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인터뷰] <용맹호> 권윤덕 작가

 
<용맹호>
권윤덕 작가 인터뷰



“작가님은 왜 아픈 이야기를 하나요?”
 
아픔을 담는 작가, 권윤덕
 
권윤덕 작가는 종종 왜 아픈 이야기를 하냐는 질문을 받곤 합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야기에서부터 제주 4․3사건, 5․18 민주화운동, 그리고 베트남전쟁. 현대사의 비극을 작품에 담으면서 권윤덕 작가는 십여 년이 넘는 세월을 보내 왔습니다. 그림책 작가로서 이례적인 이력이기도 하고, 독자들의 질문도 응당 이해가 됩니다. 『꽃할머니』로 참여했던 한․중․일 평화그림책 프로젝트가 마무리되고 나서도, 그는 꼿꼿이 평화그림책 작업을 이어 왔습니다. 작가를 이처럼 움직이게 하는 힘은 무얼까, 『용맹호』 출간을 계기로 그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습니다.
 
 

『용맹호』 가 출간되었어요. 베트남전쟁을 다룬 작품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말씀은 십여 년 전부터 작가님께 들었던 기억이 나요. 왜 베트남전쟁이었나요?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일어난다. 꽃할머니가 겪은 아픔은 베트남에서도 보스니아에서도 이어졌다. 그리고 지금 콩고에서도 이라크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다.”
2010년에 출간한 그림책 『꽃할머니』의 마지막 글귀입니다. 같은 쪽의 그림은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이라크와 베트남 여성의 모습이에요. 그 작품을 하면서 일본군 ‘위안부’의 아픔에 공감했던 일본 여성들, 세계 여성들의 활동을 알게 되었어요. 특히 2000년 도쿄에서 열린 시민 법정 자료를 읽으면서, 한국이 베트남전에서 행한 잘못에 대해 가해국 국민으로서 무언가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 책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군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2011년, 마침 안양의 ‘보충 대리공간 스톤앤워터’라는 단체에서 제안이 왔습니다. 베트남에서 한 달 동안 머물 수 있는 아시아 작가 교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해 보지 않겠냐는 것이었어요. 반가웠고, 그래서 곧바로 응했지요. 어릴 때 마주치던, 쇠갈고리 손 상이군인에게서 어렴풋이 느꼈던 베트남.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 상사’ 노래. 대학교 1학년 공부 모임에서 읽은 통킹만 사건의 진상, 그리고 『꽃할머니』를 준비하면서 찾아보았던 베트남 밀라이마을의 성폭력 피해자 사진들.... 이런 기억들과 함께 그해 7월 20일, 그림 도구를 싸 들고 베트남으로 향했어요. 그렇게 시작했던 작업을 10년이 지나서야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2010년 『꽃할머니』가 출간되었고, 2021년 『용맹호』가 나왔습니다. 비로소 『꽃할머니』를 완성한 마음이 든다고 하셨어요. 이 마음에 대해 이야기해 주세요.
 
