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살의 털은 무겁다 : 이혜연

2011 1318독후활동대회 글쓰기 부문 장려상
부산 국제고등학교 1학년 이혜연

 

단발령. 1895년, 일본의 강요로 조선의 백성들이 길게 길러 온 상투 머리를 잘라야 했던 사건. 백성들은 ‘신체발부수지부모’를 외치며 친일파인 김홍집 내각의 단발령에 저항했다. 이발사들은 가위를 들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긴 머리를 싹둑싹둑 잘라 냈다. 명성 황후 시해에 이은 무차별적인 일제의 횡포에 백성들은 분노했다. 표면적으로, 그들이 자른 것은 조선인의 긴 머리였으나 짓밟힌 것은 조선의 유교적 전통과 굳센 자존심이었다. 그것은 결코 단발령의 파급 효과가 아니라 일제의 본래 의도였다. 결국 을미의병의 원인이 된 단발령.

이제 한반도는 조선인 대신 한국인이 사는 장소가 되었으며, 한국은 어엿한 독립국이다. 한반도 위의 인간인 이상, 누구나 헌법에 의해 신체의 자유를 보장받게 되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중고등학생들의 머리가 조선인들의 그것처럼 스스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잘려 나가고 있는 것은.

『열일곱 살의 털』을 읽기 전부터 나는 한국의 중고등학교가 어째서 단발령이라는 구시대적 유물을 그대로 보존해 오고 있는 것인지 항상 궁금했다. 중고등학교의 두발 규정은 단발령과 신기할 정도로 닮아 있다. 일제 강점기 길거리에 체두관이 있었다면 현재의 중고등학교 교문에는 바리캉을 든 학생부장 선생님이 버티고 있다. 단발령의 목적이 표면상으로 드러나는 조선의 개화가 아닌 그만큼 두발 규정의 목적도 학생의 단정한 외양 지향에서 그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두 규정 모두 본인의 의지에 반해 신체의 일부를 절단함으로써 무의식 중 규율의 무서움과 조직의 힘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다분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다면 『열일곱 살의 털』 속 송일호는 일제 강점기의 독립투사와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송일호는 일제 강점기에 단발령의 시행에 앞장서 길 가던 사람들의 머리를 자르는 체두관 출신으로 일본에서 이발 기술을 배워 한국 최초의 이발사로 일했던 고조할아버지로부터 삼대째 이발소를 하고 있는 이발사 가문의 아들이다. 단 한 명의 예외가 바로 그의 아버지로, 일호가 생긴 후 홀연히 사라지는 바람에 일호는 한 번도 자신의 아버지를 본 적이 없다. 한편 일호는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할아버지께 머리를 박박 깎이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입학 후 학생부장 선생님 오광두를 비롯해 많은 선생들의 눈에 들게 된다. 그렇게 한창 자유를 부르짖을 시기에 매일 아침 머리를 검열당하는 같은 학년 친구들에게 일호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된다. 그럴 생각이 없었음에도 얼떨결에 선생들의 총애를 받게 된 일호는 자신의 신념과는 상관없이 두발 규정을 가장 잘 지킨 학생이 되자 스스로 너무 물컹하다는 생각에 시달린다. 그러던 어느 날 두발 규정에 어긋나는 머리를 한 아이의 머리에 체육 선생이 라이터를 갖다 대는 것을 보고 체육 선생의 손목을 잡으며 저항하게 된다. 일호는 사건이 마무리된 후에도 체육 선생에게 사과하라는 오광두의 압박에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오히려 체육 선생이 머리가 그을릴 뻔한 아이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태도를 고수한다. 어쩌다 생일 선물로 친구에게 두 개비 받았던 담배가 적발되고, 체육 선생의 화를 돋운 일호는 벌을 받다가 친구들을 모아 두발 규제 반대 시위를 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런데 일이 잘못되어 시위를 해 보기도 전에 일호와 친구들은 오광두를 비롯한 선생들에게 잡히고 만다. 시위 시도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에 선생들은 이번에야말로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일호와 그 친구들의 부모님을 학교로 부르는데 하필 이 시점에 일호의 아버지가 기나긴 여행에서 돌아왔다. 아버지에게 나쁜 첫인상을 남기게 될 것이라는 일호의 걱정이 무색하게, 아버지는 외려 일호 편을 들며 상담실에서 반성을 시키느니 학교에 보내지 않겠다는 선언까지 한다. 동지가 되어 준 아버지와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기도 잠시, 곧 학교에서 일호에게 한 달 정학 처분을 내린다. 일호는 정학 처분에 따라 집에 머물면서도 두발 규제에 반대하는 피켓 시위를 한다. 학생들의 말 없는 지지에 힘을 얻어 선생들의 협박과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되던 일호의 일인 시위는 그러나 재개발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확인받지 못하고 돌아오던 할아버지의 목격으로 중단된다. 일호의 시위는 어느 틈엔가 오랫동안 집을 비운 아버지에 대한 할아버지의 분노로까지 연결된다.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갈등이 마무리될 무렵 할아버지는 일호와 아버지를 모두 이끌고 학교로 향해 오광두에 의해 머리를 밀린 아이들을 제대로 이발해 주겠다는 제안을 한다. 일호는 일방적으로 부여된 이 비양심적인 면죄부에 죄책감을 느끼지만 일단 할아버지의 제안을 따르는데, 곧 할아버지의 제안이 새로운 형태의 시위임을 알게 된다. 할아버지가 학생들의 깎인 머리를 별 모양으로 다듬어 준 것이다. 곧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교장이 들이닥쳐 할아버지를 제지하자 할아버지는 가장 처음으로 별 모양 머리를 부탁했던 학생, 그러니까 후에 밝혀진 바로는 교장의 과거 이야기를 하며 교장의 마음을 누그러뜨린다. 그 사건 이후, 일호의 피켓 시위는 사흘 뒤 끝이 났다. 두발 규제 완화 또는 폐지를 논의하는 학교운영위원회가 소집되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도 별 사건을 벌인 후 적극적으로 재개발을 반대하는 운동에 나서고, 아버지는 엄마와 다시 연애하고 결혼하겠다며 관계 회복을 향한 의지를 다진다. 

