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 작품 해설
















더 이상 연기할 수 없는 삶에 관하여

최희라(독자)


MAN의 마흔여덟 번째 면접
당신이 궁금하다. 더 정확히는 당신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당신은 입사 원서를 몇 통째 쓰고 있는지, 혹은 썼는지. 면접을 몇 번이나 보았고 또 그 면접에서 몇 차례나 거짓말을 했는지. 『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라는 이 독특한 제목의 어디에 끌렸고, 또 어느 단어나 어절에 유독 호기심을, 혹은 불편함을 느꼈는지. 어쩌면 나처럼 희곡인지 뭔지 모를 소설의 초반부를 생경하게 읽어 내려가다 ‘마흔여덟 번째 면접’이란 구절에서 정색을 하고 잠시 멈출지.
대학을 졸업하고 정규직 취업에 최초로 성공하기까지 입사 원서는 아마 백 통쯤 썼을 것이다. 왜냐하면 팔십 번째에서 헤아리기를 멈췄는데 그 뒤로도 원서 몇 장을 더 썼고 면접도 여러 번 봤으니까. 면접 횟수는 그에 훨씬 못 미쳤기에 열 번째부터인가 아예 세지도 않았다. 첫 번째 최종 합격 통보를 받고 신체검사를 마치고 합숙 면접에 들어갈 때까지 다소 얼떨떨해서 현실감이 없었고, 그리 기쁘지도 않았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다.
“이 마흔여덟 번째 면접은 정말 오랜만에 얻은,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니까.”(11쪽)
우리의 MAN은 헤아리기를 멈출 수 없었다. 다만 제대로 면접을 봤다면 마흔아홉 번째가 되었을 면접을, 마흔아홉 번째라면 오십 번째 면접은 필연적으로 닥칠 것 같아서 마흔여덟 번째로 규정 지었을 뿐이다. 그렇게 MAN은 마흔아홉 장보다 훨씬 더 많은 입사 원서를 쓰고, (그 이상의 불합격 통지를 받고) 마흔여덟 번째 면접장으로 간다. 그리고 실상 이 마흔여덟 번째 면접은 대입 면접 이래 MAN에게 영원히 반복되는 두 번째 실패 같은 것이다. MAN의 면접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연극 속의 연극
소설은 3인칭으로 시작하는데, 작가는 희곡 기법을 일부 차용하여 이 이야기가 기본적으로 연극 무대 위에 놓여 있음을 상기시킨다. 연극의 1막 격인 MAN의 구직 활동이 끝나면 돌연 1인칭으로 시점이 전환되면서, 소설에서 내용상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MAN의 연수원 합숙 일지가 시작된다. 그리고 연극의 2막이 후일담을 보여 주며 소설을 마무리한다. (갑작스레 시점이 바뀐다든지, 매끄러운 서술이 이어지다 환상이 현실처럼 스며들거나 기괴한 이미지가 등장하는 것은 박지리 작가의 작품에서 종종 있는 일이다. 작가가 적극적으로 의도했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연결이 난데없는데, 이야기의 전체적인 흐름은 놀랍게도 무리 없이 이어지곤 한다.) 연극의 1막 속에서 벌어지는 면접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면접이 본질적으로 연극의 형태를 취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면접관은 지원자들을 지켜보고 평가하며, 지원자는 면접이라는 형식에 맞게 행동하고 면접관들의 눈에 띄어야 한다. 면접관들의 자리가 객석이라면 지원자의 자리는 무대이며, 면접관들이 관객이라면 지원자는 연극 배우가 된다. 면접관은 지원자들의 개인 정보를 속속들이 알고 있고, 합격 여부를 결정하는 권한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통상적인 관객의 위치를 넘어 신이나 심판관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면접의 내용도 현실을 은유하면서 연극적이다. 가짜 면접관이 진짜인 양 면접을 보고, 지원자들이 앉을 의자가 부족한 면접장도 있다. 면접관들도 알 바 아닌 미래 시장 전략 따위를 질문하는데 지원자들은 또 진지하게 하나마나한 대답을 한다. 현실에서는 절대 선택지에 넣지 않을 도둑과 살인범 사이에서도 굳이 선택을 해야만 한다.
MAN의 마흔여덟 번째 면접은 “이게 면접이기 때문입니다.”(45쪽)라는 답변으로 끝나는데, 면접이라는 단어를 ‘연극’으로 대체해도 이상하지 않다. 이 소설에서 면접은 연극 속의 또 다른 연극이다.