베트남 호치민시 키롱 갤러리에서 한 달을 체류했습니다. 베트남 화가들의 교류 모임에 참석하고, 박물관과 미술관을 관람하고, 메콩강 하류를 여행했어요. 한국군이 참전했던 중부지역은 기회가 닿지 않았는데, 몇 년 후 이규태 선생께서 이끄는 역사탐방 프로그램을 통해 비로소 현장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호치민에서 돌아와서는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한국 군인들과 피해를 입은 베트남 사람들의 증언 기록들을 찾아 읽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위치와 베트남 민간인 학살, 여성 성폭력 가해자의 위치는 매우 달랐어요. 피해자와 함께하는 일은 커다란 아픔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에게 사과와 반성을 요구하고, 인권을 주창하는 위치여서 마음의 짐은 무겁지 않았지요. 그러나 가해자와 한편에 있다는 죄책감은 ‘우리나라’ ‘우리 사회’ ‘나’로 연결되면서 큰 무게로 내 어깨를 짓누르는 것이었어요. 증언 속의 사건들에 감정 이입이 되면서 환각이 일어났어요. 밥을 먹으면 밥숟가락에서 피 냄새가 나는 것 같고 목구멍으로 울컥울컥 핏덩이가 올라오는 것 같았지요. 결국은 시작한 작업을 덮어 두고 말았습니다.
“베트남전 이야기로 그림책으로 만든다고? 나는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어. 아직 때가 아니야!” 마음속에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미루었어요. 지금 되돌아 생각해 보면 2016년 『나무 도장』과 2019년 『씩스틴』은 나에게 남겨진 숙제를 풀어내는 데 필요한 작업이고 시간이었어요. 가해자는 어떻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수 있을까? 피해자의 피해 사실 혹은 진실은 어떻게 밝혀질 수 있을까? 피해자와 가해자가 공존하는 사회에서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질문들을 거듭해 온 시간이었어요.
베트남전쟁을 다시 마주하는 일, 덮어 두었던 관련 자료를 찬찬히 읽어 내는 일을 다시 시작한 것은 2018년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을 참관하고서였습니다. 4월 20일부터 3일간 진행된 학술대회는 내 안에 뭉뚱그려져 있던 생각의 더미를 갈래갈래 풀어내 주었습니다. 역사문제연구소의 연구원이었던 후지이 다케시 선생의 「가해 경험을 말한다는 것: 일본 중국귀환자연락회의 사례」와 시민평화법정 조사팀 심아정 선생의 「우리가 만난 참전 군인- 참전 군인 A와 함께 말한다는 것」은 가해자가 ‘가해자성’을 인정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깊이 생각하게 해 주었습니다.
피해자/가해자라는 큰 덩어리에서 그 안의 한 개인으로 시야를 좁혀 들어가면, 피해자/가해자라는 구분이 모호해지곤 해요. 참전 군인은 베트남 민간인에게는 가해자이지만 국가에 의해 동원되어 육체적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는 점에서 피해자이기도 하지요. 물론 가해자의 이런 이중성을 언급하는 일이 피해자 입장에서는 여전히 불편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꽃할머니』의 ‘피해자 자리’에서 베트남전쟁의 ‘피해를 품은 가해자 자리’로 시선을 옮아감으로써, 베트남전쟁 참전과 전쟁 중의 비인간적 폭력에 대해 좀 더 깊이 있는 성찰과 반성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이번 작품이 더 특별한 건 인물을 캐릭터화한 점인데요.
 
그림책을 구상할 때 영상 자료, 사진 자료, 논문, 서적 등을 많이 참고합니다. 내가 기억하는 베트남전 참전 군인의 이미지는 요즘 거리 위 어떤 시위대의 모습과 많이 겹쳐요. 군화와 팔각모, 검은 안경에 호루라기를 입에 물거나 지휘봉을 손에 쥔 건장한 몸집의 남성들. “나를 건드리면 가만 안 둔다!” 복장과 태도에서 이런 과시와 위협이 묻어나지요. 용맹호 씨의 겉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용맹호 씨는 아침마다 운동으로 근육을 키우고 말투나 몸짓으로 늘 남자다움을 과시하는 50대 중반의 참전 군인입니다. 그런가 하면 그는 아침마다 일어나 화분에 물을 주고 빨래를 너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는 매일매일 열심히 살아가려 애쓰지만, 전쟁 트라우마로 일상의 혼란을 겪고 하루하루를 힘들게 버티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쟁의 기억을 마주하면서 차차 자신의 가해자성을 인식해 갑니다.
이런 용맹호 씨를 형상화하면서 고민했던 것은 어떻게 하면 그를 선함과 악함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묘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어요. 『나무도장』의 ‘외삼촌’이나 『씩스틴』의 ‘씩스틴’은 가해자의 위치에 있지만, 그 위치에서 생명을 살리는 선한 의지를 드러낸 존재로 묘사했어요. 그러나 용맹호 씨의 경우, 그가 주인공이라고 해서 ‘착한 참전 군인’이 되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만약 그렇게 묘사된다면 “가해자도 피해자이다.”라는 물타기식 논법으로 전락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사실로서의 가해 행위, 그 잔혹함을 있었던 그대로 드러내야 가해자가 겪는 트라우마도 사실적으로 느낄 수 있어요. 용맹호 씨는 민간인 학살과 성폭력 등에 가담한 인물이어야 했어요. 그래야 우리 주변의 많은 ‘용맹호 씨’들이 일상으로 돌아와 겪는 트라우마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용맹호 씨의 호랑이 형상은 과거 그의 폭력적 행위와 그로부터 이어지는 행태들, 그리고 어쩌면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병든 내면까지도 잘 표현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채색 방법도 좀 달라 보입니다. 빈 공간, 흰색이 자연스레 스며들어 있어요. 빛의 느낌 같기도 합니다.
 
