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살의 인생론, 나의 인생에 물음을 던지다 : 박지현

2011 1318 독후활동대회 글쓰기 부문 장려상
전남대학교 사범대학 부설 고등학교 2학년 박지현

 
 
만약 학교에서 우연히 가게 된 독서캠프의 기회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이 책을 읽어 보지 못했을 것이다. 솔직히 ‘열일곱 살의 인생론’이라는 제목을 보고 거창하게 인생을 왈가왈부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과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 하나도 파악하기 힘든데, 어찌 인생을 판단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책을 읽고 나서 인생에 대한 정확한 해답이란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이기에 이 책에서도 얻을 수는 없었지만 내가 그동안 잊어버리고 있던 내 삶의 질문들을 다시 끄집어 내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다.  

이 책은 돈, 짝사랑, 열등감, 의미, 가치관, 적성, 인생 진도표, 말하기와 글쓰기, 중독, 이미지 메이킹, 용서, 변화, 관계, 성욕, 애도라는 총 15개의 주제로 이루어져 있다. 보통은 책을 차례부터 보지 않는 편이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독서캠프에서 사회자로서 토론을 이끌어나가야 할 막중한 책임을 지게 되자 한 주제 한 주제 꼼꼼하게 읽게 되었다. 오히려 나에게는 이 책임감이 책을 더 깊게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 듯 하다. 

여러 가지 주제들 중에서 생각보다 많은 부분이 기억에 남는데 첫번째로 그 중 앞부분이었던 ‘짝사랑’에 관해 말하자면, 나는 사회 심리학자였던 에리히 프롬의 “사랑하려면 혼자 설 수 있어야 한다.”라는 말에 크게 공감했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사랑이라는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공감이었는데,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면서 가장 크게 깨달았던 점이었다. 그 경험 이전의 나는 무언가를 좋아하거나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한없이 빠져들어 그 일이 부정적으로 끝이 나고 나면 오랫동안 후유증 아닌 후유증을 겪어야만 했다. 그로 인해 나는 잘못된 방향으로 전환해 오히려 사랑이라는 소중한 감정을 기피하고만 있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어쩔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을 다시금 느끼고 있었다. 사랑의 감정이라는 것은 피한다고 해서 피해질 것들이 아닌 것이었다. 인간의 이성도 어쩌면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내 자신이 머릿속으로 그 감정을 통제한다고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결국 새로운 사람과의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다. 그 후로 나는 점점 즐겁고 행복한 감정에 젖어들어 갔다.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게 사랑과 마주했고, 매 순간 순간 최선을 다했다. 지금까지의 다른 사랑의 추억이 무색하리만큼 나는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고, 내 자신 그 이상으로 그 사람에게 빠져 들어가는 내 모습을 보았다. 그때, 나는 지난 아픔들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내 자신에게 한 가지 다짐을 했었다. 사랑에 최선을 다하는 만큼 내 자신에게도 최선을 다하자고. 시작이 있다면 끝도 존재하듯이, 이 사랑도 결국에는 비극적 결말을 맺고 말았다. 한동안 아니 꽤 오랫동안 쌓인 추억에 괴로워하고 아파했지만 사랑을 하는 동안에도 내 자신도 돌보았기 때문인지 오히려 아픔을 겪어내면서 더 성숙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만약 이제 사랑을 시작하는 누군가가 내게 사랑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이냐고 묻는 다면 나는 이 말을 전해주고 싶다. “다른 이를 사랑하는 동안에도 자기 자신도 돌보아야 한다.”라고. 또한 안타깝게 사랑이 끝나버린 누군가가 이제 더 이상 사랑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을 때, 나는 이렇게 말해 주고 싶다. “어떤 철학자가 말했던 것처럼 사랑이 변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이 변하는 것이다.”라고. 수백 번 수천 번 연습을 해도 부족한 사랑에 어떻게 방법이 있겠냐마는 전보다는 더 열심히, 제대로 사랑하기 위해서 나는 내 경험으로 또 책이라는 간접적 경험들로 깨달은 이 두 가지 말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용감하게 다가오는 사랑에 마주할 것이다.  

