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양선 작가의 『밤을 건너는 소년』 집필 후기

이야기의 시작


| 최양선

소설의 시작을 어디부터라고 말할 수 있을까. 노트북 앞에 앉아 있는 순간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어느 날 갑자기 낙엽이 떨어지듯, 연약한 실마리가 툭, 내 앞에 떨어졌을 때부터라고 해야 할까.
소설 『밤을 건너는 소년』은 <렛미인>을 보고 나서 시작된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뱀파이어 소녀 이엘리와 길을 떠나는 인간 소년 오스칼의 해맑은 웃음이 슬펐던 것은, 사랑하는 이엘리를 위해 인간을 죽여 피를 대 줄 오스칼의 미래가 짐작되기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영화의 잔상은 뱀파이어를 소재로 글을 쓰고 싶다는 바람을 품게 했지만, 세상에는 너무나 매력적인 뱀파이어가 많아서 섣불리 시작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현대적인 뱀파이어 이야기를 쓰고 싶었고 그만큼 새로운 뱀파이어의 모습을 구현해 줄 캐릭터가 간절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케이블 채널에서 방영한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았다. 그곳에서 뱀파이어 시온이의 모델이 된 청년을 만나게 되었다. 나이는 20대 중후반이었지만 그에게서는 소년의 느낌이 강하게 뿜어져 나왔다. 그 청년은 볼트를 손에 쥐고 노래를 불렀다. 목소리는 간절했고 절실한 노래 가사와 선율은 내 마음을 흔들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목소리에서 오묘하게 느껴지던 아련함. 노래를 부를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눈빛과 표정이 그만의 특별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 듯 했다. 순수해 보이면서도 언뜻언뜻 차가운 느낌도 배어 나왔다.
그만의 감성에 이끌려 노래를 찾아 듣다가 우연히 팬 커뮤니티에서 (팬이 합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한 장의 사진을 보게 되었다. 하얀 얼굴, 매서운 눈빛의 그는 검은색 마술사 복장을 입고 있었다. 노란 눈의 검은 고양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사진을 본 순간 마법을 부리는 뱀파이어가 떠올랐다. 마술을 가장한 진짜 마법을 부리며 피가 아닌 인간의 시간을 빨아들이는, 진화한 뱀파이어가.
그 사진을 휴대폰에 저장해 놓고 틈틈이 살펴보며 글을 써 나갔다. 동시에 노래를 부르는 청년의 동영상과 사진을 찾아보며 눈빛, 표정, 손의 모양, 몸에서 풍겨 나오는 분위기 등을 눈과 마음에 담았다. 소설 속 뱀파이어 시온이의 외형적인 모습과 분위기는 저절로 그의 실제 모습과 닮아 갔다.
새로운 뱀파이어 캐릭터가 선명해진 뒤 철진이와 성주, 박쥐 등의 캐릭터를 만들었다.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박쥐에게 빠져드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원고가 완성되고서도 한동안 박쥐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아마도 영화 <렛미인>의 오스칼에게 가진 마음과 비슷한 감정이 아니었을까. 그렇게만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제법 시간이 지나, 갑자기 한 사람이 떠올랐다.
햇수를 더듬어 보니 거의 18년 전이었다. 그 무렵 나는 아르바이트로 동대문 시장의 상인들을 만나 인터뷰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밤을 새워야 했기에 일이 끝나면 카페에 머무르며 첫차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 당시 동대문에서 집 근처 정거장까지 가는 버스가 있었다. 버스 안에 승객은 나 혼자뿐이었다. 덜컹거리는 버스에 몸을 맡기자 졸음이 밀려와 눈을 감고 있었다. 버스가 멈추자 내 눈도 저절로 떠졌다. 창밖을 보니 종로 어디쯤이었다. 모자부터 신발까지 모두 검은색인 남자가 버스에 올라탔다.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분위기로 봐서는 당시 내 또래로 보였다. 그는 내가 앉은 좌석보다 뒤쪽에 자리를 잡았다.
버스가 출발해 다시 눈을 감고 있었는데 누군가 내 옆자리에 앉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놀라 눈을 떠 보니 그 남자였다. 잠이 달아나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내게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동대문에서 오는 길이라고 말했다. 그는 나이트클럽 웨이터로 일한다며 명함을 내밀었다. 언제 한번 놀러 오라면서. 그의 명함을 받았던 것은 확실히 기억이 나지만 명함에 쓰여 있던 내용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는 개봉동 어디쯤에서 내렸다. 종로에서부터 십오 분여 동안 나란히 앉아 왔음에도 그 당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아무리 더듬어 보아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는 버스에서 내린 뒤 내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버스가 출발하고 나서야 고개를 돌려 그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는 모자를 꾹 눌러쓰고 깃을 세워 목을 가리고 양팔을 엇갈려 양쪽 겨드랑이에 손을 끼고는 빠르게 걸었다. 단 한 자락의 빛도 몸에 닿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는 듯이. 나는 하염없이 멀어지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뒷모습에서, 바닥에 드리워진 그림자에서 왠지 모를 쓸쓸함을 느꼈던 것 같다. 뒤늦게 그의 모습과 박쥐의 느낌이 닮아 있다는 것을 알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18년이라는 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를 떠올린 적도 만난 적도 없었는데 그날의 잔상이 내 몸 어딘가에 깊숙이 남아 있었던 걸까.
그 뒤로 오랫동안 버스에서 만났던 그 시절의 청년을 생각했다. 동시에 이 소설의 시작에 대해서도 더듬어 보았다.
늘 새로운 이야기를 찾느라 앞을 보고 있다고 여겼지만 이야기가 될 마법의 씨앗은 애초에 내 안에 머물러 있었던 것은 아닌지. 현재에서 만난 시온이와 과거에서 길어 올린 박쥐가 만나 한 편의 작품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이야기가 시작된 시점을 찾는 것이 무색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영화 <렛미인>을 보기 전부터 나는 이 소설을 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글을 쓰면서 의식할 수 없었던 과거의 기억이 떠올라 현재와 교차하는 일들이 신기하다. 그것을 통해 나를 발견하게 되는 일도. 이번 일로 일상의 파편들이 내 몸 안에 살아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기로 했다. 생물의 기억을 건져 내기 위해 나를 깊이 들여다보는 일도 게을리하지 말자고 결심해 본다. 오감을 열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어느 날, 문득, 만나게 될 마법의 씨앗을 기대하며.

 


밤을 건너는 소년

저자 최양선

출판 사계절

발매 2017.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