『나무 도장』에서 제주 풍광을 그릴 때였어요. 나뭇잎에 부딪혀 화사하게 부서지는 겨울 햇빛을 어떻게 그릴까, 고민했습니다. 아름다운 제주 자연과 끔찍한 학살 사건을 대비시키는 데 햇빛을 매개로 삼고 싶었는데, 그것을 표현하기가 어려웠어요. 그때 발견한 채색법은 사물의 색을 가득 채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색을 비우고 배경이나 명암으로 느낌을 표현하는 것이었지요. 이는 『씩스틴』에서 죽음과 생명을 함께 품고 있는 색으로 흰색을 선택하는 것으로 이어졌어요. 흰색은 희생을 통해 민주주의를 싹틔우는 희망의 색깔이에요. 나는 『용맹호』에서도 베트남의 아름다운 풍경과 전쟁의 잔인함을 대비시키고자 했어요. 그리고 한여름 출근길의 환한 아침 햇살, 꿈속에서 마주치는 과거의 기억, 그 오랜 기억이 소리나 냄새로 증폭되면서 빚어지는 혼란, 끊임없이 과거와 현실을 오가는 환상, 이런 것들을 이어 주는 데도 그림의 흰 공간은 효과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어요. 또 흰 공간은 전체적으로 주제의 무거움을 덜어 내 독자의 마음을 여는 데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 기대했지요.
『용맹호』에서는 『일과 도구』의 자세하고 꼼꼼한 붓 선과 『나무 도장』의 농담이 풍성한 붓 선을 한 화면에 함께 구성했어요. 거실의 선풍기, 정비소의 공구들, 정글의 벌레들처럼 세필로 정교하게 외곽선을 따서 형태를 그리거나 그 안에 복잡한 문양을 그려 넣기도 했지만, 나뭇잎, 야자수, 어둠, 바람, 노을처럼 느낌에 따라 농담을 주어 배경을 그려 내기도 했어요. 이런 표현법으로 용맹호 씨의 일상과 기억, 그것들의 생생함과 빛바램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작품 속에서 용맹호 씨는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 내면서도 과거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 기억은 실제로 현실에서 신체의 변화로 드러나고요. 이런 신체의 변화는 무얼 상징하는 걸까요?
 
