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한국에 밑거름이 되었으면 - 벽초의 『임꺽정』을 읽고 : 최기우

제3회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독서감상문대회
대학일반부 우수상 수상작
 

 
지난 가을이었다. 조카 아이를 데리고 떠난 여행길. 외딴마을 어귀에서 돌장승 한쌍을 발견했다. 구척장신에 퉁방울눈, 주먹코, 써게발을한 자못 무서운 형상이었다. 수염을 길게 땋아 가슴까지 늘어뜨려 제법위엄 있어 보인다. 그래야만 외 부에서 오는 이방인이나 귀신에게 두려움을 줄 수 있겠지 , 하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조카 녀석이 한마디 한 다. 말이 가관이다. 뭐가 그리 우수운지 손으로 입을 가리고 허리를 숙여가며 연신 웃어댄다. 임꺽정이란다. 아마 얼 마 전 TV에서 커다란덩치에 덥수룩하게 수염을 매단 그 모습이 떠오른 모양이다. 다시 고개를 들어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아무리 험상궃은 표정을 해도 도무지 남을 해치거나 겁을 줄 것 같지 않다. 무슨 분한 마음을 못 이겨 눈을 부 릅떴는지 몰라도 장승을 보면 그때 생각에 자꾸 웃음이 난다. 

벽초의 『임꺽정』을 처음 대했던 건 대학 1학년때이다. 기말고사를 며칠 앞두고 시험공부보다 책에 정신이 팔려 학교 에 가는 시간조차 아까워했었다. 덕분에 당시 성적은 엉망이 되어 버렸지만 . 그로 인해 우리말이 얼마나 다양하고 맛깔 스러운지, 갖바치 등 백정민중의 생활사가 어떠했는지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된 좋은 시간이었다. 피부에 와 닿는우리 소설을 모처럼 발견한 기쁨과 완결편이 없다는 아쉬움을 느끼며 그때까지 책을 읽지 않은 친구들에게 자랑 삼아 한참을 떠들던 기억이 난다.

