천헤서는 사정이 달랐으니, 어느 무 엇보다 『임꺽정』이 뚜렷한 증거품이다. 계몽적 애국주의로 출발한 홍명희는 신문학이 본격적으로 성립해서 계급문학으로 비약했던 전과정을 중심부에서 서서 지켜보며 울분과 역량을 쌓고 기다리다가 마침내 국화가 늦가을에 꽃을 피우듯 토해낸 것이다. 애국계몽기로부터 계급문 학에 이르는 신문학을 전체로 아우르고 뛰어넘는 데서 『임꺽정』이 출현하였다.

4. 맺음말
신문학으로 출범한 우리 근대문학의 기본과제는 민족문학의 수립에 있었다 할 것이다. 근대적 형식 속에 근대적 생활 과 정신을 담아야 할 것임은 물론 이다. 그 내용은 자유와 평 등을 실현하는 인간다운 삶의 모색으로 요약되는 바, 당시 현실의 특수성에 비추어 민족해방이라는 문제가 그 중심에 놓일 수 밖에 없었다. 
신문학은 애국계몽문학으로 발아해서 3.1운동의 고앙된 정신을 배경으로 성립할 수 있었다. 이 단계에서 근대적 형식은 일단 갖추었다고 하겠으나 그 내용을 따져보면 부실한 상태였다. 민족적 내용, 사회적 의미를 확충하지 못한 것이다. 계급문학의 단계에 이르러서 신문학은 사회적 의미, 현실내용을 획득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계급문학은 민족문학 에 대척적으로 개념화됨으로써 민족의 생활교양이 용해된, 피가 흐르고 정감이 살아움직이는 문학형상을 그려내지 못했 다. 계급문학에 대립하여 존립한 민족문학 또한 민족성원 대다수의 현실과 유리된 채 추상적, 회고적으로 흘렀다. 민족 문학과 계급문학의 대립을 통일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민족문학의 수립을 기대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진정한 민족문학은 『임꺽정』으로부터 다. 그것은 좌우의 사상적, 문학적 모순대립을 민족적 차 원에서 수렴함으로써 이룩해낼수 있었다. 때문에 『임꺽정』의 문학적 성격은 '현실주의 민족문학'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한편 『임꺽정』은 역사소설에 속한다. 역사를 테마로 한 문예의 형태는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범람해서 우리의 눈을 현혹시키고 있다. 역사성을 제대로 인식한 기초에서 문학적 형상으로 탁월하게, 풍부하게 엮어낸 것이 『임꺽 정』이다. 이 측면에서 보면 『임꺽정』으로 우리의 근대 역사소설이 확립된 것이다. 유물사관의 이론을 그 자신이 소 화했기 때문에 가능한일 이었다. 『임꺽정』은 우리 근대 민족문학에 있어서 이정표가 되었다. 그렇다고 『임꺽정』이 홀로 높은 것은 아니다. 한국문 학사는 20년대 말로부터 30년대에 훌륭한 성과들이 출현하여 『임꺽정』의 좌우에 배치될 수 있게 되었다. 그 오른편으 로 염상섭, 채만식, 이태준, 박태원, 왼편으로 이기영, 한설야, 김난천 등등, 염상섭을 두고 말하면 계급문학에 맞서 싸우던 우파의 이론가였다. 그의 삼대는 계급문학의 이론을 싸우면서 섭취했기 때문에 그만큼 빼어난 현실성.문학성을 성취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