두 번째로 기억에 남는 주제였다면, 열등감일 것이다. 책 속의 어떤 말이 특별하게 기억에 남았다기보다는 이 열등감이라는 단어 자체가 나에게 여러 가지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이 책을 읽을 당시에는 중간고사를 얼마 앞두지 않은 시험기간이었다. 열등감이라는 건 다른 누구보다 앞서야 하는 시험하고 가까운 단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굳이 시험기간이 아니었더라도 대학에 가기 위해 입시공부를 하고 있던 나에게는 입시경쟁이라는 환경이 열등감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었다. 대학에 가고 싶어 공부를 한다기보다는 원래 공부 자체에 의미를 두고 하는 편이 강했기 때문에 공부하는 자체에는 스트레스를 크게 받지 않았지만, 그 주위의 환경이 나를 압박했다. 내가 원하지 않아도 남들 시선을 신경 쓰게 된다는 사실과 그동안 받은 기대와 관심이 거대한 짐으로 나를 억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원치 않게 자꾸 남들과 내 자신을 비교하게 되었다. 비교하면 할수록 나보다 우위에 있는 친구들에게서 열등감을 느끼게 되었다. 질투심을 느끼지 않아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이 열등감은 자꾸만 내 자신이 스스로를 평가절하하고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는 자꾸 의미 있고 내가 추구하는 일들을 하기 보다는 필요에 의한 일들을 하게 되었다. 책을 읽기 전에도 책을 읽고 나서도 끊임없이 내 자신을 독려하고 비교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어쩌면 입시경쟁을 떠나서 무한 경쟁 사회에서 사는 상황에서는 앞으로도 항상 하게 될 고민인 듯하다. 아직도 앞으로도 쉽사리 해결되지 않을 문제이겠지만 다른 모든 삶의 문제들이 그렇듯이 끊임없이 마주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왜냐면 나는 내 자신의 삶을 살고 싶으니까. 다른 사람에 의해서 결정되고 판단되는 삶이 아니라, 내 자신이 지향하는 삶의 목표를 향해 부단히 달려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찌 보면 열등감 자체가 오히려 나태해진 내 자신을 자극할 수 있는 촉진제가 되진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무엇이든지 과해서 문제이지 않은가. 피할 수 없는 문제라면 조금 더 즐겁게 맞서 보자고 내 자신을 응원해본다.

세 번째로 크게는 아니었지만 ‘의미’라는 주제에서 소주제에 ‘욕망의 버블 붕괴, 무엇말고 어떻게에 주목하기’라는 것이 있었다. 이것을 통해 나는 그동안 내가 너무나도 무엇을 할 것인가에만 집중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에 집중하다 보니 경쟁을 함에 있어서도 내 자신이 무언가를 함에 있어서도 그 하나하나의 가치에 더 집중하기 보다는 더 새롭고 더 다양한 경험을 더 많이만 하고자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나를 하더라도 그 속에 깊숙이 빠져들면 많은 것을 할 때 보다 더 값진 것들을 많이 배울 수 있음을 잠시 잊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열등감’과도 관계가 있다. ‘무엇’이라는 것은 소유의 양 자체에 집착을 하기 때문에 더 많이 가진 사람과 비교하게 된다. 하지만 ‘어떻게’를 생각한다면 가진 양이 아닌 내 자신이 어떻게 할 것인가에 집중하기 때문에 진정한 배움을 얻을 수 있다. 이를 보면, 삶의 문제라는 것은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닌 서로 연관되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네 번째로 ‘가치관’이라는 주제에 있어서는 ‘승진 노이로제’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승진 노이로제라는 것은 더 많은 책임과 업무가 두려워, 높고 책임 있는 자리로 승진하기를 두려워 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중학교 때부터 줄곧 여러 가지 활동을 하며 ‘리더’라는 자리에 많이 서서 활동했던 까닭인지 나에게는 나도 모르는 ‘승진 노이로제’가 생겼던 것 같다. 일단 하고 나면 그 누구보다 열심히 잘 할 자신이 있음에도 그 일을 맡으면서 생기는 스트레스와 부담이 두려워서 자꾸만 도전을 피하고 있었다. 그래서 솔직히 고등학교에 와서 부회장에 출마하고 나서도 수많은 걱정과 회의가 우선적으로 들었던 건 사실이다. 또한 그 경험이 실패로 끝나고 나니 덴 가슴에 다른 일에 도전할 때마다 지레 겁을 먹곤 했었다. 용기가 없어서 도전을 하지 않는다는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기에 그 당시에는 앞으로도 계속 그럴까봐서 많이 걱정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고 오히려 그때의 실패로 인해서 더 의미있는 일들을 많이 겪고 나니 한편으로는 이 ‘승진 노이로제’와 ‘덴 가슴’이 어떤 면에서는 나에게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새로운 일을 할 때마다 겁이 나고 두려움이 생기니 더 신중하고 꼼꼼하게 행동하고, 더 많이 준비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승진 노이로제’라는 말이 생길 정도면 나와 같은 고민을 했던 사람이 꽤나 많을 것이다. 다른 누군가가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어려움을 겪었다니 나에게는 더 위로가 된다. 앞으로는 두려움을 넘어설 용기와 자신감을 가지기 위해 더 많은 도전을 해봐야 겠다.

