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베타』와의 운명적 만남에 대하여

 나는 'SF&판타지 도서관'이라는 독특한 이름의 도서관을 운영하고 있다. 그대로 SF와 판타지를 전문으로 다루는 이 도서관을 처음 연 것은 2009. 어쩌다 시작한 게 어느새 7년째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기묘한 전문 도서관을 운영하다보면 여러 가지 질문을 듣곤 한다. 도서관을 왜 만들었나? 어려운 점은 뭔가? 즐거운 일은 뭔가?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SF(라는 생소한 장르)를 왜 좋아하는가?'이다. 글쎄내가 왜 SF를 좋아할까? 그때마다 고민하지만, 여느 질문과 달리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내가 왜 좋아하는지를 모른다기보다는 그것을 어떻게 알아듣게 설명할지 애매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굳이 소개하자면 내가 SF를 좋아하는 것은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영어로는 원더’(wonder)라고 쓰는 이 표현은 SF팬들에게는 상당히 친숙하면서도 참 애매한 표현이다. '원더풀!'이라고 외칠 만한 상태라고 하면 말이 될까? 여하튼 단순히 놀라운 게 아니라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운 상태라고 설명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다른 장르 작품은 놀랍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판타지나 추리, 호러나 로맨스, 무협 같은 여타 장르의 작품도 놀랍기는 하지만, SF와는 놀라움의 방향성이나 느낌이 다르다. SF를 보지 못한 이들에게는 설명하기 어려운 그런 기묘한 놀라움. 좀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과학이 펼쳐낸 상상의 세상에 대한 놀라움'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SF는 영어로 Science Fiction(사이언스 픽션)이라고 한다. 그대로 해석하면 '과학적 상상'. 과학을 이용해서 상상한 뭔가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물론 과학이라고 해서 복잡한 공식이나 난해한 이론이 쏟아져 나오거나, 과학자들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화성에서 홀로 살아가는 이야기인 <마션>처럼 과학자(식물학자)가 주인공인 작품도 있지만, 많은 SF에서 과학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게다가 SF 속의 과학은 잘못된 경우도 많다. < 주라기 공원> 처럼 모기의 피에서 유전자를 빼내서 공룡을 만들 가능성은 거의 없고, <마션>에서 화성의 모래 폭풍 때문에 죽을 위기에 처할 일도 없다. 물론 <헐크>처럼 방사능 때문에 녹색 괴물로 변하는 상황도 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SF는 과학적인 상상을 통해 만들어낸 '그럴 듯한 이야기' 우리들을 매료시키고, 우리에게 상상의 즐거움, 미래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심지어는 쥘 베른의 지구에서 달까지처럼 인류를 우주로 이끌어내기도 한다.

이처럼 SF는 재미있고 특이하지만(그리고 굳이 더하자면 유익하지만) SF만의 독특한 '경이로움'을 느끼고 빠져드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SF라면 '어렵다'라면서 알러지를 일으키는 사람이 많은 한국에서 SF의 즐거움을 나누는 것은 힘든 일이다.

이러한 상황을 넘어서고 SF에 익숙해지려면, 역시 일찍부터 SF를 접하는 것이 좋다. 필자가 어릴 때 도서관에서 SF를 접하고 그 안에서 펼쳐지는 미래의 모험담에 빠져들고 상상의 재미를 만끽했듯이, SF가 어렵지 않고 쉽다는 것을 느끼게 해야 한다. 하지만 어린이나 청소년이 쉽게 볼 수 있는 SF 작품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사계절출판사에서 펴낸 1회 한낙원 과학소설 작품집 안녕, 베타와의 만남은 그런 고민을 안고 있던 내게 하나의 해결책으로서 다가왔다. 만화를 연상케 하는 표지 그림에 180쪽이 채 되지 않는 다소 얇은 이 책에는 표제작인 안녕, 베타를 시작으로 여섯 작가의 일곱 가지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각각의 작품은 30쪽이 되지 않는 내용으로 가볍게 볼 수 있지만, 각각에는 SF가 보여줄 수 있는 다채로운 경이가 담겨 있다.

각각의 이야기는 모두 미래 세계를 무대로 하고 있지만, 왠지 지금 이 순간 우리 주변에서 벌어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그럴 듯하게 느껴진다. 이 작품들의 중심에는 귀찮은 일을 대신 해주는 대체 인간이나 엄마를 닮은-그러나 차가운 육체를 가진- 가사 로봇, 증강 현실을 통해 우리 주변을 완전히 다르게 바꾸어 놓는 고글이나 안드로이드 애완동물, 죽은 아이를 대신한 클론 아이처럼 SF에서 흔한 소재가 등장한다. 중심 소재만으로 볼 때 매우 식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여러 작가의 다양한 시점과 그 안에 녹아 들어간 한국적 삶의 모습은 SF 속에서 몇 번이고 다루어진 소재를 재발굴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참신하게 다가온다.

일곱 작품 대부분은 본체를 모방한 대체품을 소재로 한 이야기이지만, 그들 어느 것도 닮은 것이 없으며 제각기 다채로운 색채를 뽐낸다.