책을 읽는 동안, 일제 탄압에 저항하는 독립투사를 응원하는 기분으로 일호를 지켜보며 『열일곱 살의 털』이 두발 규제뿐 아니라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열일곱 살의 털』은 이발소 집 자식으로서 두발 규제에 반대하는 일호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는 만큼, 머리카락이 이야기가 흘러가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일호에게 머리카락, 정확히 말하면 이발은 소년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아버지와 벌이는 전쟁의 일환이었던 것 같다. 일호는 제 취향에 맞지 않는 머리 모양을 요구하는 아버지, 그러나 결국 아들에게 지고 쓸쓸한 패잔병 같은 모습으로 오래된 머리 모양을 홀로 지킬 아버지가 없었기에 직접 가위를 든 할아버지에게는 저항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니니까. 맞서 싸울 대상이 아닌 것이다. 이미 할아버지는 너무나 견고하고 싸움이 무의미한 존재인 것이다. 

전복할 부성애가 없다는 것은 얼마나 큰 상실감일까? 머리를 깎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일호의 생각을 들여다보며, 우리 아빠의 딸인 내가 아빠와 충돌하면서 얼마나 큰 부성애를 누리고 있었나 생각했다. 내가 짧은 치마를 입거나, 실용적이기보다는 탐미적이고 값비싼 물건을 탐낼 때마다 간섭하는 아빠는 자신이 옳다고 믿고 옳다고 경험한 것을 내게 가르쳐 주려 한 것이었다. 머리가 커 가면서, 그런 싸움에서 내가 이기는 횟수가 늘어날 때마다 아빠는 오래 입을 수 있는 청바지와 싸고 질 좋은 물건들 앞에서 뭔가를 잃고 쓸쓸해하는 패잔병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빠와의 모든 싸움이 내게는 나름대로 큰 마음고생이었지만 그런 마음고생을 할 자리 자체가 애초부터 결락이었던 일호는 대체 얼마만큼을 잃은 것인지 짐작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그것이 일호를 더 용기 있고 덜 비겁하게 만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세상을 오래 산 어른들일수록, 특히 ‘아버지’, ‘어머니’라는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사회에서 치열하게 몸부림친 어른들일수록 세상에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더 많고 설사 문제를 해결한다 해도 그 방법은 정정당당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게 마련이다. 그들은 더 편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자녀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므로 나처럼 부모님의 그늘 아래서 자란 사람들은 불의를 보고도 적당히 보아 넘기는 방법을 일찍이 익히게 된다. 뒤늦게 돌아온 일호의 아버지가 일호의 편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아버지’가 되기 위해 몸부림치며 아등바등 산 적이 없기 때문이리라. ‘어머니’가 되기 위해 하찮은 일에도 애를 썼던 일호의 어머니가 일호를 꾸짖는 이유는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더욱 속물이어서가 아니라, 어차피 질 싸움은 시작하지 않는 게 낫다는 속물적 진리에 이미 물들어 버린 탓일 것이다. 

