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 시간에 읽는 철학책 l 정답 대신 질문을 얻어 가는 수업 시간

혹시 네덜란드 화가 에셔의 그림을 본 적이 있는가? 그의 유명한 그림 가운데 <손을 그리는 손>이 있다. 그림 속에서 두 개의 손이 연필을 쥐고 서로를 그리고 있는 장면이다. 말 나온 김에 그의 또 다른 작품 <폭포>도 확인해 보길 바란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폭포를 따라가다 보면, 그 물은 다시 제일 높은 곳의 물이 된다.
 

내가 헛것을 보는 것일까? 에셔의 그림을 볼 때 우리는 두 번 세 번 눈을 비벼 가며 보고 또 본다. 원인이 결과가 되고, 결과가 원인이 되는 순환 구조가 상식을 뒤틀지만, 이 비정상적인 상황이 몹시도 자연스러워 당혹감을 느낀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과학의 세계에서 인과성을 의심한다면 부담이 자못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림에서 문제를 발견하지 못할 때, 어쩌면 지금 살고 있는 이 세계가 비인과적일지도 모른다는 마음의 후퇴가 시작된다. 아주 당연하게 여겨 왔던 나의 지식에 질문을 던져야 하는 상황, 철학은 바로 이 순간 시작된다.
 
 
에셔의 대표작 <손을 그리는 손>(1948)과 <폭포>(1951)
 

“33가지의 이상한 우주”
이 책은 모두 33가지의‘기이한 이야기’모음집이다. 저자는“뭐 이런 이상한 이야기가 다 있어?”하는 반응을 기꺼이 기다리는 느낌이다.
 
각 장의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주인공은 모두 다르다. 예를 들어, 어떤 장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느린 거북이가 세상에서 가장 빠른 육상선수를 이길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인터뷰가 나온다. 또 다른 장에서는 자궁 속에서 낙태를 당해 태어나지 못한 수정란이 자신도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또는 생물학적으로 인간과 완전히 똑같은 어느 로봇여성이 철학자들에게서 “너는 인간이 될 수 없어.”라는 말을 들은 후 마음의 상처를 고백하기도 한다. 그리고 전지전능한 악마가 태초 이후 자신이 보여 준 수많은 악(惡)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자신보다 선한신의 능력을 더 대접해 주는 세상을 섭섭해하는 식이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그런데 각 장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들의 황당한 이야기가 한편으로는 그럴싸하다. 예를 들어, 사회적으로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한 명의 의사가 있다. 그 자체로 보면 아주 훌륭하다. 그런데 그는 지금 장기 이식만 하면 살릴 수 있는 환자 4명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때 병원 안으로 들어선 건강한 청년이 있다면? 그는 4명을 살리는 데 1명이 희생된다면 나름 올바른 일이 아닐까 하고 고민중이다. 말도 안 된다고?
그러나 생각해 보자. 어떤 나라 사람들은 자국민의 안전을 위해 특정 테러리스트들의 거점이라 생각되는 나라와 전면전을 벌이는 데 찬성한다. 우리는 그 나라의 아무 죄 없는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더라도 더 많은 사람들의 안전을 지켜야 한다는 논리를 쉽게 받아들인다. 또 한 더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는 세금 감면을 위해 가난한 노인이나 희귀병 환자를 위한 복지 예산을 줄이는 데 눈을 감기도 한다. 이런 우리가 만약 저 의사를 비난한다면, 그는 너무 억울하지 않겠는가?
여기서 따져 보자는 것은 현행법이나 국제 관계 또는 경기 불황이 아니라 가장 근본적인 도덕 기준에 관한 것이다. 과연 도덕적으로 볼 때 한 사람을 죽여 많은 사람을 구하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사회 집단의 행복 증가가 선의 기준이라는 가치관에 대한 우리의 입장과 근거를 묻고 있다. “그렇다고 멀쩡한 청년을 죽이면 안 되지요.”와 같은 단선적인 모범 답안이 아니라, 왜 그래야 하는지를 가장근본적인 수준에서 따져 볼 때 사회적인 선이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철학함의 교재”
그래, 이 책은 계속 이런 식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의 온갖 마이너리티가 자신들의 처지를 변호하면서 우리의 굳건한 상식에 계속 도전한다. 마치 살인자도 변호해 주어야 하는 변호사들처럼 저자는 직업적으로 그들의 시각을 던져 우리를 도발한다. 책을 읽는 동안 신기하고 재미있으면서도 무언가 불편하다. 그러나 세상이 새로워지는 경험은 알고 있는 것을 반복할 때가 아니라 기존의 통념을 다시 보게 될 때이다.‘ 나는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나?’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길 바란다. 지적 충격을 이겨 내고 우리가 찾은 결론은 더욱 확실한 진리에 다가설 테니까.
그래서 이 책은 매우 훌륭한 철학 토론 교재이다. 철학자의 이름과 개념을 배우는 철학이 아니라 내 생각을 철학으로 만드는 철학 교재이다. 질문을 던지고 근거를 따지는 사고 실험 가득한 철학 대안학교라고나 할까. 그런 점에서 더 정확하게 말하면, 철학 교재를 넘어 철학함의 교재이다.
 
