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바꾸는 정치 공부] 5강 - 자유를 위해 권력을 없애면 좋을까

자유란 무엇일까요? 금방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은 '어떤 것에도 구속당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정치를 둘러싼 논의에서는 대개 무엇인가를 강제로 하게 하는 '권력'과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를 대립적인 것으로 파악하곤 하지요.
 
20세기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비롯해 크고 작은 전쟁과 억압적인 통치를 경험한 우리는 '정치=권력=폭력'이라는 생각을 자연스레 익혔습니다. 그래서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권력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생각하곤 하죠. 그러나 최저한도의 생활, 즉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권력의 작용이 필수적입니다. 사람들의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정부가 어떤 제도를 만들거나 재정을 투입하지 않으면 생존권은 실현될 수 없습니다. 즉 여기서는 권력의 적극적인 작용이 필요합니다. 자유 대 권력, 자유 대 정치의 구도가 아니라 자유를 위한 권력, 자유를 위한 정치라는 구도가 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자유라는 개념을 발전시켜온 곳은 유럽입니다. 그들의 전통에서 자유인이란 노예가 아닌 자, 즉 타인에게 속박당하지 않는 자, 그중에서도 경제적으로 자립한 인간이었습니다. 단순히 급여가 많다는 뜻이 아니라, 재산이 있어서 일하지 않아도 되거나 타인을 고용해서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유층 자제나 일정 수준 이상의 수입을 거두는 자영업자가 아니고서는 이런 조건을 만족시킬 수 없는 현대 사회에서는 더 이상 이런 식으로 자유인 혹은 자립한 인간을 정의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현대사회에서 '자립한 시민'을 상정한 논의로 '시민사회론'이 있습니다. 시민사회는 '정치=권력'의 영역인 국가와도, 경제의 영역인 시장과도 구별되는 것으로 정의됩니다. 강제적 성격이 있는 국가나 시장과 달리, 자원봉사 단체나 비영리조직처럼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참가하는 영역이라고 여겨집니다. 시민사회론은 현대사회에서 국가가 비대화되거나 시장이 폭주하는 것에 대항해 제3의 영역을 끄집어내어 견제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시민사회론은 국가에 대한 비판은 강한 반면, 시장에 대한 비판은 소홀한 경우가 많습니다. 국가의 강제성은 쉽게 눈에 띄는 데 반해, 시장에서의 교환은 일견 자발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관료의 권한을 축소시켜라, 정부가 하던 일을 시민사회에 위임하라는 요구로 정부의 손을 떠난 일들의 대부분이 실제로는 시민사회가 아니라 시장에 위임되는 결과를 맞았습니다. 시민들의 최소한의 삶을 보장하던 국가의 역할이 시장으로 넘어가면서 많은 이들의 삶이 무너져버린 것입니다. 자립한 시민들이 권력을 견제하려던 움직임이 결과적으로는 그 시민들이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위협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유라는 명목으로 권력을 무조건 배제할 게 아니라 권력의 생산적이고 적극적인 측면도 고려해야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권력이 자유를 가능하게 해주는 측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해서도 안 되겠죠. 만약 자유를 그와 같이 파악한다면, 자유가 평등과 거의 같은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자유에는 평등이나 연대와 관련된 이른바 구심적인 측면, 즉 중심을 향해 서로를 엮어주는 측면이 있고, 동시에 그 이상으로 원심적인 측면, 즉 사람들을 떼어놓으려는 측면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유를 생각할 때는 반드시 저항으로서의 자유라는 요소도 무시할 수 없지 않을까요?
 
저항으로서의 자유는 현재 유지되고 있는 질서나 사회의 존재 방식에 위화감을 느끼고, 무엇인가 조금이라도 다른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거기서 출발해 뭔가를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는 것이 모든 변화의 첫걸음입니다. _ <정치는 뉴스가 아니라 삶이다> 126쪽
 
그런데 이런 변화를 위한 모든 시도는 좀처럼 변하지 않는 '벽'을 만나게 됩니다. 기존의 질서나 체제를 유지하려는 견고한 벽. 이 벽은 나와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나 역시 이미 이 체제 안에 있기 때문이 이 벽을 지탱하는 일부입니다. 그러므로 변화를 위해서는 자신의 어떤 부분을 부정해야 합니다. 자기가 무너뜨리려 하는 벽이 실은 자기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대표인 정부에 항의하는 행동은 이른바 자기 내부의 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서로 부딪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정부에 대한 항의는 잡음에 불과하고, 선거로 뽑은 정부의 결정을 무조건 지지하고 동의해야 한다는 생각은 정치의 폐쇄로 이어질 것입니다.
 
 
 
 
 
<정치는 뉴스가 아니라 삶이다>의 저자 스기타 아쓰시 교수는 '미완의 자유'라는 개념을 제안합니다.
 
자유로운 상태를 실현한다는 생각과 자유를 유지한다는 생각 사이에는 일종의 긴장 관계가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정말로 자유로운 상태가 실현되면 저항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이므로 그에 대한 저항은 자유를 줄어들게 합니다. (중략) 궁극의 자유로운 상태가 있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다고 가정해버리면, 실은 자유의 가장 소중한 부분을 잃게 되지 않을까요?
 
자유는 완전한 의미에서는 결코 실현할 수 없습니다. 우선은 그것을 인정하는 편이 좋습니다. 완전히 실현할 수 없다면 자유에 의미가 없을까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자유를 추구하는 것 자체에 자유의 중요한 본질이 있습니다. 자유는 지금 이 순간 실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자유의 필요성을 부정할 때 정치도 소멸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_ <정치는 뉴스가 아니라 삶이다> 1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