일호의 말마따나 힘세고도 불공정한 세상에 굴복해 버린 어른들이 말하는 ‘노력’이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의 안위까지 버릴 수 있는 노력이 아니라, 사회가 인정하는 잣대로 스스로를 재단하려는 시도이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여하튼 평범한 자식들은 이렇게 적당한 보수성을 익히며 안전을 배우는 것이다. 하지만 일호는 아버지 없이 살아온 그만큼 남들보다 더 순수하다. 일제의 단발령처럼 차라리 일종의 폭력에 가까운 두발 규제에 저항하면서도 “머리칼은 네 자신을 나타내는 징표다. 머리칼을 함부로 다루는 것은 네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과 같다.”는 이발사 할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릴 만큼, 일호는 함부로 분노하지 않고 생각이 깊다. 소극적 반항의 표시로 두발 규제에 개인적으로 불복하는 많은 친구들과 달리 일호는 정정당당한 시위를 택한다. 그만큼 두발 규제가 정당하지 못하다는 신념에 스스로 당당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올바른 신념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설사 그것이 사회가 금지한 것이라고 해도 자신감 있게 주장할 수 있는 용기. 일호가 가진 유일한 무기인 그것은 결국 일호를 이기도록 했고, 읽는 내내 세상에 대한 내 태도를 반성하게 했다.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두발 규제는 단발령과 비슷한 점이 아주 많은데, 두발 규제를 반대한 일호가 단발령을 맨 앞에서 주도했던 체두관의 후손이라는 아이러니는 그런 점에서 무척 흥미로웠다. 이뿐 아니라 머리털에 관한 아이러니는 책 전반에서 흔하게 나타난다. 긴 머리에 대한 일호의 욕망을 무시하고 무자비한 가위질을 하던 할아버지가 두발 규제 반대의 정당성을 교장에게 입증시키는 일등 공신이 되는가 하면, 일호는 두발 자유화가 이루어져도 짧은 머리를 더 편하게 여긴다. 나는 이것을 순진한 사람들이 자신의 순수를 지키기 위해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 가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이를테면 일호 할아버지는 순진하게도 정부가 하는 일은 무엇이든 옳다고 믿었지만 정부에 대한 자신의 순수한 믿음을 확인받지 못하자 재개발을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하게 된다. 규칙의 존재가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이끈다고 굳게 믿었던 할아버지는, 그 규칙을 더 이상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지혜롭고 용감한 방법으로 올바름을 향해 규칙에 저항한다. 적당히, 대충 넘어가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친다. 할아버지는 남자아이들이 머리를 짧게 깎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머리털과 그 주인인 인간이 맺고 있는 유기적인 관계의 일환으로서의 해석이다. 단지 보기에 단정하고 생활하는 데 편리하다는 별 뜻 없는 구실로 학생들의 기를 죽이고자 교문 앞에 서서 바리캉으로 머리에 고속도로를 내는 일과는 그 뿌리가 다른 것이다. 