 
 
“철학자는 질문하는 아바타”
각 장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문제 상황 안에 있기 때문에 저자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동물 실험은 왜 도덕적으로 허용되고 인간 아이를 이용한 실험은 왜 허용되지 않는가’,‘ 자신은 부자가 되고 싶으면서도진심으로평등한사회를바랄수있을까?’,‘ 위작이라고판단되면작품의질이떨어진다고 느끼는 이유는 뭘까? ’등 철학으로 들어가는 질문은 사실 텔레비전 뉴스를 보며 떠올리는 질문과 그리 다르지 않다. 우리는‘철학하는 아바타’가 되어 쟁점에 관한 입장을 가지고 직접 변론을 펼칠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친구와 대화하고 싶은 청소년이나 학생들과 토론하고 싶은 교사들에게 분명 불길한 예감이 엄습할 것이다. 기껏 토론하고 나서 정답을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이 불길한 예감. 그러나 철학은 무언가를 확실히 알기 위해 기꺼이 무언가 모르는 길을 거쳐 가길 강조한다. 소크라테스의 질문법이 그랬고,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가 그러하다. 사실 학생의 지식 수준은 어떤 대답을 하는가보다 어떤 질문을 하는가를 보면 더 확실히 가늠할 수 있다. 정답을 많이 아는 수업이 아니라 질문이 많아지는 수업, 토론이 끝난 이후 자신이 무엇을 더 모르게 되었는지를 작성해 보는 것도 좋겠다. 내가 만든 그 글은 이 책이 멈춘 33장의 다음 자리에 오를 목차가 될 것이다.
 
 
20세기 후반에 활동한 프랑스의 대표적인 철학자 질 들뢰즈 (1925~1995)
 
 
 
“칡뿌리처럼 철학하기”
훌륭한 요리사가 식재료의 특성을 잘 아는 데서 출발하듯이, 이 책을 읽고 토론을 계획한다면 이 책의 특징에도 민감해야 한다. 이 책은 처음부터 읽을 필요가 없다. 아무 장이나 펼쳐 읽은 다음 그 자리에 눌러앉아도 좋고, 말미에 나오는 이정표를 따라서 이리저리 뛰어다녀도 좋다.‘ 하이퍼링크 구조’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7장에서 오른쪽과 왼쪽 양쪽에 건초 더미를 놔두고 어느 것을 먹어야 좋을지 결정을 내리지 못해 쫄쫄 굶고 있는 당나귀를 보자. “합리적인 생물은 합리적인 이유를 갖지 못하면 행동할 수 없다.”는 합리적인 당나귀의 소신에서 우리는 라이프니츠가 고민했던 ‘충족이유율’의 아이디어를 배울 수 있다. “하나의 행동을 선택할 때는 꼭 이유가 필요할까?”질문을 던진 후, 저자는 말미에 화살표 세 개를 놓아둔다. 첫 번째 화살표는 합리적 지성에 대해 묻는 11장으로, 두번째 화살표는 죄수의 딜레마처럼 협동이 필요한 상황에서 선택의 기준을 다룬 27장으로, 세 번째 화살표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우주가 존재하는 방식인 인과성과 신의 문제를 다룬 32장으로 연결된다. 어느길로 갈 것인지는 읽는 사람의 몫이다. 이것을 결정하는 데에도 충족이유율이 필요할까? 글쎄, 토론하고 난 다음 에셔의 그림을 떠올리며 각자 생각해 볼 일이다.
종합적으로 보면, 33장의 이야기 끝에 연결된 화살표들은 서로서로 물려 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중심도 없다. 한 번 거친 이야기라도 다른 장에 들렀다가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그러나 이때의 고민은 아까와는 다르다. 생각해 봐야 할 변수가 더 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미로와 같다. 보르헤스의「바벨의 도서관」처럼 각각의 독립된 방들로 무한히 이어져 있는 구조, 각 방 자체가 전체의 중심인 구조이다. 입구도 출구도 스케줄도 없다. 어느 방향으로 가로질러 가든 여행자 마음이며, 각 방의 내용은 서로 연결되고 확장되면서 커다란 진리의 망을 이룬다. 또한 이것은 들뢰즈가 말한 리좀(덩이줄기)이기도 하다. 칡뿌리처럼 중심 없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알 수가 없다. 본래 우주가 그러하고, 우리의 지식 자체가 그러하다. 이 책도 윤리를 다루다가 정치로 넘어가고, 그러다가 논리로, 다시 신의 문제로 정신없이 넘나든다. 세상을 종합적으로 통찰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책의 구조에 숨어 있음을 읽는다.
 