면접이라는 연속되는 부조리극에서 MAN이 아직까지 제정신으로 보이는 이유는 면접이 끝나면 안착할 곳을 찾을 수 있다는, 더 이상 연기하지 않을 수 있다는 환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막에서도 MAN은 이 세계가 문득문득 낯설다. 면접을 보러 가는 길에 이상한 남자를 만나지만 ‘연출된 장면’이라고 생각하기도 하며, 면접장이 있는 건물에서 ‘일그러진 시공간’을 느끼기도 하고, 과자 회사의 서류 전형에 합격한 사실 자체를 의심스러워하기도 한다. 아니, 훨씬 더 오래 전부터 주기도문을 외우며 불안을 느낀다. 주기도문은 역설적으로 어린 MAN에게 ‘시험’과 ‘악’의 가능성이 이 세계에 항상 존재한다는 전제를 일깨운다.
소설이 끝날 즈음에야 MAN의 연수원 일지마저 실제 관람 중인 연극임을 MAN도 독자도 알 수 있게 된다. 표면적으로는 연극과 동떨어져 있던 1인칭 서술은 무대 위에서 벌어지던 MAN의 독백이었거나, MAN도 독자도 몰랐던 연극 속의 연극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연극은 이뿐만이 아니다.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
면접 합격 후 MAN은 새 삶을 시작하겠노라는 의욕에 차서 첫 출근을 기다리지만, 입소한 연수원은 어딘지 모르게 이상한 공간이다. 외부와 차단된 숲속인데 고요하다 못해 새나 곤충의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너무 자주 잠이 오지 않는 새벽, MAN의 귓가를 맴도는 것은 새소리가 아니라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세일즈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신화적인 인물, 세일즈 킹”(52쪽)이다. (물론 그런 인물은 역사상 실재하지 않지만 본부장의 강연에서 마치 실화처럼 변주되기도 한다.) MAN의 연수원 일지에서 하루는 합숙 종료일을 기준으로 정의되는데 그 하루는 또 시각으로 분절된다. 연수원에서 만나게 된 사람들도 실명으로 지칭되지 않는다. ‘안경잡이’나 ‘회색 셔츠’처럼 소유하고 있는 사물의 일부로, ‘떠버리’나 ‘여자’처럼 외면적인 특징에 빗대어 불린다. 아니면 천이나 강처럼 성씨로만 불리거나 여러모로 미성숙하다는 점에서 ‘꼬마’로 지칭된다. ‘친구’도 있지만 친구라는 단어는 배신과 짝이 된다. MAN이 유일하게 실명으로 부르는 사람은 외부인이자 애인인 송이뿐인데, 그들의 대화는 물리적인 거리만큼이나 겉돈다.
1막에서 MAN을 둘러싼 세계가 조금씩 일그러져 있었듯 여기도 “커피를 뽑으면 오렌지 주스가 나오는”(236쪽) 자판기와 닮아 있다. 세일즈 킹의 성공담은 세일즈 자체가 사람을 속이는 기술을 연마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려 준다. 봉사 활동도 기업의 이윤 창출이라는 실제 목적을 감춘 채 분장하듯 선크림을 바르고 나가서 곧 허물어뜨릴 집을 짓는 일이다. 정말 연극은 끝난 걸까.
어쨌든 면접이라는 연극은 끝났다고 MAN은 믿는다. 그는 영혼 깊숙이 대기업의 세일즈맨이 될 준비가 되어 있다. 그 것이 단지 훌륭한 부품이 되는 “대수롭지 않은 운명”(82쪽)을 향해 가는 길일지라도. 이것은 “마흔일곱 번의 거절을 당하면서”(82쪽) 얻은 자리이기 때문이다.
