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열세살과 화해하며 : 한미숙

제3회 독서감상문 대회 일반부 우수상
한미숙

 
 
어느 날, 학교가 끝나고 친구들과 집으로 가고 있을 때였다. 저 언덕 너머로 내 키만한 드럼통을 자전거에 싣고 힘들게 올라가는 사람이 보였다. 아버지였다. 순간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혹시라도 아버지가 나를 알아볼까 봐 전전긍긍했다. 친구들과 헤어지고도 나는 하릴없이 동네골목을 천천히 돌다가 집으로 들어갔다. 그때 나는 중학교 1학년, 열세 살이었다.

아버지한테는 언제나 식당에서 거둬오는 잔반 냄새가 났다. 아버지의 그 냄새를 나는 로버트 엄마가 말하는 ‘성실한 냄새’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과일 도매업을 하시던 아버지가 돼지를 키우기로 하면서 아버지에겐 더 이상 달큰한 과일향내를 기대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눈이오나 비가 오나 식당 시간에 맞춰 하루에 세 번씩 잔반을 걷으러 다니셨다. 아버지의 ‘임무’는 돼지를 잘 먹여 암퇘지에게 새끼를 많이 낳게 하거나 때에 맞춰 돼지를 비싼 값으로 파는 것이었다. 

이 책은 나에게 ‘성실한’ 일꾼인 아버지와 내가 왜 화해할 수 없었을까 하는 문제를 맞닥뜨리게 했다. 돼지를 잡는 자기의 아버지를 ‘훌륭한 도살꾼’으로 인정하는 로버트로 인해, 나는 나의 열 세 살로 되돌아가는 내 모습을 다시 바라봐야 하는 사뭇 불편한 심기가 되었다. 

오랜 세월동안 로버트의 아버지(헤븐 펙)를 따라나닌 지독한 냄새는, 사람들에게 그가 글씨를 모르는 것과 셰이커 옷을 입는 것 모두가 흉잡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헤븐 펙은 ‘더러운 것을 씻어내는 비’와 ‘눈물로 젖게 할 만큼 아름답게 펼쳐지는 황혼’ 그리고 ‘ 바람이 불어 만들어 내는 구슬픈 음악 소리’를 느끼며 자연의 가치를 알고 있는 진정한 부자였다. 

이른 아침, 돼지들이 일제히 꿀꿀대는 소리에 나는 어렴풋한 잠에서도 아버지가 지금쯤 무슨 일을 하는지 눈을 감고도 알 수 있었다. 아버지 발짝 소리를 핑키 같은 돼지들이 먼저 알아듣고 밥을 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밥을 보채며 잘 먹는 돼지들은 건강했다. 첩첩거리며 돼지들이 잡을 먹을 때는 언제 아우성을 쳤는지 모를 정도로 조용했다. 아버지는 그제서야 담배 한 대를 피우며 숨을 고르는 것이다. 아버지가 돼지를 돌보면서부터는 식구들을 데리고 외식을 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잔반으로 얼룩진 냄새나는 작업복에 구두 대신 운동화나 긴 장화가 아버지와 한 몸이 된 것 같았다. 

아버지는 돼지막에서 살다시피 했다. 똥을 치우고, 때맞춰 전염병 예방을 하고, 새끼를 받아내며 오로지 돼지에게 매달렸다. 아버지가는 끊임없이 일했지만 우리 집의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식구들의 얼굴은 까칠해지고 잔반통을 뒤져 감자를 골라 쪄먹는 날도 많았다. 정말이지 ‘사는 것이 지옥 같은’ 날들이었다. 돼지 값이 떨어져 아버지의 한숨이 깊어지는 것도 나는 아버지의 무능력한 탓으로 생각했다. 그 때 나는 알 수 없는 내 미래의 불안함과 아버지에 대한 미움, 가난 등으로 세상의 모든 것들에 대해 불평과 불만이 들끓고 있었다. 

12살 로버트에게 주어진 유일한 소유물인 핑기가 새끼를 낳기 위해서는 철조망을 뚫는 고통을 만나야 하듯이 로버트가 13살 어른으로 만나야 할 세상도 철조망을 뚫는 고통이 뒤따랐다. 나는 내 생활의 갈등과 모순투성이인 현실을 어떻게 넘어서야 할지 불안했다. 

로버트의 아버지가 ‘사슴을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겨울, 핑키가 새끼를 낳을 수 없으며 더 이상 아기돼지로 머물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마침내 로버트의 아버지는 로버트가 그토록 좋아하는 핑키를 ’해치워야‘ 했다. 로버트도 그것을 알았다.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으로 가는 아침 시간, 나는 학교에 같이 다니던 친구들이 교복을 입고 버스정거장에 서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도망치고 싶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지만 울지 않았다. 그건 내가 철조망을 뚫고 나가 ‘해치워야 하는 것’, 극복해야 만 될 일이었다. 

로버트에게 핑키는 사랑하며 아끼는 ‘나의 것’이었다. 이제 로버트는 ‘내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던 유일한 친구’인 ‘나의 것’을 죽이는 아버지를 도와야만 했다. '쇠지레가 핑키의 두개골을 퍽, 하고 깨뜨리며 파고드는 소리'와 핑키의 '피가 부글부글 뿜어져 나오는' 모습을 보고 로버트는 도망쳐서 마음껏 소리치며 울고 싶어 한다. '한 순간에 고깃덩어리와 사방에 뿌려진 피로 변한' 그 소중한 '나의 것' 때문에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은 것이다. 하지만 '어른이 되려면 그런 건 이겨내야' 한다. 그건 '어차피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운명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내가 '나의 것'이라고 소중하게 여겼던 학교와 친구들로부터 한 순간에 나만 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그 고통의 에너지로 내 길을 향해 한 발, 한 발을 내디뎠다. 그 시절을 모두 건너온 지금, 나는 내 아버지의 그 때 나이가 되어 내 아이들의 열세 살을 지켜보고 있다. 로버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닦아주는 아버지, 헤븐 펙의 모습에서 나는 그 때 내 아버지를 부끄러워했던 기억으로 회한의 눈물이 터진다. 

세상에서 내가 만들어 내는 열매는 어쩌면 눈물의 거름이 되고서야 참 열매가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내 열세 살, 그 언저리의 기억들은 내가 이 세상을 ‘성실’과 겸손으로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될 것이라 믿는다. 이 뒤늦은 고백을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아오신 팔순의 내 아버지에게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