다섯 번째로는 ‘말하기와 글쓰기’ 주제에서 ‘호감을 사는 일은 논쟁의 승리보다 아름답다’라는 소주제가 기억이 난다. 이는 내가 출전했던 두 번의 독서토론대회와 연관이 있다. 1학년 때 처음으로 독서토론대회에 나갔었다. 뽑히지 않을 거라는 기대와는 다르게 운이 좋게도 선발되어 학교 대표로 대회에 출전하게 되었는데, 사전정보 없이 나와 같이 출전했던 사랑이라는 친구 둘이서 책을 읽고 준비한 내용을 가지고 나가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가 예상했던 방향과는 전혀 다르게 대회는 진행되었고, 결국 본선에도 올라가 보지 못한 채 떨어지고 말았다. 물론 상을 받게 되기는 했지만, 솔직히 우리에게는 하고 싶은 말도 다하지 못했기에 아쉬움이 훨씬 많이 남았다. 그리고 시간을 재면서 몇 마디의 의견 가지고 판단하는 대회 진행방식에도 많이 실망했었다. 그렇게 좋지 않은 추억만을 남기고 끝난 대회를 1년 뒤에 다시 한 번 나가게 되었다. 저번보다 준비를 더 많이 하긴 했었지만 그래도 시간적 여유나 누군가의 도움을 많이 받고 나간 게 아니라서 부족하긴 했었다. 그리고 본선에 올라갔음에도 저번과 같은 상을 받았다. 하지만 우리는 이번 경험에서 더욱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시작하기 전, 두 번째에도 함께 출전하게 된 사랑이와 나는 서로 이번만큼은 이기고 지고를 떠나서 우리가 하기로 한 말들, 하고 싶은 말들만은 자신감을 가지고 다 하고 끝내자고 약속을 했었다. 승패를 떠나 즐긴다는 마음으로 참여한 대회에서 나는 긴장을 하기 보다는 오히려 여유가 생겼고, 이야기를 하고 상대방의 의견을 듣는 내내 미소 또한 유지할 수 있었다. 개인적인 판단이기는 하지만, 첫 번째 예선에서는 그러한 자세도 어느 정도 높은 평가를 받은 듯했다. 그리고 반대 의견을 말하던 상대방 친구들도 처음에는 긴장한 자세가 역력하더니 내가 지은 미소를 보고는 웃음을 짓는 등 긴장이 풀린 듯한 모습이었다. 비록 저번보다 훨씬 뛰어난 결과를 얻어낸 것은 아니지만, 토론 자체와 준비과정을 즐기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많은 것을 배운 듯하다. 그리고 이기고 지고 결과보다는 토론을 해 가는 과정에서 서로 즐거운 마음으로 참여한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다. 