상징의 해석은 본래 독자의 몫입니다. 더미북을 만들어 독자들의 의견을 수렴했는데, 용맹호 씨의 신체 변화에 대한 독자들의 해석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어요.
첫째는 용맹호 씨가 전쟁의 참혹함에 대해 마음을 열고 알아 가려 노력함으로써 신체의 변화가 생겼다는 의견입니다. 전쟁의 참상을 보고 들으려고 눈과 귀가 생기고, 더 많은 것을 느끼려고 가슴이 생기고, 여기저기 다니려고 발이 하나 더 생겼다는 것이지요. 이와 비슷한 의견으로, 베트남전쟁에서 한 일을 누가 알아볼까 걱정하고, 누구에게 하소연도 못 한 채 평생 비밀을 품고 살아가야 하는 용맹호 씨의 답답한 심정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해석도 있었습니다.
둘째는 참전 군인들의 악행, 그 원한이 용맹호 씨의 몸에 들러붙었다는 설명이에요. 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 누군가는 총에 맞아 귀가 떨어지고, 누군가는 지뢰에 다리가 잘리고, 또 어떤 젖먹이 엄마는 가슴이 후벼 패였어요. 이런 기억들이 하나하나 되살아나 용맹호 씨를 괴롭히는데, 이 괴로움이 단순히 마음속 환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몸에도 뚜렷이 징후를 드러내는 것이라는 생각이지요.
셋째는 고엽제 피해로 나타나는 여러 증상이라는 해석도 있었어요. 물론 고엽제 증상으로 똑같은 사례가 보고된 적은 없겠지만 그들의 내면에서 고통은 그렇게 증폭될 수도 있을 거예요. 어떤 해석이든 전쟁의 참상에 접근하는 과정으로서는 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용맹호 씨의 몸에 피해자의 훼손된 신체가 들러붙는다는 발상은 ‘퐁니 퐁넛’ 마을에서 있었던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사진을 볼 때였어요. 거기, 가슴이 잘린 채 살아 누워 있는 여성의 사진도 있었어요. ‘베트콩’의 귀를 잘라서 철사에 꿰어 허리에 차고 다닌다거나 눈알을 뽑아서 병에 담아 다닌다는 식의 이야기는 영화나 소설, 증언 기록으로 이미 알려져 있었고요. 용맹호 씨의 고통은 곧 그들의 잘려 나간 귀와 발과 가슴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식의 대입이 아니라면 우리는 용맹호 씨의 고통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고, 또 전쟁 행위를 깊이 있게 성찰할 수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모니터링에 참여한 한 분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이제 우리는 가해 경험을 이야기해야 한다. 가해자가 자신에 대한 성찰 없이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할 수는 없다. 가해자에게는 자신에 대한 성찰이 먼저이다. 그 후에야 피해자가 눈에 보인다.”
 
 
독자가 꼭 발견해 주면 좋겠다 싶은 상징이 있다면?
 
