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서평]_바다, 소녀 혹은 키스

첫사랑의 숨결처럼 연하지만, 모든 것을 바꾸어 놓을…

김지은|문학평론가























바다, 소녀 혹은 키스 최상희 지음


그동안 우리 청소년소설들은 큼직한 사건을 쫓는 인물의 동선에 주목하면서 그들의 저돌적인 외침을 주로 다루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소녀의 단호한 팔꿈치라든가 머뭇거리는 소년의 목덜미, 그들을 밀어 올리는 바람의 냄새, 정적으로 착각하기 쉬운 얕은 파장의 소리에 집중한다.



아주 짧은 순간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경우가 있다. 그 순간은 빛이 공기를 가르고 내려앉는 것처럼 상상할 수 없이 빠르기 때문에 우리는 대개 어떤 예감을 느낄 새도 없이 바뀌어 버린 세계에 서 있게 된다. 모조리 바뀌어 버린 세계는 바다처럼 막막하다. 움직이는 것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 되어 있고, 있었던 것은 없어지며, 시간은 아득하고 공간은 낯설다.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 순간 속에 서 있는 나 자신이다. 나를 둘러싼 것이 한꺼번에 바뀌었는데 어떻게 나 자신이 변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항의를 해본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 변화를 알고, 알고 있는 나 하나만이 이 막막함을 견딜 수 있는 근거지다. 나는 나를 붙잡고 달라진 세계에 입술을 대어 본다. 조용히 숨을 불어 넣어 본다. 그렇게 다른 세계를 향한 사랑을 시작한다. 그리고 나도 서서히 달라진다.
 
『바다, 소녀 혹은 키스』에 실린 여덟 편의 단편소설은 윤곽이 선명한 소녀들의 이야기이면서 그 언저리에서 소녀를 사랑하는, 또는 소녀가 사랑하는 묵묵한 소년들의 이야기다. 그들은 파도에 몸을 맡긴 작은 거북이들처럼 조심스럽게 출렁이면서 서로 탐색하고 항해한다. 지금 우리의 세계가 그러하듯이 아무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던 아찔한 사고와 사건이 작품 가운데 있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몸부림이나 울부짖음은 저 아래에서 아직도 떠오르지 않았다. 독자는 책을 읽으면서 이만큼 육중한 무게의 추를 매단 이야기가 문장의 결을 따라 흐르거나 떠다닐 수 있다는 것에 놀란다. 우리들의 삶은 곳곳이 움푹 패어 있지만 고요히 밀고 가려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이 살아가고 있다는 걸 책을 덮을 때쯤에야 깨닫는다.
그동안 우리 청소년소설들은 큼직한 사건을 쫓는 인물의 동선에 주목하면서 그들의 저돌적인 외침을 주로 다루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소녀의 단호한 팔꿈치라든가 머뭇거리는 소년의 목덜미, 그들을 밀어 올리는 바람의 냄새, 정적으로 착각하기 쉬운 얕은 파장의 소리에 집중한다.
다 읽고 났을 때 “너는 누구였니?”라는 간결한 질문 정도가 남는다. ‘그 무렵의 청소년들’이 기억나는 것이 아니라 장면 속에서 호흡을 주고받던 ㄱ양과 ㄴ군이 떠오른다. 책장을 넘기는 시간이 키스를 나누는 시간 같다. 이것이 최상희 작가가 성장을 읽는 방식이다.
첫 작품인 「방주」는 어느 날부터 집 앞마당에 방공호를 짓게 된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다. 엄마가 돌풍에 떨어진 간판을 맞고 세상을 떠나면서부터 아들과 아버지는 어느 것도 믿지 않는다. 방공호에 차곡차곡 넣어놓은 비상식량이 썩고 허물어져도 그들은 불신만을 신뢰하며 어느 틈으로도 마음을 개방하지 않는다. 이들의 방주에 균열을 내는 것은 ‘온세계’라는 씩씩한 소녀다. 드물게 매력적인 온세계 양은 동정하지 않고 사람을 일으키는 법을 안다.

「잘 자요, 너구리」는 교통사고로 십 년간 의식을 잃었던 주인공의 방황을 그린 작품이다. 작가는 신체의 성장은 진행되지만 사회적 참여는 유예된 ‘청소년기’의 본질을 이렇게 포착해 낸다. 잠들었던 그를 해제시켜 주는 것은 다른 의미에서 지난 십 년을 상실한 발레리나 소녀다. ‘바로 전 동작을 잘하는 것’이 하늘을 나는 것처럼 그랑주떼를 해내는 비결이라는 소녀의 말은 갑갑한 유예의 시기로서 청소년기가 왜 소중한 의미를 지니는지 알려준다.
「한밤의 미스터 고양이」에는 첫사랑을 시작하는 인물들이 소유하게 되는 예민한 감촉이 높은 수위로 살아 있다. 누군가의 숨이 되고 싶고 고양이가 되어 안기고 싶고 그의 오른쪽이, 왼쪽이 되고 싶은 마음을 이처럼 아름답게 표현하다니. 마지막 장면에서 작가에게 졌다는 한숨을 내뱉었음을 고백한다.
이 소설집은 작가의 전작 『델 문도』와 언뜻 닮았지만 읽어 갈수록 사소한 차이를 나타내며 사랑스럽게 어긋난다. 훨씬 더 잘 읽히며, 어느 부분은 스르르 지나쳐도 좋을 만큼 연하다. 그러나 읽기 전과 읽고 난 후의 내가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느끼게 될 것이다.
아주 짧은 독서의 경험이 모든 의미를 바꾸어 놓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