 
책을 다시 읽다보니 곽오주, 박유복, 길막봉, 배돌석, 서림, 이봉학,황천왕동이 등등 유야무야(有耶無耶)한 등장인물과 그 에 따른 사건전개, 황당무계할 정도로 이상화(理想化)된 상황 설정, 백두산에서 한라산에 이르는 광범한 지역 선택 등 정 체적으로 플롯이 산만한 점도 없지 않았다. 또 당시 사회상을 묘사하기 위함인지 연산군, 윤원형, 이황, 황진이, 이지함, 이순신, 보우 등등 많은 인물들과의 만남도 작위적(作爲的)으로 연결되어 있는 듯하고 음양술, 방술 등 황당한 야사들을 차용한 부분도 곳곳에 눈에 띄었다. 하지만 여러 갈래의 강들이 제멋대로 흐르다가 큰 강을 이루어 바다로 흐르듯, 청석 골이라는 집합체에서 임꺽정이라는 커다란 줄기를 만나 도도하고 당당하게 흘러가는 듯한 웅대함과 자연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청석골 사람들은 홍길동을 비롯한 다른 부류의 인물군과는 다르게 국가전복을 노린 것이 아니다. 안타까운 것은 활빈활 동(活貧活動)에 대한 대목이 별로 나오지 않다는 것이지만 , 임꺽정과 청석골 사람들을 혁명가라 볼 수 없기에-정치세력 과 연결되지만 않았기에 혁명적 성격을 갖기는 힘들다(필자 생각)-군도 형태의 농민저항 정도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작품의 후반부로 갈수록 혁명적 성격이 사라지고 단지두령 역할에만 충실해지는 모습이 보인다. 특히 개인적인 일과 집 단적인 일을 혼동하고 잔혹한 폭력성을 가진 두령의 모습을 보이는 등 성격적 결함과 의식의 한계도 많이 느껴졌다. 하 지만 임꺽정 개인과 작품『임꺽정』을 같은 선상에서 인식한다면 곤란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가 단지 의적에 불과 할 뿐이라 해도『임꺽정』은 현실적인 역사 교과서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하층계급만을 그리지 않고 상하층 생활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고 , 당시의 언어, 풍속, 민죽의 동향이 솔직하고 구체적으로 담겨 있다. 이는 아직도 잘 되살려 써야 하는 우리말과 풍습 등을 간직하고 있기에 그만큼 내용에 파묻힌 기록 하나 하나를 소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고도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사실에 충실한 필치(筆致)는 소설의 기능뿐 아니라 살아 있는 역사로 받아들여야 할 것 이다. 이는 민중적 미의식을 바탕으로 일반 민중언어로서도 의 사회상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는 외세 언어 오염에 휩싸이고 있다. 통일 언어의 기초자료의 하나로 벽초의 『임꺽정』을 활용하면 어떨까? 분단 극복의 출발점은 편안한 언어소통에 있다. 이러한 작품을 통한다면 자연스럽게 남과 북은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 다. 실제로 작품에 나타나는 고어(古語)들은 불과 몇십 년 전까지 사용됐던 말이라고 한다. 하지만 문명이 발달하고 정보가 쏟아지고 우리말보다 외국말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현재 남한의 특성상 작품에 나오는 많은 말들이 사장어(死藏語)가 된 것이 현실이다. 아직도 우리말을 잘 활용하고 있는 북녘과 만한을 비교할 때 통일된 후 언어로 인해 서로가 느 끼는 이질감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지금은 금강산 관광을 할 정도로 서로에 대한 불신의 벽이 좁아지고 있다. 그 렇다면 이제 서로의 말을 이해하고 감성을 느껴야 할 때 이다. 역사소설은 역사적 진실성을 가져야 한다. 처음 작품을 대할 때 , 그때 까지 의적의 이미지로만 간직했던 청석골 사람 들을 단순한 모리배로 몰아가는 모습에 잠시 흥분했었다. 몰상식하고 신분을 벗어날 수 없는 단순한 천민의 모습, 단순 히 재물을 약탈하는 모습, 여성에 대한 폭력과 무시, 인격적 결함 등이 여과 없이 그려지면서 갈수록 당황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개인적인 선악의 문제로 보아서는 안 될 듯싶다. 당시 민중의 삶과 그에 결합된 정치· 경제 구조, 신분제, 남녀의 모습 등 각기 다른 부분과 당시의 시대정신과 연결시켜야 할 것이다. 임꺽정이 자애로운 아버지였는지, 부인을 몇 명 거느렸는지 하는 그의 개인적 삶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16세기 사회구조 및 변화와 관련하여 당시대와 전 후시대에 그가 가졌던 영향력과 의의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과연 그들은 무엇을 노리고 행인의 봇짐을 훔치려 했는 가? 민란은 농민이 주류를 이룰 수밖에 없다. 당시에 '모이면 도적, 흩어지면 백성'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이니 백성의 존재형태는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길가의 풀처럼 버림받아 막바지에 허덕이는 백성들, 먹지도 입지도 못하는 어린것들 까지 얼굴에 검댕이 칠한 부엌데기처럼 산간 장마당에 모여 도적질로 생계를 이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이들을 그 길로 내던지고 죽음으로 몰았는가? 그것은 단지 지배계층만이 아니라 그 당시 시대를 살아가 는 모든 이들의 책임일 것이다. 물론 역사소설이기에 역사적 진실보다 작가의 상상력이 차지하는 부분이 많고 구전되어 오던 많은 이야기들이 함께 쓰여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묘사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건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헐벗고 굶주리는 건 그 당시 16세기 백성만이 아니다. 21세기를 목전에 둔 북녘 또한 대기근이라는 집단적 재앙이 찾아 들었다. 내일을 책임져야 할 아이들까지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분단현실의 한반도에서 이들을 방치한다면 장기적으 로 한민족이 감당해야 할 사회· 경제적 비용은 천문학적 수준이 될 것이다. 16세기나 지금의 정치권도 우습기는 마찬 가지이다. 여윈 개가 똥 만나 싸우듯 물고 뜯고 쥐어박는 것은 볼수록 가관이다. 물론 남쪽도 IMF의 한파로 사람들의 가슴이 오그라드는 시점이지만 , 이런 때일수록 더욱더 그들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여야할 것이다.

 
지난 세월과 오늘, 다가올 날들은 따로 떨어져 있지만 않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도 현실을 올바로 이해하고 바람직한 미래를 건설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사람들은 어떤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각각 다른 해석과 평가를 하게 된다.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두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민중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세상은 정신이나 이념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사건과 사건, 사회 속의 인간관계는 서로 유기적인 인관관계 로 맺어 있는 것이다. 역사의 변화 발전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역사의 범칙을 인식하여 사회모순과 과제를 해결하고 역사를 진보시키려는 의식적인 실천이 있을 때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특히 벽초의 『임꺽정』은 민중의 동향을 통해 역사를 파악하고자 하는 민중사 중심의 역사소설이라는 점이 마음에 든다. 민족분단과 지금까지 이어지는 이 땅의 희비극적 문화가 환기되어 분단의 벽을 허물고 남과 북의 문화를 동질화시켜 가는데 크게 이바지했으면 한다. 희망과 낭만에 넘쳐 창창하게 뻗어나갈 통일 한국을 그려보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