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 작가 취재 노트1

① 공간감각 넓히기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취재 노트 1
꿈으로의 횡단, 시베리아 횡단열차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

경성에 사는 윤형만 자작은 소작지에서 딸 채령의 몸종을 구한다. 몸종이 될 아이가 가기 싫다며 울자 수남이 나서며 한 말이다. 그 한 마디는 가난한 소작농의 딸인 수남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우리는 살면서 인생의 계기가 될 만한 일들과 몇 번쯤은 맞닥뜨린다. 그런 사건이 우연히, 돌발적으로 일어난 것 같지만 실은 그동안의 삶이 준비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

수남의 그 말 또한 엄마 배 안에서부터 품어 왔던 간절한 바람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 역시 오랜 세월 바이칼 호수를 가슴에 품었기에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오를 수 있었다. 2014초여름, 친한 동료 작가들과 함께였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대한 기대도 바이칼 호수에 대한 환상 못지않았다. 기차를 타고 끝없는 벌판을 달리며 대지의 광활함을 온몸으로 느끼고 싶었다.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의 무대는 한국에서 시작해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 등에 걸쳐 있다. 너른 무대에 인물들을 풀어놓으려면 나부터, 좁은 땅덩어리에서 사느라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든 공간감각을 넓힐 필요가 있었다.

러시아의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세상에서 가장 긴 철도다. 총 길이 9,334㎞로 지구 둘레의 3분의 1에 가까운 거리이며 공사 기간도 무려 25(1891~1916)이나 걸렸다고 한다. 시발역에서 종착역까지 67일이 걸리는데 기차를 타고 가는 동안 시간대가 일곱 번이나 바뀐다. 우리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차를 타고 나흘을 달려 바이칼 호수가 있는 이르쿠츠크 역에서 내린다. 이르쿠츠크 시내에서 하루 잔 다음 호수 안에 있는 알혼섬으로 가 이틀을 묵는 여정이었다.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과 기차 안에서 보낼 사흘 밤과 나흘 낮은 얼마나 즐겁고 낭만적일 텐가. 러시아 문학이나 영화에서 본 기차 객실이 떠올랐다. 우리를 태운 기차는 자작나무 숲을 스쳐 가고 야생화가 무리 지어 핀 들판도 지나겠지. 작은 역들과 사람 사는 모습은 눈물겨울 테고 텅 빈 황무지마저 감흥을 안겨 줄 것이다. 나는 떠나기도 전에 감동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환상은 깨지라고 있는 것인가. 기차의 4인용 객실은 손바닥만 한 탁자와 양쪽 벽면에 붙어있는 좁고 긴 의자가 다였다. 2층으로 이루어진 의자들은 침대 겸용이었다. 객실의 이부자리는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고, 기차 한 량 당 하나뿐인 좁은 화장실은 세면장이기도 했다. 기차 안의 모든 안내문이나 설명문은 러시아 글자로만 돼 있었고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승무원들은 아주 간단한 영어밖에 할 줄 몰랐다. 이렇게 불편하고 불친절한 환경에서 나흘을 어떻게 보내나 싶어 심란했다.

당장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식사였다. 식당은 있지만 맛없고 비싸다는 여행사의 조언에 우리는 각자 즉석 밥과 반찬, 컵라면 등을 준비해 갔다. 기차엔 온수 통뿐이라 즉석 밥을 어찌 조리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런데 여행에는 어떤 불편함이나 어려움도 재미로 만드는 마법이 숨어 있는 것 같다. 함께하는 식사는 설익은 밥마저 꿀맛으로 바꿔 주었고, 불편한 시설조차도 특별한 경험으로 여겨졌다.

철컥거리는 기차 소리를 자장가 삼아 하룻밤 자고 나자 더더욱 자유가 실감 나기 시작했다. 인터넷은커녕 통화도 잘 되지 않는 환경이 우리를 완벽하게 일상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 기차에 있는 동안 우리는 먹고, 자고, 배설하는 생리적 욕구만 해결하면 됐다. 말 그대로 강제 휴식이었다. 언제 이럴 기회가 또 있을까. 아침 먹고 나서 즉석 밥 담가 놓은 뜨거운 물 관리하며 점심 준비하고, 점심 먹고 나서 또 저녁 준비하고……. 그뿐 온종일 빈둥거리는 단순한 일상이 눈물겹게 좋았다.

기차가 오래 정차할 때면 내려서 바깥 구경도 하고 난전에서 그 지역 음식이나 채소, 과일 등을 사다 먹었다. 밤에는 잠깐씩 기차에서 내려 총총한 별을 보기도 했다. 같은 칸에 탄 러시아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우리는 함께 가는 동안 낯이 익은 그들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다. 도도한 매력이 넘쳐흐르는 아리따운 차장에게는 나타샤’, 나타샤가 싫다는데도 계속 들이대는 청년에게는 진상스키’. 무역업을 하고 한국에도 왔었다는 잘난스키와는 소주와 보드카를 바꿔 마셨다.

무슨 일이 생기는 게 더 어려울 것 같은 기차 안에서도 사건은 벌어졌다. 우리 일행 중 두 사람이 하바롭스크 역에서 내렸다가 기차를 놓쳤다. 말도 안 통하는 시베리아 벌판에 남겨지다니. 낙오한 당사자들이나 기차에 타고 있는 우리나 무섭고 걱정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여섯 시간 만에 무사히 귀환한 그들과 떠들썩하고 감격적인 상봉을 했고, 택시를 타고 시베리아 벌판을 질주해 기차를 따라잡은 모험담은 그 자리에서 전설이 됐다. 우리는 한마음으로 모험의 주인공들을 부러워했다.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

작가란 늘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거기에 가고 싶어 몸살을 앓는 사람들이다.
그러는 사이에도 기차는 쉬지 않고 달렸다. 밤낮으로 달리는데도 계속 갈 데가 있다는 사실은 매 순간 경이로움으로 다가왔고 그때마다 새삼 가슴이 벅차올랐다. 저녁 무렵이면 해는 다시 뜨지 않을 것처럼 자신의 남은 빛을 아낌없이 세상에 펼쳐 놓았다. 붉게 물든 하늘과 대지로 이루어진 세상은 태고의 세계처럼 장엄했다. 그 시간이면 우리는 수다를 잠시 멈추고 각자의 상념에 잠겼다. 오롯이 자신과 만나는 순간이었다.


안이 캄캄해지자 대지를 물들인 붉은 빛이 남아 있는 풍경이 어슴푸레하게 보였다.
“안이 환할 때는 밖이 하나도 안 보이더니 불을 끄니까 보이네요.”
수남이 중얼거리듯 한 말이 강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밝은 빛 속에 있는 사람은 남의 어둠을 알지 못하는 법이다. 자신이 그나마 인간답게 살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첩의 자식이었기 때문인지 몰랐다. 자신이 윤 자작 집안의 당당한 적자였어도 지금처럼 살고 있을까? 그렇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자작의 아들, 자산가의 후계자 신분을 한껏 누리며 아버지처럼 괴물이 돼 가고 있었을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었다.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 2』, 「환한 밤」 중에서
실내등을 끄고 차창 밖 풍경을 볼 때 떠오른 문장으로 만든 장면이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탔던 게 꿈속의 일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틀리지 않다. 오랜 꿈을 실현하는 시간이었으니까. 그 여행에서 돌아온 뒤 가끔 나는, 내가 지금 인생이란 열차에 탄 채 삶의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열차의 흔들림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철커덕철커덕, 바퀴 소리가 내게 말한다. 기차가 내려놓기 전까지는 끝나도 끝난 게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