주인공 용맹호 씨는 현실과 과거를 넘나들어요. 자동차 정비소의 공구들은 성실히 일하며 열심히 살아가려 애쓰는 용맹호 씨의 일상과 베트남의 정글을 수색하던 과거 경험을 연결시키기에 적절한 장치였어요. 정비소를 취재할 때 벽에 걸린 노란색 에어릴 호스가 무척 흥미로웠는데, 나는 이것을 현실과 과거를 연결하는 끈으로 사용했어요. 용맹호 씨는 에어릴 호스의 ‘피식’ 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AK소총 소리가 울리는 베트남의 정글로 빠져들어 갑니다. 독자들도 용맹호 씨와 함께 에어릴 호스를 따라 35년 전 정글 속으로 한 발 한 발 들어가며 베트남전쟁을 마주하게 되지요.
부레옥잠은 베트남에서 인상 깊게 본 식물이에요. 2011년 7월, 호치민의 키롱 갤러리에 갔을 때였습니다. 도착할 때는 밤이라 밖의 풍경을 볼 수 없었는데,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숙소 뒤 강가에 나가 보니 커다란 부레옥잠 더미가 강물에 흘러가고 있었어요. 아름답고 신기했지요. 나중에 ‘아맙’이라는 단체의 구수정 선생께 물어보니 이름이 부레옥잠이랍니다. 베트남전 때 베트콩이 부레옥잠 밑에 숨어서 물 밖으로 빨대만 내밀어 숨 쉬며 이동했다고 해요. 부레옥잠이 등장하는 그림책의 마지막 장면은 용맹호 씨가 흘리는 눈물과 아름다운 자연 속 전쟁의 상처가 세월 따라 뒤엉켜 흘러가는 것을 표현하지요.
작은 크기의 파병 기념사진 그림은 제일 마지막에 그렸고, 고민해 왔던 문제를 풀어 준 그림이기도 합니다. 베트남전은 미국이 베트남을 공격하면서 시작된 싸움이고 한국은 미국의 동맹국으로 파병한 것인데, 내가 마치 한국과 베트남이 직접 맞상대한 것으로 묘사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다고 한국군사령부의 작전 지휘 하에 있던 용맹호 씨 등의 전쟁 행위를 그리면서 미군을 슬쩍 끼워 넣는 것도 적절하지 않았고요. 이 문제가 고민거리 중의 하나였어요. 또 하나는, 참전한 개인들의 뒤에 조국의 부름과 자유의 십자군이라는 이름으로 국가가 파병을 독려한 배경이 존재했는데, 이 점 역시 이야기 흐름에서 밀려나 있었어요. 조국을 위해, 그리고 집안의 경제적 도움을 위해 전쟁터로 나아간 그들, 그들의 되돌릴 수 없는 젊은 세월을 함께 담고 싶었는데 연결점을 찾기가 어려웠어요.
원래 첫 더미북의 뒤표지에는 파병 기념사진 그림과 함께 증언집에서 읽었던 참전 군인의 말이 인용되어 있었습니다.
“내 나라 내 조국을 그때만큼 뜨겁게 사랑한 적이 있었을까? 내 부모 내 형제를 그때만큼 뜨겁게 그리워한 적이 있었을까?”
그러나 마지막 더미북에서는 문맥을 고려하여 이것을 빼 버린 채, “피해를 품은 가해자의 자리에서 베트남전을 논하다”라는 주제의 집담회에서 발표하고 의견을 물었습니다. 참석자들의 의견 가운데 가장 무겁게 다가온 것 중의 하나는, 미국의 책임이 어떤 식으로라도 언급되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장소에서 들은 독자 의견 가운데는 당시 파병을 독려한 국가의 책임이 지적되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었습니다. 나는 책의 전체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마지막 한 쪽에서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결국 1965년에 찍은, 그래서 지금은 빛바랜 파병 기념사진에 장식으로 태극기와 성조기 문양을 조합해 넣는 방법을 선택했어요. 용맹호 씨가 전쟁 트라우마를 이기지 못하고 거리 위에 쓰러지고 마는 바로 앞 장면의 이미지에, 결의에 찬 얼굴로 꽃다발을 목에 걸고 있는 기념사진 속 그의 모습이 오버랩되어서, 전쟁 속 폭력이 개인을 넘어선 국가의 문제이기도 함을 독자들이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싶어요.
 
 
늘 작업을 시작하면 인터뷰를 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기억에 남은 일이 있나요?
 