최영희의 안녕, 베타는 그중에서도 가장 독특한 작품 중 하나이다. '나를 대신해서 일해 줄 존재가 있다면'이라는, 누구나 한 번쯤은 가졌을 바람을 현실로 옮긴 이 작품은, 한 번의 적성 시험으로 장래가 결정되는-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사회를 무대로 똑같은 외모를 가진 '베타'라고 불리는 대체 인간에게 온갖 번거로운 일을 맡기는 상황을 그려낸다. 장래에 필요한 스펙인 '봉사 점수'만을 위해서 엄청난 돈을 들여서 구입한 대체 인간. 단지 나를 대신해서 궂은일을 해 주기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생각한 베타가 나와는 다른 생각을 갖고 행동하는 독립적인 개체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내 마음 속에는 그의 존재에 대한 고민이 생겨나고 다른 존재에 대한 존중과 ''에 대한 깨달음이 생겨난다.

안녕, 베타가 다른 존재의 가치를 깨닫고 존중해 나감으로써 어른으로 거듭나는 이야기라면 경린의 엄마는 차갑다는 외모는 닮았지만, 내면을 닮을 수 없는 기계라는 존재를 깨달음으로써 홀로 서는 이야기이다. 차가운 몸을 가졌지만, 죽은 엄마와 같은 얼굴과 목소리를 가진 로봇에 빠져들었던 ''가 그 존재가 엄마가 아닌 로봇임을 깨닫는 과정이 약간의 호러적인 느낌으로 연출되면서 진짜를 닮은 가짜가 불러오는(CG로 만든 인간을 볼 때 느끼는 듯한) 불쾌감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내는 것이 흥미롭다.

이처럼 색채도 내용도 다른 두 작품이 공유하는 것은 무언가의 본질은 닮은 외모가 아닌 내면의 가치라는 것일까? 홍유정의 지금부터 진짜역시 이러한 점을 재미있게 엮어내면서 눈길을 끈다. 작중의 ''는 병으로 죽은 아이의 복제이지만, 본체의 기억은 갖고 있지 않다. 그런 ''의 눈에는 주변 사람에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의 모습이 들어오고 그 유령과도 같은 ''를 통해서 조금씩 본체의 기억을 얻어 나간다. 기억이 없는 채로-기억에 의해 만들어진 환영일지도 모르는- 유령에게서 정보를 얻으면서 살아 가는 ''의 관점에서 바라본 이 이야기는, 앞서 두 이야기처럼 우리를 이루는 것이 외모가 아닌 내면의 기억임을 깨닫게 한다. 동시에 설사 같은 기억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클론은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개체로서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을.

한편 이인아의 레트와 진은 내면을 가진 존재라면, 그것이 설사 기계라도 하나의 개체로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안드로이드 개인 레트와 살아 있는 개인 진. 하나는 기계이고 하나는 생물이지만,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아이에겐 둘 다 모두 소중한 자신의 '진짜 개'이다. 설사 전자 부품으로 된 내부를 보았다고 해도. 하지만 이처럼 '진짜'를 찾기 위해서는 꾸며진 현실이 아닌 진실과 마주해야 할 것이다. 김란의 내 맘대로 고글은 증강 현실 기술을 이용해서 꾸며진 삶 속에서만 살아가는 주인공이 고글이 고장 난 사이 진짜의 가치를 마주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증강 현실 속의 세상에서 컴퓨터가 만들어낸 나와 게임을 즐겼던 주인공은 고글을 수리하러 다녀오던 중 '진짜 아이'와 게임을 즐기게 된다. 고글 속 세상과 달리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힘들었지만, 고글 밖 세상과의 만남으로 ''의 세상은 더욱 넓어지고 변화해나간다. 물론 그 같은 '진짜'가 항상 기대했던 만큼의 만족을 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춘기 소년들의 솔직한 감정을 해학적으로 짜깁기한 최영희의 전설의 동영상에서 다가오는 전설이라는 것이 진실처럼 말이다. 그리고 진실은 때로는 매우 슬플 수도 있다. 기러기 아빠의 미래 버전과 같은 권담의 지구인이 되는 법처럼.

안녕, 베타부터 지구인이 되는 법까지 이 단편집에 수록된 7개의 작품은 매우 짧고 쉽게 읽히지만,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주 독자층인 어린이, 청소년의 시점에서 가장 친숙하겠지만, 청년을 넘어 중년에 이르고 있는 내게도 충분한 만족을 준다.

내가 SF를 좋아하는 것은 SF가 과학적인 상상력으로 우리에게 삶의 가능성을 보여주며, 경이로운 체험을 전하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가벼운 분위기 속에 비슷한 소재를 각기 다른 모습으로 재단하여 다양하게 보여준 단편집 안녕, 베타는 정말로 매력적인 작품이다. 비록 '한낙원 과학소설상 작품집'이라는 이름을 달고, 만화 스타일의 표지여도, 이 작품은 청소년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SF의 재미와 깊이를 전하는 작품으로서 권하고 싶다. 물론, 작품 속 주인공들의 나이에 가까운 중학생 또래가 가장 좋겠지만.

 

글 l 전홍식(SF&판타지 도서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