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필름 #15 작가 한성민



십여 년 전 만난 어느 조용한 밤 

인사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그림책 작가 한성민입니다. 

이번에 <조용한 밤> 그림책을 내셨어요. 한 권의 책을 내고 나면 기분이 어떤가요?

지금껏 새 책을 만날 때면 조금은 지쳤던 것 같아요. 물론 두근두근하고 신이 나는 건 기본이지만요. 그런데 <조용한 밤>은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설레기만 했어요.
<조용한 밤>은 원화 작업이 끝난 뒤부터 책이 나오기까지 10년 정도 공백이 있었어요. 원화 작업은 2008년에 마무리를 지었어요. 중간 중간 원화를 전시할 기회가 있어서 다시금 꺼내 보곤 했는데, 마음속 깊은 곳에 넣어두었던 원화를 꺼내는 것만으로도 너무 설렜어요. 책 출간 제의를 받은 것도 한참 뒤였고요. 편집자와 판형, 원고 미팅들을 하면서 더더욱 구체화될수록 설레는 마음은 더욱더 차올랐어요. 이 책을 받고서 혼자 작업실에서 한참을 만지작거리고 안고 있었어요. 뭐라 표현할 수가 없네요. 손에 묻어난 흥건한 땀이 제 마음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 같아요.

한성민 작가는 전작들로부터 줄곧 작품에서 환경 문제를 다뤄 오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이 책도 그와 같은 선상에 있나요?
전작들과 형태는 다르지만, 본질은 같은 선상에 있어요. <조용한 밤>은 다른 책들보다 출간은 늦었지만 제가 처음 작업한 첫 그림책이죠. 어찌 보면 초심이 담겨 있달까요.
<조용한 밤>의 주인공들은 오롯이 동물들이에요. 인간이 닿지 않는 공간에서 동물들끼리 공존하는 이야기이죠. <조용한 밤> 이후에 작업한 책들로는 <빨간지구만들기 초록지구만들기> <행복한 초록섬> <안녕! 만나서 반가워> 등이 있어요. (앞서 얘기했듯이 이 책들이 <조용한 밤>보다 작업은 늦게 했지만 먼저 출간되었어요.) 이 책들에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어요. 환경과 관계를 맺는 사람, 동물과 관계를 맺는 사람 이야기들을 담았죠. 지나서 생각해 보니 자연을 좋아하는 마음에서 출발한 관심이 사회적 행동에까지 점점 넓어진 것 같아요.
디자인 작업, 일러스트레이션 작업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제 그림책을 통해서는 자연과 환경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꾸준히 그림책을 통해서 환경 이야기를 해 나갈 계획이에요. 

아프리카 여행에서의 감흥을 책으로 옮겨 오고자 했다고 들었습니다. 실제로 어땠나요?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무엇에 끌려서 책으로 만들게 되었나요?
2006년 아프리카 여행을 갔었어요. <조용한 밤>의 배경은 나미비아에 있는 에토샤 국립공원 안, 워터홀이죠.
텐트를 친 뒤 해가 지고 어둑해질 무렵이었어요. 사람들이 하나둘 워터홀 근처로 모여들더라고요. 텐트 사이로는 재칼이 길고양이처럼 지나다니고 있었죠. 가까이 있는 재칼한테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30명 안팎의 사람들이 모여서 오히려 동물이 한 마리도 없는 워터홀을 바라보고 있더라고요. 저도 뭔 일인가 싶어서 같이 있었죠. 시간이 더 지나 어두움은 더 짙어졌어요. 기다리던 사람들은 하나둘 떠났죠. 그때 코끼리가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어요.
코끼리들은 서로 장난치고 물도 마셨어요. 곧 떠나나 싶었는데 코끼리는 석상처럼 굳은 채 워터홀 근처에 서 있었어요. 코끼리가 그렇게 서 있는데,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뭔가 흔들흔들하더라고요. 처음에는 나무인줄 알았지요. 흔들흔들, 아주 천천히 다가왔어요. 알고 보니 기린이었죠. 그 기린은 다가오다 멈추고 다가오다 멈추고 그렇게 조심스럽게 다가왔어요. 어느 지점에선가 기린도 아예 멈춰 섰어요. 보는 내내 의문이 일었어요. 하도 천천히 다가오니까 중간 중간에 잠을 자나 싶을 정도였어요. 코끼리는 돌처럼 서 있고, 기린은 멀찍이 떨어져서 꿈쩍도 안 하는 그 사이, 작은 동물들이 깨알같이 물을 마시러 오기 시작했어요. 하이에나도 왔지요. 저는 하이에나가 큰 개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보니 생각보다 꽤 커서 놀랐어요. 하이에나가 나타나자 코끼리 한 마리가 밤의 정적을 깨고 달려들더라고요.
그 장면을 보는데 마음이 이상하게 찌릿했어요. 두근거리고, 코끼리한테 그냥 막 고맙고, 너무 멋있고, 그랬어요. (그때 제가 코끼리에게 완전 빠져들었죠.) 당시에는 코끼리가 여린 동물들을 보호해 주는 것 같았어요. 물론, 제가 너무 인간적으로 해석한 것일 수도 있어요. 반대로 하이에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할지 몰라요. 단순히 목이 말라서 왔을 수도 있죠. 옆에 있던 혹멧돼지 같은 작은 동물들한테 향한 게 아닐 수도 있고요. 상황이 차분히 정리되자 꿈쩍 않던 기린이 천천히 다가와 물을 마셨지요.
딱 꼬집어서 누가 누구를 지켜주었다, 이렇게 정리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관계를 맺고 함께 살아간다는 게, 사실 드러나지 않는 안쪽으로 더 깊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잖아요. 저는 그런 어떤 면을 그날 밤, 그 워터홀에 모인 동물들에게서 본 듯했어요. 그날 밤 목격한 장면들이 머릿속을 뒤흔들어 놓았죠. 한국에 돌아와서 사람들을 만나면 이 이야기를 늘 해주었어요. 꿈을 꾼 듯한 기분도 들었고요. 그림책에서 볼 법한 이야기 같기도 했어요. 그림책으로 이 이야기를 꼭 전해야겠다 싶었죠. 



