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삶에 대한 너그러움과 믿음

호성이네 방에는 아침에 벌여 놓은 밥상이 보자기도 덮이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고, 바퀴벌레 한 마리가 곧 떨어질 알주머니를 배에 차고 상 위에서 기어 다녔다. 호성이는 전기밥통에서 밥을 푸고 참치 통조림을 땄다. 둘은 방바닥에 다리를 벌리고 앉아서 다리 사이에 밥그릇을 놓고 퍼먹었다. 작은 참치 통조림 한 통이 금방 기름만 남았다. 둘은 기름까지 싹싹 먹어치웠다. (본문 37쪽에서)
 
 
“불이나 확 질러 버릴까!”
말없이 앉아 있던 혁제가 윤제를 힐끗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뭐?”
“아니야.”
“형, 니 지금 하우스에 불 지르고 싶나?”
“니는?”
“나는 이 꽃마을도 훨훨 타고, 학교도 타고, 아예 이 세상이 통째로 훨훨 다 탔으면 좋겠다.”
(본문 43~44쪽에서)
 
 
윤제는 문득 하우스 사람들이 모두 한집 식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누워서도 옆집 소리를 다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본문 70쪽에서)
 

위의 글들은 각각 부모들이 고달픈 막일을 나간 뒤 빈 집에서 아이들끼리 식사하는 장면, 빈민촌에 살고 있는 두 형제끼리의 대화, 그리고 벽을 통해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는 이웃의 고통을 듣는 주인공 소년의 마음을 나타낸 것으로, 이 소설의 주제가 녹아 있는 요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소설 전편을 통한 이러한 장면의 묘사로 가난과 삶의 남루함과 불화, 작은 가슴속에 자라는 분노와 연민을 굳이 설명하지 않고도 충분히 보여 준다.
『푸른 사다리』는 비록 어린 소년의 눈을 통한 세상 바라보기와 성장기의 통과 의례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러한 소설에서 흔히 다루어지는 개인의 내면성에 갇히지 않고 그와 아울러 사회성의 획득과 표출이라는 미덕을 갖춤으로써 열린 구조를 지향하고 있다. 아이들이 성장 과정에서 어떻게 개인성, 실존성과 사회성을 획득해 가는지 자연스럽게 그리고 있다.
 
 
빌딩 청소와 식당 일로 생계를 꾸려 가는 어머니, 탄광의 막장 광부 생활 20년에 몸과 마음이 망가진 아버지,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면서 자신의 가족과 환경에 대한 심한 수치심을 갖고 있는 형, 가난과 결손과 폭력 앞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어 물가에 내놓은 것처럼 위태롭기 짝이 없는 친구들이 이 소설의 주인공 김윤제를 에워싼 환경이고 조건들이다. 소설 속의 공간은 비록 비닐하우스촌이라는 작고 제한된 장소이지만, 그곳은 아이에서 청소년으로 성장하는 이른바 사춘기의 새순돋움과 혼란스러움이 혼재한 공간으로, 사회의 그늘과 구조적 모순, 천민자본주의 등이 몇 겹의 장치를 이루며 입체적으로 조명되고 있다.
 
 
이 소설은 강원도 광산촌에서 서울의 빈민촌으로 이주해 온 김윤제의 가출과 비행, 결국 유치장과 구치소와 심리분리소 생활을 거치면서 마침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기까지, 소년다움 푸르른 꿈과 희망을 회복하기까지의 생활 기록이면서, 서초동 법원 단지 앞 꽃마을, 즉 객골 빈민촌 하우스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기록이기도 하다.
작가 이옥수는 비닐과 보온용 덮개를 덕지덕지 덮어씌운 길쭉한 하우스, 한 동에 보통 네댓 집이 칸을 막고 사는 삶의 내부 풍경을 열어젖혀 보이며 강한 흡인력으로 우리를 끌어들인다. 초라한 집을 내보이고 싶지 않아 했던 작은 거짓말이 가출로 이어지고 결국 비행 소년으로 낙인찍혀 가는 한 소년의 삶의 과정이 이 사회의 그늘진 곳에서 소회 계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과 겹쳐지면서 그 파탄과 전락, 분노를 뿌리로부터 치밀하고 찬찬히 짚어 낸다.
이 소설을 읽고 나면 우리 모두 누구나 아이였던 시절을 보냈으면서도 현실의 아이들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가 하는 깨달음과 함께 우리 이웃들의 삶에 대해 얼마나 무심하고 피상적인 이해에 머물고 있는가를 느끼게 된다.
 
 
이 소설의 미덕 가운데 하나는 무엇보다 자연스러움이다. 수사적 과장이나 감정의 과잉 없이 객관성을 견지하면서도 작품 속의 한 사람 한 사람을 보듬는 작가의 시선이 따뜻하고 섬세하다. 작가는 시종 어조를 흩뜨리지 않으면서 그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펼쳐보임으로써 진솔한 사실성을 획득하고 있다. 작중 인물들의 불안하고 절박한 삶, 고독의 심리를 꿰뚫는 시선은 예민하고 깊은 통찰력이 깃들어 있으나 때로 능청스럽고 유머러스하며 이야기꾼으로서의 타고난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읽는 재미를 더한다.
살아간다는 일, 자라난다는 일의 어려움을 깊이 있게 묘파하고 있는 이 소설의 건강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 모든 지난함에도 불구하고 이 작가가 품고 있는, 사람과 삶과 세상에 대한 높은 긍정성과 너그러움 그리고 믿음에서 오는 것이리라.
 
 
 
글 · 오정희 (소설가)
 
 
1318북리뷰 2004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