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구멍에 대한 탁월한 메타포, 맨홀

누구나 살면서 한번쯤 ‘맨홀’에 빠진다. 그 맨홀은 생애에 잠시 끼어든 장애물이기도 하고, 때로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삶으로 이어 주는 출구가 되기도 한다. 『맨홀』의 주인공 소년은 인간의 몸에는 얼마나 많은 구멍이 있는지 묻는다. 눈에 보이는 콧구멍, 귓구멍을 생각한다면 헤아릴 수 있지만, 소년은 숨구멍이나 땀구멍까지 헤아려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그렇게 보면 인간의 유한한 신체에는 무한에 가까운 구멍이 나 있다. 소년이 ‘블랙홀’에 애착을 갖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에게 구멍이란 단일한 개념이 아니라 양가적 의미이다. 박지리에게 있어 ‘구멍’이란 곧 삶의 아이러니 그 자체이다.
청소년기라 불리는 성장기는 어떤 점에서 누구나의 삶에 놓여 있는 보편적 구멍이라고 할 수 있다. 작게든 크게든, 우리는 그 시기를 지나며 영혼의 허기와 빈 구멍을 체험하게 된다. 그런데, 어떤 소년들에게 구멍은 너무나 자주 복잡한 형태를 띤 채로 삶을 침범하곤 한다. 『맨홀』의 주인공 소년처럼 말이다.
그의 첫 번째 구멍은 바로 ‘아버지’이다. 현재, 그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소방관이었던 아버지가 순직하고 난 후, 그의 가정엔 아버지의 부재라는 구멍이 찾아온다. 그런데 더 문제적인 것은 그 부재하는 아버지의 구멍이 아버지의 생전엔 더 컸다는 사실이다. 아버지는 살아 있을 때 폭력과 억압이라는 이름으로 군림했다. 역설적이게도 소년에게 가장 큰 구멍은 아버지의 부재가 아니라 아버지 그 자체였다. 아버지는 소년의 얼룩이자 상처이며 누나와 엄마, 가정에 가해진 커다란 구멍이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순직했을 때 소년은 오히려 자신의 삶에 뚫린 구멍이 조금은 채워졌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아버지의 부재 역시도 구멍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소년의 아이러니는 여기서 더 깊어진다.
두 번째 구멍은 엄마이다. 아버지의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던 엄마는 언제나 소극적으로 투항한다. 엄마는 아버지의 폭력에 짝패처럼 군다. 누나와 그에게 아버지뿐만 아니라 폭력을 방치하는 어머니까지도 억압이자 상처이며 구멍에 불과하다.
세 번째 구멍은 “맨홀”이다. 맨홀은 아버지의 폭력과 어머니의 굴욕을 피해 남매가 찾았던 유일한 안식처이다. 상징계적 기억 너머로 사라진 어머니의 따뜻했던 자궁처럼, 맨홀은 상처 입은 두 남매에게 영혼의 인큐베이터가 되어 준다. 그들은 아무도 모르는 구멍, 버려진 맨홀에서 부모로부터 입은 상처를 회복한다.
 
문제는, 이 맨홀이 소년의 삶에서 어디로 빠져나올지 모르는 블랙홀의 입구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맨홀에서 언제나 누나와 함께였지만, 아버지의 사망 이후 누나는 맨홀에서 빠져나가 배우가 된다. 그런 점에서 맨홀은 퇴행적 상상계의 공간이다. 누나가 선택한 연기의 세계란 곧 사회적 초자아를 연출하는 상징계 속 주체이기도 하다. 누나가 연기를 통해 사회적 공간에 자리잡아가는 데 비해 소년은 점점 더 자신만의 공간인 맨홀로 퇴행한다. 소년에게 안락한 공간은 맨홀이 유일하다. 누나도, 엄마도, 친구도, 선생님도, 소년에게는 모두 소통할 수 없는 타자에 불과하다. 맨홀 속에서야 겨우 안정감을 느끼지만 그것은 자발적 격리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박지리의 소설 『맨홀』은 우리가 흔히 ‘문제아’라고 낙인 찍어버리는 소년의 심리를 따라간다. 한국에 체류 중인 동남아시아인을 죄다 “파키”로 부르는 이 소년은 ‘완득이’의 정반대편 세계를 보여준다. 『완득이』가 우리가 흔히 상상할 수 있을 불화와 갈등을 낭만적으로 봉합한 이름이라면, 『맨홀』은 봉합이란 늘 불완전하며 한편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작가는 이런 갈등, 우리 삶에 난 구멍이 낭만적 해결책으로 쉽게 메울 수 없는 덫임을 강조한다.

다른 아이들과 쉽게 섞이지도, 불화를 이겨낸 척 가장하는 연기도 견디지 못하는 이 소년은 『이방인』의 뫼르소를 연상시킨다. 그는 세상과의 적당한 타협을 거절한다. 박지리는 이 소년을 통해 문제아가 아닌 세상과의 타협에 실패한 한 아이의 초상을 그려낸다. 작가는 이 초상을 구멍-맨홀-실패-상처의 이미지로 환유함으로써 풍부하게 조성해 낸다. 소년은 언제나 자신이 막기엔 너무 큰 구멍 앞에 서 있곤 한다.
작가의 이러한 전언은 “인간은 아예 구멍 그 자체로 이루어진 거 아닐까?”라는 주인공의 생각으로 변주된다. 박지리의 『맨홀』은 인생의 구멍에 대한 사려 깊은 반성과 입체적인 사유로 이루어진 환유적 이미지의 공간이다. 성장이란 언제나 멀미나는 탐구이지만 『맨홀』에 그려진 성장은 그 성장이 어떤 경우 가혹한 형벌일 수도 있음을 알려 준다. 단순한 봉합이나 화해의 제스처로 극복될 수 없는 구멍들, 박지리는 문학이 바라보아야 할 것이 환상이 아니라 지독한 현실임을 말하고 있다. 삶의 구석구석에 놓인 맨홀은 그렇게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글 l 강유정(영화·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