원화를 페이퍼커팅으로 완성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경우는 흔치 않은 것 같은데요. 페이퍼커팅에 대해서 한 말씀 부탁드려요.
처음부터 페이퍼커팅을 한 것은 아니에요.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을 할 때 펜, 수채, 과슈 등의 일반적인 재료들을 썼어요. 그러다가 저만의 그림책 작업을 고민하게 되었고, 스타일에 대한 고민은 재료로 이어졌지요. 여러 시도를 하는 단계가 있었어요. 환경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 작업 재료부터 화석에너지로부터 나온 화학 재료들과 좀 멀어지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요.
그때 우연히 손에 쥐어진 게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페이퍼커팅 책이었어요. 어머니가 소장한 책 가운데 키리에(잘라 만든 그림) 전과도 생각났지요. 그런 책들을 기반으로 페이퍼 커팅에 대해서 조금씩 알아갔어요. 그렇게 혼자서 조금씩 천천히 시작했어요.

페이퍼커팅이란 재료는 작가에게 어떤 느낌인가요? 일전의 요안나 콘세이요 작가 같은 경우 연필에는 무언가 내밀하고 섬세한, 부서질 듯하면서도 불안한 무언가가 있다고 했어요. 모든 망설임과 손 떨림을 기록한다고요. 그것은 작가를 흥분하게 하는 긴장감으로 읽힙니다. 페이퍼커팅은 한성민에게 무엇일까요?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다른 작가들의 페이퍼커팅 작업도 한눈에 알아보죠. 모두 다른 스케치와 스킬로, 더불어 다른 칼과 다른 종이로 작업했음에도 묘한 떨림이 감지돼요. 페이퍼커팅은 공통적으로 그래픽적인 느낌들로 받아들여지지만, 작업자의 눈으로 보면 0.1mm의 펜보다 더 날카롭게 잘리는, 그 예민한 선들이 전하는 전율이 있어요. 칼은 쥔 손목 관절의 꺾임으로 중간 중간 멈춰지는 곡선들의 연속, 아주 작은 실수도 크게 보이기 때문에 호흡마저 멈춘 듯한, 그런 곡선들이 느껴지지요.
제가 실제로 작업할 때에도 감정적인 전율이 있어요. 스케치를 마무리한 뒤 페이퍼커팅에 몰입할 때면 진짜 무념무상이 되는 듯해요. 처음에 작업을 시작할 때는 작업대를 깨끗하게 치워요. 작업이 진행될수록 종이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들이 책상을 다시 어지럽히지요. 점, 점, 점……. 더, 더, 더……. 그렇게 막 혼돈을 거치다가 딱 하나의 결과물로 떨어지게 돼요. 제가 무엇을 완성했다기보다, 완성된 무엇을 받아 안는 기분이지요. 그 순간의 받아들임은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어요. 

그럼 다친 적도 있나요? 아무래도 칼로 하는 작업이어서요.
아직 페이퍼커팅을 하다 손을 베인 적은 없어요. 근데 칼을 쥔 채로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모기를 잡다가 그만…….
제 손도 중요하지만 원화도 중요해요. 날카로운 칼로부터 이 두 개를 모두 지키기 위해서 늘 칼을 너무 세게 쥐게 돼요. 그러다 보니 손가락 관절에는 늘 무리가 가죠. 

