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서평] "우리가 완전해지는 시간" 『사랑에 빠질 때 나누는 말들』/서현숙(강원도교육청 파견교사)

우리가 완전해지는 시간
서현숙(강원도교육청 파견교사)

‘말[言]’을 그리워하는 소년을 알게 되었어
면회실 옆의 생강나무가 노랗게 꽃을 피울 즈음에 알게 된 소년이 떠올랐다. 소년을 만나려면 비밀번호로 잠긴 차가운 철창문을 세 번 지나야 하고, 만났다가 헤어질 때에는 사탕 한 알도 손에 쥐여 줄 수 없었다. 문득 간단한 연락을 하고 싶은 일이 생겨도 소년에게는 전화도 카톡도 불가능하다. 만난 지 두 달이 지나서야 알게 된 사실. 소년이 손으로 쓴 편지 주고받는 걸 좋아한다는 것이다. 내가 소년에게 수요일에 편지를 주면 하룻밤 만에 편지지 꽉 차게 답장을 써서 다음날 수줍게 건넨다. 바깥 세상에서 날아온 편지를 받은 이야기를 할 때면 얼굴 전체에 감출 수 없는 웃음이 번진다. 소년은 갇히기 전에도 편지 주고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을까. 늘상 ‘말’을 그리워하던 사람이었을까. 궁금했다. 소설에 답이 있었다. 소년원에 갇힌 현수가 서현에게 쓴 편지의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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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편지를 주고받으면 말을 배 터지게 먹은 기분이 들었어. 그리고 곧 깨달았어. 한 번도 누군가의 말을 주워 먹은 적이 없다는 것을. (중략) 너의 말이, 네가 적어 준 글들이, 내 영혼의 살이 되어 준 거야. 『사랑에 빠질 때 나누는 말들』_1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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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다.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우리는 밥을 먹듯이, 말을 먹는다. 밥은 몸의 살이 되고, 말은 영혼의 살이 된다. 친구의 말 덕분에 신이 나기도 하고, 어른의 포근한 품에서 듣는 말로 ‘마음껏 살아도 괜찮겠구나’ 하는 안도감을 얻기1)도 한다. 갇힌 소년이 말을 그리워한다는 것은 영혼이 몹시 굶주렸다는 의미가 아닐까. 우리도 다르지 않다. 나에게 말의 선물을 배부르게 주는 이를 좋아하게 되고 사랑하게 된다. 사람과 사람의 사랑이 다 --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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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는 올해 춘천 소년원에서 일주일에 한 번 국어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수업 시간에 『지중해 태양의 요리사』를 읽고 박찬일 주방장님을 초청했는데, 주방장님이 양옆에 소년들을 앉혀놓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모습을 보고 어른의 너른 품에서 듣는 말과 이야기의 힘을 느꼈습니다.

약한 마음을 잘 지키는 것도 나쁘지 않아
인간은 강한 존재일까, 약한 존재일까. 어른이 된다고 마음이 무쇠가 되는 것일까. 단단한 결심과 다부진 생각으로 삶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 나가기도 하지만, 우리는 종종 휘청거리게 마련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상처받으면 울기도 하고 칭찬받으면 헤헤거리기도 하는 그렇게 연약한 마음(109쪽)’이 있다. 주위에서 흔하게 듣는 말은 ‘마음 약해지면 안 돼. 강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 되어야 잘 살 수 있어.’이다. 

‘약한 사람이 되는 것, 연약한 마음을 잘 지키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109쪽)’ 우리는 왜 서로에게 이런 말을 해 주지 않을까. 소설의 소년 소녀 들은 사랑의 방향이 엇갈리기도 하고, 이 때문에 친구와 소원해지기도 하고, 소년원에 있는 오빠와 편지로 마음을 주고받기도 한다. 관계의 모습은 다양하지만, 서로에게 마음을 기대고 있는 모습은 다르지 않게 여겨졌다. 서로 기대고 있는 것은 강하고 멋있어 보이는 마음이 아니었다. 볼품없고 약하고 불안한 마음을 기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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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쓰는 것만으로도 나는 완전해지거든
살면서 우리가 완전해지는 시간은 뜻밖에 찾아온다. 학급에서 홀로 다니는 아름은 서현에게 “시를 쓰는 것만으로도 나는 완전해지거든.” 이라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서현은 생각한다. 완전해진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저 한 단어를 들었을 뿐인데, 그 단어에 감길 여러 의미와 형상이 열매처럼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지는 느낌. ‘완전’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뿐인데 동주 생각이 났다. 영화가 끝났을 때 동주가 기다란 몸을 쭉 펴는 모습이 생각났고 물을 마실 때   움직이던 동주의 목울대가 생각났고 내 손을 잡은 동주의 보드랍고 따뜻한 손이 생각났다. (145~146쪽)

그렇구나. 우리가 완전해지는 순간은 만질 수 없는, 저 먼 곳의 추상(抽象)에 있지 않다. 내 앞에 ‘우수수 떨어지는 열매’처럼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 그렇듯 구체적인 것이다. 영혼이 굶주렸을 때에 마음을 배부르게 하는 목소리가 내 귀에 감겨 올 때, 좋아하는 이가 멀찌감치만 보여도 마음이 쿵쿵거릴 때, 무기력한 날들이 누군가로 인해 설렘으로 채워질 때, 누군가의 눈빛에 마음이 고요히 머물 때에, 그 순간마다 우리는 매번 완전해진다. “나약해도 괜찮다고 볼품 없어도 괜찮다고”(148쪽) 말하며 기대는 순간, 뜨거운 말을 서로 한 입씩 먹여주는 그런 순간마다 우리는 완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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