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을 읽고 : 김소라

 
 
제1회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독서감상문대회
고등부 우수상 수상작
 


방학을 이용하여 그 동안 멀리했던 책들을 읽어 볼 계획으로 종업식 날 서점에 들렀다. 그러나 막상 읽으려니 마땅한 책을 찾지 못해 결국은 엉뚱하게 문제집 한 권만 덩그라니 쥐어들었을 때다. 한 학생이 책을 찾는 물음에 "임꺽정? 만화요, 아니면 소설이오?" 하고 되묻는 주인의 커다란 목소리가 나를 돌려세웠다. 그 때 알게 된 것이다, 내가 며칠 밤을 꼬박 지새우며 읽게 된,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을…….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단어가 어렵고 인물이 헷갈리기 쉬운 장편 역사소설을 꺼리는 나에게 '벽초 홍명희'는 낯선 이름이었고, 그가 쓴 소설 『임꺽정』 역시 생소한 것이었다. 때문에 처음엔 그저, 열 권짜리 소설 『임꺽정』이라니 단순한 호기심에 이끌려 대여점에서 책을 빌려다 읽기 시작한 것이 한 장 두 장……. 청석골로 향하는 고갯길을 굽이굽이 넘는 동안 나는 어느새 그들의 덫에 걸려 꼼짝없이 임꺽정의 포로가 되고만 것이다. 

소설에 전반적으로 쓰인 부담 없는 사투리의 정감과 구절 구절―예를 들면, "한집에 있는 과부두 있는데 딴 데 가서 동여올 거 있소?", "귀신이 나오거든 양옆에 하나씩 끼구 자지." 등등― 은근한 유머와 재치하며 오가의 홍합 이야기 또 애기 어머니의 개와 고양이 이야기 같은 야담들, 단옷날 그네 뛰기며 전통 혼례 장면하며 무당들의 신명난 굿 등 우리 토속신앙과 풍습 따위가 어우러진 그의 소설은 바로 입에 짝짝 달라붙는 우리 된장국의 구수함, 그런 맛이었다고나 할까. 평소에 거의 쓰지 않던 국어 사전을 꺼내 옆에다 두고 이야기를 읽어내려가는 동안 수십 번을 뒤적거려야 했지만 귀찮게 여겨지지 않던, 그래서 알지 못했던 속담이며 생소한 옛 단어들을 하나씩 깨우치는 재미와 뿌듯함을 어찌 말로 표현하겠는가.

게다가 복선을 적절히 운용하고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짜임새 있는 뼈대를 바탕으로 사건을 흥미진진하게 쭉쭉 펼쳐나가는 탄탄한 구성력과, 이따금 전혀 예기치 못한 수단으로 빵빵하게 부풀어오른 극적 위기감을 통쾌하게 쏴 풀어 주는 묘미를 지니고 있어 적지 않은 양의 소설을 읽는 동안 잠시도 지루한 줄 몰랐던 것이다. 

댓가지 도적 박유복이, 우는 어린애 싫어하는 쇠도리깨 곽오주, 걸음 잘 걷는 천왕동이, 돌팔매꾼 배돌석이, 천하명궁 이봉학이, 또 길막봉이, 늙은 오가, 그리고 임꺽정……. 저마다 독특한 성격을 지닌 그들은 각자 자신만의 색깔로써 펄펄 살아 뛰고 있었으며, 꺽정이 백두산 처녀 운총이를 아내 삼은 것을 비롯하여 유복이는 장군귀신 마누라를 가로채고 봉학이는 귀신방으로 인하여 기생 계향이를 거느리게 되고, 또 장기 두러 봉산 간 천왕동이가 사위 취재에 합격하여 이름난 미인을 얻은 사건 등 이채로운 그들의 삶을 더욱 부각시켜 주는데 한 몫을 한 재미난 혼인 사연들을 읽으면서 작가의 기지와 상상력에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만 그들이 사람들을 죽이는 장면이 너무 잦은데다 그것을 작가가 매우 담담하게 그려 내고 있다는 것이 사실 처음엔 탐탁찮게 여겨졌지만, 어쩌면 작가가 청석골 일당에 의한 그 수많은 죽음을 일일이 비통하고 애달프게 표현했다면 '전설적 괴수인 임꺽정'의 이미지는 생생하게 그려 내지 못했으리라. 작가가 이 글 속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빈부와 강약을 가릴 것 없이 모든 이들이 두려워하는 임꺽정이요, 따라서 작가가 이야기 속의 죽음을 예사롭게 그려 낸 것은, 그가 의적 임꺽정이 아닌 괴수 임꺽정의 시각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 꺽정이가 거느리는 청석골 일당이 대당이란 소리는 들을지라도 이적은 아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이 의적이 되지 못하고 단지 도적으로 남게 되었음을 감히 탓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성질이 서로 달라 층을 이루는 물과 기름을 유리관에 넣고서 아무리 흔들어 보았자, 유리관이 깨어져 안의 액체들이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는 한 기름은 위에, 물은 그 아래 자리잡게 된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천민이라는 그의 위치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신분제도라는 유리관을 깨어야만 했고 자연히 그들의 위에 놓인 나머지 사회 계층 모두에게 적이 될 수밖에 없었으리라. 양반들에겐 짐승 취급을 당해도 그저 허리를 굽신거려야만 하고 역시 양반의 종속 계층인 양민들에게서마저 같은 처지 대우를 받지 못하고 천민이라 멸시를 받았던 그들……. 위로도 아래로도 자신을 표출할 수 없었던 그들이 다른 계층, 즉 독자의 입장에서 볼 땐 그들과 결합할 수도 있었을 듯한 양민들과 한패가 되어 사회에 반기를 들지 못하고 이들에게마저 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신분차별이라는 사회제도가 빚어 낸 모순의 결과인지도 모른다.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이젠 정말 관군과의 큰 싸움이 장엄하게 펼쳐질 것을 잔뜩 기대하고 있었던 터라, 청석골에 홀로 남은 오가의 이야기로 끝을 맺게 되자 절로 한숨소리가 나왔다. 그러나 임꺽정이 끝내 접전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하게 됨을 알고 있기에, 뿔뿔이 달아나는 잔류병들을 내벼려 두는 청석골 오두령의 모습으로부터 임꺽정의 비참한 최후를 예감하는 것으로 -비록 최후에 이르기까지의 숨막히는 과정을 엿볼 수 없다 할지라도- 책장을 덮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나로 하여금 겨울 내내 청석골을 엿보면서 그들과 함께 궁둥이를 들썩거리며 즐거워하고, 주먹을 불끈 쥐며 분노하고 또 긴장하여 숨을 잔뜩 죽이게도 했던, 소설 『임꺽정』……. 비록 천민일지라도 떳떳하고 당당하고 용맹스러우며 결단력 있고, 자기의 목숨을 내걸고서라도 일당과의 의리와 신의를 저버리지 않으려 했던 참된 사나이, 임꺽정. 그는 과연 내가 알고 있는 도적 중 제일 가는 도적이었다. 40여 일 기나긴 겨울 방학을 내게서 송두리째 앗아가 버렸으니……. 

10여 장 남짓한 종이에는 처음으로 10권의 장편역사소설을 읽고 난 감상를 제대로 옮기지 못한 것 같아 독후감이라 내놓기가 겸연쩍을 따름이다. 그러나 아쉬워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임꺽정』……. 리얼리즘의 정수이자 우리 민족의 얼이 스민 벽초의 대작은 그의 뜨거운 민족 정신과 함께 영원히 내 가슴속에 남아 있을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