빈번한 아이러니들은 이렇게 나타나 우리 사회에 팽배한 결과만능주의적 사고가 불러온 맹점을 콕콕 찌른다. 잘 살펴보면 같은 결과를 가져오더라도 그 시작점이 너무나 다른 두 일은 결국 충돌한다. 이런 예 중 또 다른 것이 이발소 집 아들인 일호가 짧은 머리를 더 좋아하면서도 두발 규제 반대 시위를 하는 것이다. 체육 선생은 아이들이 머리를 깎아야 이발소 매상을 올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으니 그만 규제에 항복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일호와 일호의 할아버지가 원하는 결과는 이발소의 매상 증가가 맞을지언정 학생들이 짧은 머리를 좋아해서 이발소를 찾는 것과 두발 규제라는 이름의 폭력에 신 나게 두드려 맞은 학생들이 눈물겨운 패배를 인정하려 이발소를 찾는 것은 너무나 완전히 다르다. 일호가 두발 규제를 옹호할 수 없는 이유는 두발 규제가 비단 두발 규제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교칙을 위반했다고 인권을 짓밟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성인이 아니라고 해서 인간 대접을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일호는 어른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 같다. 이것이 어차피 기르지 않을 머리털 때문에 왜 그렇게 애쓰는 것이냐는 비아냥거림에 일호가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 이유이다. 머리를 기르고 싶은 욕구가 아닌, 자신과 주변인들의 빼앗긴 인간성을 되찾고자 하는 노력에서 기인한 신념이 일호를 시위로까지 이끈 것이다. 

단발령과 두발 규제는 무척 비슷하다. 전혀 나쁜 의도 없이 나쁜 편에 발에 담근 일호의 체두관 출신 고조할아버지와 이발사 할아버지, 무식하게 모든 것을 짓밟는 일본 순사와 체육 선생,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세상에 맞서 싸울 용기는 없는 친일파 조선인들과 오광두, 그리고 독립투사와 송일호는 정말 똑 닮았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단 하나, 현대의 일본인들은 모두 조선인이었던 적이 있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강요하는 부조리한 규율들에게는 쉽사리 정당성이 부여되고, 조선인들의 저항은 한때 조선인이었던 일본인들이 아는 것이 더 많다는 이유로 정당히 묵살된다. 독립 운동은 어렵다. 왜냐하면 일본인이 일본인의 형태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조선인들은 일본인에 대한 일말의 존경심과 옳은 길을 향한 신념 사이에서 갈등한다. 단발령은 마치 조선인에 대한 일본인의 배려처럼 보여서, 함부로 그것에 반발하다간 애국지사 소리는커녕 덜 되어 먹은 놈이라고 욕이나 잔뜩 먹는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히, 단발령은, 그리고 두발 규제는, 부당하다. 

누구나 그렇듯이, 열일곱 살도 털이 있다. 열일곱 살의 털도 자란다. 누구나 그렇듯이, 열일곱 살도 긴 털을 좋아할 수 있다. 머리를 짧게 자르는 것이 어쩌면 공부에 도움이 되거나 단정한 생활 태도를 기르는 데 일조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이 뭐 어떻단 말인가? 어떤 이유도 긴 털을 더 좋아하는 열일곱 살에게 짧은 털을 강요할 수 없다. 인간성과 개성은 효율성이나 편리함 이면에 있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며 묵인되어 왔던 두발 규제, 정당하고 올바른 것으로 여겨지기까지 했던 두발 규제가 실은 구시대적 폭력 행위임을, 책 속의 털은 시사한다. 

『열일곱 살의 털』 속의 ‘털’은 대학 입시와 선생님에 대한 강요된 존경 앞에 설 곳 없는 청소년들이 얼마만큼의 탄압을 감내하고 있는지 똑똑히 보여 주는 지표임과 동시에 한국 최고의 이발사라는 묵직한 꿈을 가졌던 할아버지의 가장 깊고 견고한 신념이다. 또한 일호에게 아버지의 부재를 뼈저리게 알려 주는 존재일 뿐 아니라 앞으로 털 하나 간수할 권리도 주지 않는 이 부조리한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희망까지 담고 있다. 그래서 『열일곱 살의 털』은 한 올 한 올이 무겁고도 소중하다. 자르고 싶은 생각이 들기 전까지는 잘리면 안 될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