페이퍼커팅이 실제 책에서 완벽하게 그 상태 그대로 구현되는 것. 그것에 대한 아쉬움이 있을 것 같아요. 어떤가요?
원화로 보면 선명한 경계가 스캔 받고 다시 책으로 인쇄되면서 평평해지는 부분이 있어요. 그런 점을 최대한 보완하려고 첫 번째 그림책에는 그림자를 넣었죠. 그림자를 넣는 게 답은 아닌 것 같아서 두 번째 그림책엔 그림자를 뺏는데 그것도 답은 아닌 것 같아서 세 번째 그림책엔 작업 방법을 설명적으로 넣었어요. 이런 시도들을 하면서 여전히 답을 찾고 있어요.
물론 완벽하게 구현되지 못한 아쉬움은 있지만, 다른 페이퍼커팅 작가들의 작업들을 참고해 봐도 비슷한 문제들을 안고 있는 것 같아요. 그 아쉬움이 정말 중요하다면 아예 다른 방법으로 작업을 했겠죠. 아쉬움보다 아직 못해 본 페이퍼커팅 작업에 대한 기대와 관심이 커요. 계속 해 보려고요. 



페이퍼커팅으로 완성한 원화가 책으로 옮겨 갈 때 무엇을 중심에 두셨나요?
페이퍼커팅으로 작업했기 때문에 책으로 옮겨 갈 때 연출을 더 신경 쓰는 부분이 있을까요? 원화와 책은 다른 매체니까요. 페이퍼커팅으로 완성한 원화는 일반적으로 그리고 채색한 원화들과 달라 보이죠. 그림의 라인들이 전부 이어져 있기도 하고, 선인데 면으로 구현해야 하는 연출도 신경 써야 하고요. 또 몇 가지 단출한 컬러로 표현되어야 해서 부담스러울 때도 있고요. 이런 모든 특성 때문에 강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요. 그렇지만 그런 것들보다, 모든 그림들이 그렇듯이 내용적인 부분들, 그림 안에 숨겨둔 장치들에 더 많은 신경을 써요.
예를 들어 <빨간지구만들기 초록지구만들기>에서는 프레임의 변화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또, 글로 굳이 쓰지 않아도 그림 하나하나에 이야기들을 숨겨두려고 했고요.
<조용한 밤>은 원화랑 책의 형태가 좀 달라요. 책의 하단 그림만 원화로 있고 윗부분인 밤은 원화가 존재하지 않아요. 책을 만들 때, 윗부분을 확장한 거예요. 그림을 잘 보면 검은 프레임이 있는데, 이 프레임이 상하좌우로 확장되었다고 볼 수 있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더 넓게, 더 멀리……. 검게 확장된 부분을 가지고 더 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 낼 수 있어요. 그 공간은 코끼리와 기린이 다가온 길일 수도 있고, 혹은 아기 코뿔소와 엄마 코뿔소가 가야할 길일 수도 있지요. 혹은 달빛이 비추지 않는 어두운 공간일 수도 있고, 달마저 삼켜버린 상상의 심연 공간일 수도 있어요. 페이퍼커팅의 단순함, 선과 면의 뒤섞임 같은 특징들을 내용과 연결시켜서 상상력을 더 확장시킬 수 있기를 바랐어요. 그런 의도들을 꼼꼼히 책으로 담아 보고 싶었지요.
물론, 원화만이 가지는 맛이 있어요. 책에 원화 그대로가 담기지 못한 아쉬움은 전시를 통해 풀어보려고요. 독자들과의 여러 만남을 이어가려고 해요. 

어떤 분들이 이 책에 감흥하리라 생각하나요? 작가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예상 독자가 있을까요?
너무 빨리 살아오느라 옆을 보지 못한 사람들? 아니면 동물들? 하하. 동물들은 눈이 옆에 달려 있는데, 사람은 두 눈이 앞을 향해 있어요. 그래서 사람이 앞만 보며 달리는지도 몰라요. 눈이 옆이 아닌 앞에 달린 ‘사람들’과 이 책을 나누고 싶어요. 



질문을 좀 전환해 볼까요? 보통 작업은 하루의 언제쯤 하시나요?

싱거운데, 정신이 깨어 있을 언젠가 한답니다. 정해진 시간은 없는 것 같네요. 

작업을 하지 않는 시간에 별도로 하는 것이 있나요? 일테면 취미라든가.
쓸데없는 것을 좋아해요. 그 가운데서도 살아가는 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잡다한 정보들을 무작정 읽거나 보는 걸 좋아해요. 과학 잡지 읽기, 다큐멘터리 보기 같은 거요. 

다음 작업에 대한 이야길 좀 해 주시죠. 다음 작품도 페이퍼커팅인가요? 어떤 내용을 다루나요?
지금으로는 두 가지 작업을 진행하고 있어요. 하나는 로드킬에 관한 이야기예요. 이 작품도 페이퍼커팅으로 작업하고 있지요. 로드킬로 죽어간 동물들을 위로하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했어요. 다른 하나는 <조용한 밤>과 이어지는 연장에서 생각하고 있어요. 비를 기다리는 사자들에 대한 이야기랍니다. 이 역시 페이퍼커팅 작업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