 
“이제 다시 현실로”
철학은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는 사고이다. 우리는 물리 시간에‘속력은 이동한 거리를 걸린 시간으로 나누는 것’이라고 배운다. 그런데 만약 어떤 꼬마가“그런데 시간이 뭐예요? ”라고 묻는 질문에 답할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 도대체 시간이 무엇인지 밝힐 수 없다면, 시간으로 나누어 속력을 구한다는 공식은 확실한 지식이 될 수 없다. 속력을 구하거나 사회의 규칙을 배우는 것은 현실 속의 사실을 다루는 것이지만, 그것을좀더깊이따지고들어가면가장근본적인물음에맞닥뜨리게된다(이책28장을보라).‘ 도대체 시간이 무엇이냐’에 대한 대답 없이 무조건 외우는 것은 허약한 모래밭에 건물을 짓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 어느 학문도 철학자의 질문을 무시할 수가 없다.
그러나 토끼굴에 빠졌던 앨리스가 이상한 여행을 한 뒤 다시 자기 방으로 돌아와 기지개를 켜듯이, 우리 또한 현실에서 살아가야 한다.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던 장자가 꿈에서 깨어난 후,“ 내가 꿈에서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가 꿈을 꾸어 내가 된 것인가.”를 고민한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그런데 장자는 그 뒤에 어떻게 했을까? 다시 확인하기 위해 잠들었을까, 아니면 약속 시간을 떠올리고 마실을 나갔을까?
우리의 삶에는 즐거운 일도 많지만 괴로운 일도 많다. 그 괴로움을 앞에 두고‘좋은 게 좋은 거야.’하고 넘어가지 않고,‘ 도대체 인생이란 뭐지?’라고 묻는 때가 있다. 인생의 의미가 밝혀져야 내 삶의 단편들을 총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으며, 지금 겪는 괴로움의 의미를 깨닫고 다시 힘을 얻기 때문이다. 근본을 따지는 것은 결국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서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당나귀가 되었다가 로봇 여성이 되었다가 수정란이 될 것이다. 토론을 하면서 그들 편에 서기도 하고, 저자의 숨은 의도를 눈치채고는 적극 저항할 수도 있다. 그러나 토론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현실의 연관성을 떠올려야 한다. 바닷가 모래알을 세는 행위에서‘미끄럼 논증’을 겪었다면, 그것을 선거에서 투표하는 행위와 연관해 사고할 필요가 있다.“ 모래알 하나를 뺀다고 모래성이 무너지지 않듯이, 나 하나 투표하지 않는다고 민주주의가 달라지지 않는다.”이 논증의 타당성을 살피는 것은 논리학의 영역이지만, 그 결과는 내 삶을 달라지게 할 것이다. 어느 장을 토론하건 항상 번뜩이는 매의 눈으로 현실의 사례를 찾아 자기주장의 논거를 되돌아보길 바란다. 바로 그 순간이 우리가 철학자의 경계선에 서 있는 지점이다.
 
 
 
글 · 권 희 정 ( 상명대 부속여고 철학 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