작품을 할 때마다 예기치 못한 일을 마주치면 나와 작품 사이에 누군가 개입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곤 해요. 더미북을 들고 베트남 참전 군인 한 분을 만났을 때가 그랬어요. 내가 구상한 용맹호 씨와 꼭 닮은 모습이어서 마치 용맹호 씨가 제 앞에 앉아 있는 것 같았어요. 작은 키에 다부진 몸, 매일 아침 덤벨 운동을 해서 굵어진 팔뚝 근육, 상대방에게 으름장을 놓아서라도 자기 주장을 관철하는 강한 성격,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유기견을 데려다 키우는 정 많은 마음씨 등이 그랬어요. 만남을 주선해 준 심아정 선생의 뒷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분에게는 제가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구체적인 일상이 더 있었어요. 부인과 이별하고 혼자 키우는 두 딸의 빨래를 하는 게 제일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림 속에 빨래 너는 장면을 추가해 넣었지요. 이런 장면은 용맹호 씨의 면모를 좀 더 현실감 있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어요.
또 이런 일도 있었어요. 그림을 모두 끝내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남편과 함께 연세대학교 박물관 전시를 보러 갔어요. 전시를 다 보고 캠퍼스 뒤편의 버스 정류장을 찾아가다가, 방향을 잃어 지나가던 할머니에게 길을 물어보았어요. 할머니는 모자에 마스크를 쓰고, 양팔의 팔걸이 삼아 지팡이를 허리 뒤에 끼고 걸으셨어요. 따라오라는 말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으며 간간이 산책길 이야기도 하고 당신 손주 이야기도 들었는데, 갑자기 퍽 소리를 내며 넘어지신 거예요. 돌아보니, 책의 마지막 장면에서 용맹호 씨가 보도블록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있는 모습과 똑같았어요. 할머니는 용맹호 씨처럼 신발이 벗겨지고 아스팔트에 얼굴을 박은 채 정신을 잃으셨어요. 부랴부랴 119에 전화를 하고 할머니를 안아서 똑바로 눕혀 드렸는데, 입술이 터지고 볼 한쪽은 계속 부어오르고, 그러다가 얼마 후에야 정신이 돌아왔어요. 드디어 구급차가 달려오고 할머니가 들것에 실려 옮겨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용맹호 씨의 상황이 현실 속에 재현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어요.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면서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고, 왜 이런 일이 내게 갑자기 일어난 걸까? 의문이 일었어요. 그러다가 문득 부어오른 할머니의 붉은색 볼이 떠올랐어요. 아차! 용맹호 씨 몸에 달라붙은 분홍 살점을 넘어진 그 장면에서 빼먹었구나! 집에 돌아오자마자 화판 앞에 앉아 분홍 살점을 그려 넣었어요. 누군가 할머니를 통해 내 실수를 일러 주려 했다면, 할머니에게는 너무 가혹한 일이고 나로서는 더없이 죄송한 일이라 해야겠지요.
 
 
작가의 마음이 힘들었겠다, 생각하는 독자 분들도 많을 것 같아요. 이러한 작품들을 하게끔 작가님을 움직이는 동력은 무엇인가요?
 
저의 그림책 작업은 『꽃할머니』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어요. 그 전에는 아이들의 일상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던 반면, 이후에는 사회의 쟁점이 되는 문제들에 관심이 많아졌어요. 지금도 아침에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신문을 보는 겁니다. 아침 먹으면서 1시간 정도는 봐요. 먼 거리를 이동할 때는 신문을 들고 나갑니다. 시민들의 삶에 국가 권력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사람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은 어떻게 조정되고 있는지, 이 문제에서 시민사회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관심 있게 읽어요. 그리고 국가 권력에 희생당한 사람들, 희생자 주변 사람들의 호소와 외침들, 그 외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 자연스레 공감하게 됩니다. 만일 그 사건이 나에게 일어났다면 어떻게 했을까, 살아 낼 수 있을까? 그럴 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힘이 듭니다. 제가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당사자들만 하겠어요? 그렇긴 해도 이런 연민의 감정은 아주 오래갑니다. 오래되어 잊힐 만하면,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고요. 어쩌면 그 문제들을 마주하고 희망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면 고통이 조금이라도 덜어질지 몰라요. 나의 그림책 작업은 아주 낮은 수준에서나마 그런 문제에 마주하는 일입니다. 내가 그림책을 잘 만들면 사람들이 공감해 주지 않을까? 그럴 때마다 우리 사회에 희망의 뭉치가 조금씩 더 커지는 것이 아닐까?
작품을 진행하는 동안 그림책의 형식과 표현 등을 새롭게 고민하고, 유연한 생각으로 세상의 다양성에 주목하고, 우리의 삶이 사회의 구조나 체계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등을 살펴보려고 노력합니다. 아무리 아프고 슬픈 이야기라 하더라도 사회의 구조를 넘어 인간의 선한 의지를 발견할 때, 그림책을 마감할 수 있게 되지요. 저 스스로의 고통도 많이 치유가 되고요. 그래서 또 다음 그림책으로 옮아가는 힘을 얻게 됩니다. 사회 문제를 다루는 그림책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특별한 주장을 제기하는 것이기보다는 다양성을 인정하도록 제안하는 일일 거예요. 작가 역시 자신의 관점으로 세계를 보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편으로 우리 모두의 생각이 변화하는 세상과 더불어 끊임없이 대립하고 통합하고 확장해 가길 기대하지요.
 
