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 아름다운 이름 아버지 : 김눈솔

제3회 청소년 독서감상문 대회 청소년부 대상
김눈솔

 
 
9월 5일의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다. 태풍 나비가 북상해온다는 뉴스대로 하늘을 벌써 울먹거리며 바람을 조금씩 뱉어내고 싸하면서도 따스한 바람이 교실 창문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조회시간, 아직 오시지 않은 담임선생님의 부재속에서 책을 펼쳐 들었다.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 그게 무슨 의미일까 나름 생각을 해보며 책을 읽어 나갔다. 로버트는 우연히 이웃집 아저씨의 젖소가 새끼를 낳는 것을 돕다가 어깨에 심한 상처를 입는다. 어깨뼈가 드러날 정도로 물리고 나서 상처를 집을 때에도 울지 않는 로버트를 보며 나의 유년시절이 생각났다. 유난히 아픔을 표현하고 싶지 않아하는 괴상한 자존심이 있어서 넘어지거나 맞아도 절대 아프다고 하거나 울지 않았었다. 아버지는 그런 내게 대견하다고 하시면서도 약을 발라주시며 말씀하셨다. “많이 아프면 울어도 돼. 대신에 다시 일어서면 되는 거야.” 그러고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나는 아프지 않았지만 콧잔등이 시큰했다.

로버트가 젖소의 새끼를 낳는 것을 도운 대가로 핑크색 아기 돼지 핑키를 선물로 받을 때쯤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몇 가지 말씀을 하셨지만 나는 로버트와 핑키의 예쁜 이야기에 빠진 채로 아무런 얘기도 듣지 못했다. 수업이 시작해서야 책을 닫고 잠시 로버트와의 안녕을 고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점심시간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서 나는 가만히 다시 책을 꺼내 들었다. 

로버트의 아버지는 언젠가는 자신의 농장이 될 땅을 위해 농장일뿐만 아니라, 마을의 도축장에서 돼지 잡는 일을 한다. 그는 늘 열심히 일하면서 검소하게 살려고 노력했다. 그의 몸에서 나는 돼지 냄새는 성실하게 일한 노동의 냄새다. 가족을 위한 희생의 냄새. 

나의 아버지. 가족을 위해서 언제나 열심히 일하는 아버지가 생각났다. 작업복을 입고 시꺼먼 먼지들 속에서 자재를 나르고 위험과 폭염 속에 또는 추위 속에서도 일을 하셔야 할 나의 아버지. 노동에 절은 그의 옷과 육체에서는 땀냄새가 그득했지만 그 냄새야 말로 우리 가족에 대한 사랑의 냄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와서는 깨끗이 씻고 나와 내 동생을 품안 가득히 안아주실 때에 아버지의 목덜미와 온몸 구석구석에서 품어져 나오는 냄새는 세상 어느 바람보다 따스하다. 

로버트의 집은 가난했다. 야구장에도 갈 수 없고 자전거도 살 수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신을 잘 따르고 귀여운, 가장 예의바른 돼지 핑키가 있었고 풀과 옥수수가 많은 버몬트의 초원이 있었다. 인생의 가르침을 던져 주시는 아버지가 있었다. 물질적 소유가 가난과 부유의 척도라고 한다면 우리 집은 가난하다. 그러나 나는 우리 집이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형편이 어려워 등록금을 지원받아도, 번듯한 집이나 차가 없어도 로버트의 아버지의 말처럼. 서로 아껴 주는 가족이 있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소박한 인생의 목표가 있는 사람은 결코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고 믿는다. 

혹독한 가난 때문에 아들이 가장 아끼는 핑키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마음. 그것은 내게 매우 아프고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아버지이기에, 그는 아버지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

모든 멍에를 짊어지고 모든 잘못과 책임을 온몸에 이고 다 그렇게 메고 가는 것이다.
나도 아버지의 눈물을 딱 한 번 본 적이 있다. 그 날은 정말로 내가 잘못한 날이었고 일의 발단은 매우 사소했다. 컴퓨터 헤드폰 이음새가 떨어져 고장이 났는데 아버지는 고쳐서 쓸 수 있다고 고쳐주시려 했고, 나는 발끈하는 마음에 그걸 어떻게 쓰느냐며 트집을 잡고 고집을 부렸다. 아버지는 나의 짜증에도 자상히 헤드폰을 고쳐주셨지만 나는 결국 헤드폰을 집어던져 버렸다. 화가 난 아버께서 나를 때리셨고 나는 집을 뛰쳐 나와버렸다.

내가 잘못한 걸 알고 있었지만 다시 들어가기가 왠지 내키지 않는 기분에 학교로 향했다. 공부를 하다가 아버지의 마음이 풀릴 때쯤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해서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나를 아버지는 집 앞에서 차 안에 앉아 기다리고 계셨다. 아버지는 나를 보시자마자 나를 안고 우셨다. 내가 혹여나 잘못되었을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면서. 자기를 닮아 욱하는 성격에 혹시 나쁜 마음먹고 뛰어내린 건 아닌가, 집을 나가버린 건 아닌가, 그렇게 온동네를 헤메시다가 집 앞에서 꼬박 나를 기다리고 계신 것이었다. 나도 아버지도 서로 부둥켜안고 꺼억대며 울었다. 

”미안하다. 내가 너 때문에 사는데. 살아있어 줘서 고맙다…….”

정말 잘못한 건 난데 도리어 아버지는 나에게 미안하다고 하셨다. 아버지의 사랑에 나는 그날 눈이 부어 더 이상 울지 못할 때까지 울었다. 아버지도 나만큼 우셨다. 어머니는 우리 부녀를 오버쟁이 바보들이라고 놀리셨지만 나는 그 날 아버지의 눈물 속에서 아버지의 한없이 따스한 사랑을 넘치도록 느꼈다. 

핑키의 죽음은 로버트를 소년에서 어른으로 변하게 하는 경험이기도 했다. ”아, 아빠.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요”라는 로버트의 말에 아빠는 ”어른이 되려면 그런 건 이겨 내야 해”라고 말한다. 게다가 아버지의 죽음마저 겪게 되는 아픔과 시련 속에서 로버트는 현실을 수용하며 성숙해져간다. 자라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아픔과 고통을 수반해야 하는 것같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은 늘 피하고 싶고 견디기 힘든 것이지만 그것을 이겨내야만 이 비정한 현실과 비로소 당당히 맞서서 살아나갈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아름답고 예쁜 꽃들 속에서 뒹굴기만 바라던 행복한 유년은 아버지에게도 있었겠지. 그러나 현실 속에서 가족을 부양하고 지키기 위해서 아버지는 숱한 괴로움과 역경을 반복했을 것이다.

그리고 곧 나에게도 그런 날이 찾아올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에게 하시는 충고들은 그것들을 예비하기 위해 하는 것일 것이다. 우리의 아버지는 오늘도 핑키를 잡겠지. 나도 로버트처럼 피 묻은 아버지의 손에 키스를 퍼붓고 싶다.

청소시간이 다 되어서야 나는 오늘 결석한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창 밖에서는 점점 더 울음을 머금은 하늘이 웅웅대고 있었다. 나는 조금이라도 더 남은 시간동안 아버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