MAN의 돌발 행동은 우연히 평가 파일을 발견하면서 시작된다. 합격은 자명한 사실이 아니다. 이제 MAN은 일상을 연기해야 하는 합숙이라는 관문을 마주한다. 최종 선택될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경쟁의 장은 공식적인 오디션에서 몰래카메라 같은 리얼리티 쇼로 전환된다. 1막에서 이루어 졌던 면접이 단편적이며 지원자도 동의하는 연극이었다면 합숙이라는 면접은 연극이라는 점을 감추며 조직적이고 일상적으로 MAN을 속인다. 혹은 속인다고 MAN은 믿는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 전체가 연기를 하고 있으며 자신을 시험한다고 생각할 때 인간은 종종 불안과 강박에 빠지며, 망상인지 사실인지 모를 머릿속 시나리오는 의구심을 증폭시키는 방향으로 치닫는다. 이제 단순히 연기만 해서는 이 면접을 통과할 수 없다고 MAN은 느낀다. 연극을 한다는 의식조차 버리고 영혼을 송두리째 걸어야 한다. 연극의 2막에서 합숙의 진실을 알게 된 MAN은 스스로를 고장 난 전자레인지로 환원시켰다는 것을 알게 된다. MAN의 사물화는 그가 마흔여덟 번째 면접 문제의 답으로 살인자를 선택할 때부터 예견되었던 일이다. 새들의 노랫소리가 어느덧 자취를 감춘 까닭이다. 합숙 종료를 단 이틀 남겨 둔 새벽, MAN은 새도,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생명력을 해친다.
 
 
더 이상 연기할 수 없는 삶
MAN과 다른 출연자들, 관객이 있는 무대는 연극의 1막에서부터 원형극장으로 묘사되는데, 이 극장에는 관객을 위한 의자나 배우를 위한 무대가 따로 없다. 독자는 연극의 2막이 끝날 즈음 “빛의 밝기로만 경계를 만들었던”(253쪽) 이 극장에서 관객과 배우의 자리가 언제든 뒤바뀔 수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배우이며 각자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관객은 실은 서로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아무개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 극장에서 연극이 몇 번이나 공연되었는지, 또 얼마나 많은 연극이 겹쳐져 있는지 모른다.
어떤 것이 연극이었고 또 어떤 것이 연극이 아니었는지도 불확실하다. 언제부터 이 연극이 시작되었고 또 어떻게 끝을 낼 수 있는 건지도.
삶이 연극이라는 관점은 새삼스럽지 않다. 그런데 특히 이 소설은 연극이 사회 체제 속에 내재해 있는 현실임을 직시한다. 개인은 사회가 조직한 연극에 동참할 것을 공식적으로든 비공식적으로든 요구받는다. 하지만 이 연극의 내용은 테트리스 게임처럼 무용하거나 “집을 지어 주면서 동시에 집을 빼앗는”(74쪽) 일처럼 부조리하다. 지원자의 거의 모든 것을 알려 하면서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들여다보지 않는 면접처럼 알맹이가 없다.
첫 입사를 준비하는 이는 면접이라는 노골적인 연극에 맞닥뜨린다. 더구나 “지금은 아무리 과자를 싫어하는 사람도, 과자 회사가 사원 모집 공고를 낸 이상 거기에 지원하는 것이 의무가 된 세상이다.”(24쪽) 개인은 사활을 걸고 이 연극에 임할 수밖에 없다. 이 연극을 가까스로 통과하면 소위 사회생활이라는 또 다른 연극이 시작된다. 그래서 MAN의 입사 실패는 이 세계에 어른답게 적응하는 데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 연극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사회의 가치를 철저히 내면화한 개인이 다다르는 길은 기꺼이 사회의 부품이 되어 생명력을 잃는 것 외에는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한편 “우린 그렇게 작은 존재는 아니”(83쪽)라고 믿으며 어떤 것이 연극이고 또 어떤 것은 연극이 아닌지 구분하며 살아가는 일도 신기에 가깝다. 소설에서 얼핏 이상적인 인간처럼 묘사되는 ‘친구’도 이 연극에 어떤 식으로든 동참하고 있다. 그런데도 언젠가는 “앞도 잘 안 보이고 가족이 이해 못 하는 외로운 곳”(62쪽)으로 걸어가겠다는 것은 자기 기만적이며 또 다른 부조리를 빚어내는 언설이다.
그렇게 이 소설은 삶의 연극성이라는 지점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연극적이다 못해 연극으로 겹겹이 둘러싸이게 된 사회 현실을 응시한다. 그리고 그 현실이 더 이상 한 개인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악화되었음을 드러낸다. 무엇보다 숨을 다하는 순간까지 연극 속을 벗어날 수 없는 삶을 삶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런 삶은 허상에 가깝지 않은가. 우리의 MAN은 간절하게 묻고 있다.
이 연극으로 가득 찬 세계를 두고 작가는 갔다. 하지만 그의 인물들은 이 시대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쯤은 또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