 
『꽃할머니』로 시작된 전쟁과 평화에 대한 이야기의 한 궤를 『용맹호』로 끝맺는다고 하셨는데요. 이유가 궁금합니다. 다음 작품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길지도요.
 
『용맹호』 막바지 원고 작업하면서 5개월 넘게 역류성 후두염으로 고생했어요. 지금도 낫지 않고 있어요. 병원에서는 아예 생각하지 말아야 병이 낫는다고 해요. 그 말을 듣고도 어떻게 하면 생각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또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껏 그냥 놀면서 살아 본 기억이 별로 없어요. 놀러 가더라도 취재나 답사 여행이 재미있었으니까요. 이제 그냥 몸이 하자는 대로 조금 쉬었다 가려고 합니다. 요즘엔 저 자신에게 10년 넘게 포기하지 않고 마무리했으면 되었다, 이만큼 했으면 되었다, 이렇게 위로의 말을 건네며 지내요. 아무 생각 없이 놀고 나면 다음 작품부터는 이야기도, 담는 방식도 달라지겠지요. 다음 책은 따듯한 햇살을 담은 것 같은, 즐겁고 신나는 그림책이 되었으면 해요. 자연을 그리고 싶고요. 『용맹호』를 그릴 때도 베트남의 아름다운 풍광을 그리면서 위안이 많이 되었어요. 독자들과 또 나 자신과 했던 약속, 세월호 이야기를 담은 작품은 몸이 회복되면 해야겠어요.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요.
 
 

작업 과정 내내 모니터링을 하면서 독자의 감정과 이해도 세밀하게 살피셨어요.
 
예전에 강연장에서 한 학생이 저에게 물었어요. 왜 작가님은 아픈 이야기를 하냐고, 이야기 안 하면 사람들이 모를 테고 그러면 마음이 좀 편할 것 같다고. 그 학생은 내 그림책을 읽으면 마음이 아프다고 했어요. 그렇게 말하고는 스스로 다시, 마음이 아프더라도 이런 사실을 알기는 해야 한다고 했지만요. 마음 아픈 이야기를 시작할 때는 한편으로 독자들께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이 들어요. 그렇지만 이야기가 끝날 때쯤 되면 대안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도 함께 갖게 되지요.
더미북에 대한 의견을 들을 때 한 독자께서 이렇게 이야기해 주셨어요. “국가가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지도 돌아보지도 치유하지도 않아서 참전 군인 개인의 고통으로 남아 있지만, 용맹호 씨의 고통은 우리 사회의 고통이기도 하다. 괴물처럼 변한 용맹호 씨는 우리 사회의 현주소이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 그래서 병든 우리 사회, 이곳의 지연된 정의를 재생해야 한다.”
세상에 한결같이 고정되고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없을 거예요. 우리는 매일매일 변하는 자연, 사회 환경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고 있어요. 우리가 우리 이웃에 관심을 가지는 일은 어쩌면 우리 스스로 저 변화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들어가 영영 사라지지 않기 위한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럴수록 각자가 자기의 처지에서 눈에 띄는 일,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조금씩이라도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겠지요.
독자 여러분, 애정으로 지켜봐 주셔서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