여섯 번째로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 겪은 방황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단어인 ‘용서’가 있다. 프랑스 속담에는 “모든 것을 이해하면 모두 용서할 수 있다.”라는 말이 있다. 남녀관계에서부터 가족관계까지 사람과 관계를 맺음에 있어서 나는 그 무엇보다 용서라는 단어가 중요한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우선 사랑에 있어서의 용서를 말한다면 책의 소주제처럼 ‘용서의 시작은 상대가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나 타인의 의지로 이별을 맞고 나면 상대방에게 분노하고 증오심을 품게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는 결코 나에게 있어서도 그 상대방에게 있어서 좋은 일이 아님을 최근에서 알게 되었다.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를 용서함과 동시에 내 자신도 용서해야 한다. 진정으로 용서하고 그와 나의 행복을 바랄 때만이 모두가 행복해 질 수 있고, 또 다른 사랑을 시작할 수 있다. 용서라는 단어는 사랑에 국한해서만이 아닌 나에게는 학창시절 최대의 방황이었던 작년의 경험에도 적용된다. 나는 작년에 정말이지 지금껏 겪었던 방황의 기억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러운 상태였고 매일매일 우울함과 좌절감만이 계속되고 있었다. 가장 처음에는 가족들의 불협화음으로부터 출발했다. 자꾸 가족들에게서 벗어나 주위만을 맴도는 아빠의 모습을 보면서, 예전에 내가 정말로 사랑하고 존경했던 이상을 사랑하고 항상 정직하며 의지적이었던 모습과는 달리 언제부턴가 현실에 찌들어버리고 돈에 휘둘리는 것만 같은 삶을 사는 아빠의 모습을 보면서 정말 많이 방황했다. 분노는 곧 슬픔이 되고 잦은 슬픔은 우울감으로 내 자신을 좀먹어 들어갔다. 이는 곧 내 자신에 대한 좌절로도 이어졌다. 고등학교 들어오고 나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 자체도 벅찬 데 집안의 새로운 분위기까지 겹치니, 더구나 그 분위기가 결코 좋은 것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더욱더 내 삶을 회의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해 의미를 잃기 시작했고 내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자 했다. 하루하루 계속되는 고통으로 결국 내 자신은 절벽에 다다른 듯 했다. 절망의 끝에 다다르니 더 이상 갈 데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포기하기로 했다. 삶을 포기하는 대신 미워하는 일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아빠를 이해하고자, 내 자신을 이해해보고자 노력했다. 이 노력은 기나긴 시간이 더해져 결국 아빠를 그리고 나를 용서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 경험은 이후에도 내가 다른 사람들과 갈등을 겪을 때마다 그들을 이해하고 용서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마지막으로는 수많은 다른 의미 있는 주제들을 제쳐두고 나는 ‘성욕’이라는 주제에 대해 과감히 논해 보고자 한다. 청소년기에 있어서 이 주제는 내가 이 부분을 쓰고 있는 동안 주변 시선을 의식하게 될 정도로 굉장히 민감한 주제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에서 그리고 특히 우리나라에서 이 부분은 굉장히 폐쇄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실행되어서는 안 될 금기적인 것이며, 드러낼 수 없는 비밀과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을 겪게 되면서 그리고 청소년기라는 시절을 지내게 되면서 나또한 이 금기시 되는 단어를 느꼈던 것은 사실이고 수많은 죄책감을 느꼈었다. 하지만 결국 이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을 깨닫고는 다른 측면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성욕이 금기시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조금 더 근본적인 측면을 생각하게 되었고, 관련한 책들도 읽게 되었다. 이 책에 나온 것처럼 그리고 한 철학자가 말했듯이 어쩌면 성욕이라는 부분은 인간의 세대 유지에 있어서 본능적이고 필수적인 부분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꾸 부정하고 숨기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내 생각에 그동안 성욕이 분출되는 방법 자체가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본다. 시대마다 그것에 대한 판단을 다시금 하기는 하지만 몇몇 고대사회들과는 달리 지금은 성욕을 금기시해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에 대해 조금 다른 생각을 했으면 한다. 인간이 어차피 느끼게 되는 부분이라면 무조건 적으로 금기하기 보다는 긍정적으로 발현하거나 승화시킬 방법을 생각해야 되는 것이 아닐까. 특히나 가치관이 형성되는 청소년기에 더욱더 올바른 성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성관계’에 있어서도 무조건적으로 비판하고 부정할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전제조건’에 대해서 질문을 먼저 던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질문들을 생각함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전제조건’에 대해서 자꾸만 잊어버리곤 하는데 그 중 가장 큰 질문이 이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숨기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문제를 마주할 때만 긍정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다. 

책을 읽기 전 가졌던 편견과는 달리 주제 하나하나를 읽으면서 수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에 대해서 많은 질문들이 덧붙여져 갈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금 느꼈듯이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내 삶에 대한 질문들을 끊임없이 잊지 않고 던지며 조금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