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 그곳을 넘어 시작의 바다로 가리라 : 안지영

제2회 청소년 독서감상문 대회 청소년부 우수상
안지영

 
 
세상은 거대한 섬이다. 바다라는 장벽에 가로막힌 섬과 같이 우리는 이 거대한 섬에서 한발자국도 벗어날 수가 없다. 끝도 없이 거대하지만 갇혀 있는 섬. ‘세상’이라는 섬의 흙에서 태어나고 살아가며 또 그 흙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은 살아가는 동안 끝없이 일탈을 꿈꾸며 탈출을 시도하지만, 단조롭고 질긴 권태의 일상을 벗어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섬이 아니라 어쩌면 거대한 쳇바퀴일지도 모른다. 빠르게 돌아가고 정신없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는 세상이지만 돌아가는 속도만 빠를 뿐 그저 거대한 섬에 지나지 않으며, 거대한 쳇바퀴에 불과하니까. 한없이 달려가면 언젠가 쳇바퀴를 벗어날 수 있을 거라 믿는 다람쥐처럼, 사람들은 조금의 다름도 없이 똑같이 되풀이되는 일상에서 한 번쯤은 달아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탈출을 꿈꾸는 것이다.

어떠한 문제에 부딪히거나, 삶에 답답함을 느낄 때 사람들은 떠나고 싶어한다. 비단 그곳이 망망한 바다 위의 섬이 아니라 해도 말이다. 어렵게 말해 자아를 찾고 싶어한다고 할까. 내가 발을 디딘 이곳만을 벗어나면 내 꿈이든 내 자신이든 뭐든 찾아질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피해갈 수 없는 어떤 것이리라. 이러한 이치로 보면 바다에 사는 사람이 육지를 꿈꾸고 육지에 사는 사람이 바다를 꿈꾸는 것은 당연하지만 허망하고 어쩔 수 없는 것인 동시에 부질없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어떤 것으로 가든 일상이란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권태를 불러오는 것이니까 말이다. 이것은 물에 돌을 던졌을 때의 그 일렁임이 언제가는 멎어 다시 잔잔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하지만 이런 유혹에 모든 사람들이 다 넘어가는 것은 아니다. 달아나고 싶은 충동은 대부분 내 자신이 누구인지 그 가치를 잘 알지 못하는 어른도 아이도 아닌 중간 부류에게 더욱 강하게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늘 섬을 달아나는 공상에 빠지는 서이는 바로 이런 어른도 아이도 아닌 나이, 열여섯 살의 소녀이다. 가출해버린 엄마를 대신해 집안일을 하고, 늘 술에 의지하는 아버지 때문에 친구들과 제대로 어울려 맘껏 놀지도 못한다. 항상 자신의 곁에 있어 주는 이배라는 친구가 있어도 서이는 언제나 외롭고, 시간이 갈수록 외로움을 넘어선 알 수 없는 고독감과 갈증에 끊임없이 시달린다. 그런 서이에게 유일한 행복은 공상이다. 망망한 바다 위의 섬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이기 때문이다. 

서이는 자신이 섬을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육지로 떠나버린 엄마와 언니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아니면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작고 답답한 섬이 아닌 크고 넓은 세상에 대한 동경 때문인지 잘 알지 못하지만 혼자 있는 시간이 되면 공상이라는 탈출구를 통해 끊임없이 섬을 탈출하는 작은 자유를 맛본다. 공상은 숨이 턱까지 차도록 달리고 탁 트인 바다 혹은 하늘을 아무리 쳐다 봐도 가시지 않는 알 수 없는 갈증을 달랠 수 있는 서이만의 비상구이다. 공상 속에서도 서이는 자유롭지 못하다. 섬에서 벗어나는 그 짜릿한 공상도 그저 가슴 속 간절한 소망에 불과하고, 그것을 확인이라도 시켜 주듯 공상에서 깨어나면 서이가 있는 곳은 언제나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는 지긋지긋한 ‘섬’의 땅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서이를 보면서 입 속 한가득 쓴 침이 고이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자유로운 공상에서 깨어나 마주하는 현실의 단면이 얼마나 쓴 맛인지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유롭지 못한 것보다 더한 씁쓸함을 지니는 것이다.

내가 서이를 닮은 것은 공상을 좋아한다는 것 단 한 가지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나는 서이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닮았음을 인정했다고 해야 옳을까? 공상이라는 것은 서이뿐 아니라 나에게도 유일하다시피 한 탈출구이니까. 

비상구, 탈출구, 어떤 말이라도 좋다. 공상속에서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원하는 곳은 어디든지 갈 수 있다. 후회스러웠던 순간으로 돌아가 답답하지 않게, 똑부러지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내가 원하는 결말을 지을 수도 있고 영화 속 주인공이 될 수도, 아주 유명한 인사가 될 수도 있다. 물론 내 상상 속의 관객은 나 하나뿐이지만 말이다. 아마 서이는 나와 같은 생각으로 공상에 빠졌을 것이다. 그 누구도 하지 마라 안 된다라는 말이 없는 나만의 세계, 나만의 이상향, 갇혀 있으면서 또 자유로운 그 공간은 답답함을 날려버리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약이자 달콤한 사탕과도 같은 것이므로. 

서이가 살고 있는 섬과 내가 살고 있는 이 도시는 크게 다르지 않은 공간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나라는 아이가 도대체 누구인지 고민하는 서이처럼, 이 도시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서이가 살고 있으니 말이다. 아이도 어른도 아닌 나이, 10대 청소년. 이들에게는 제한된 것도 억눌린 것도 너무나 많다. 아이는 원하지 않아도 아이라서 가질 수 있는 모든 것들, 어른은 어른이기 때문에 깨달은 세상사는 이치로 자신의 욕구를 적당히 저울질할수 있음에 얻어지는 모든 것들은, 중간에 놓여 있는 서이 같은 아이들에겐 그저 충동일 뿐이다. 

나 역시 그 한사람의 서이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어떤 것이 잘못된 일인지 그 경중을 구별할 수 없는 혼란스러운 시기의 우리들은, 서이와 같은 답답증을 어른이 되기까지 품고 살아간다. 운이 좋아 서이처럼 마음을 때울 바이올린 소리를 들려 주는 사람을 만난다면 더 빨리 어른이 될 수도 있을 테지만 말이다.

그토록 섬을 떠나고자 갈망했던 서이는 결국 섬을 떠나지 않는다. 섬을 떠나지 않고도 더 이상 답답하지 않고 현실을 감싸는 어른에 가까워졌기 때문이었다. 마음 속을 울리는 바이올린 소리 덕분에 서이는 그 갈증과 혼란의 미로를 무사히 빠져 나왔다. 진정한 자신을 찾도록 도와 준 바이올리니스트는 그 섬을 떠났지만 서이에게는 바이올린이 남았다. 아마 그것으로 인해 더욱더 어른에 가까워지겠지. 

나는 나에게도 언젠가 내 답답한 가슴을 틔워 줄 그 어떤 것이 찾아오리라 믿는다. 혹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서이와 같이 직접 찾아 오는 행운이 없어도 내 스스로 그 ‘어떤 것’을 찾게 되리라. 서이와 같은 혼란은 누구에게나 다 한번씩은 찾아오는 통과의례와도 같은 것이니까. 서이가 더 이상 공상의 탈출구를 찾지 않아도 더 넓은 세상으로 자신있게 나아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나 역시 서이와 같은 새로운 탈출구를 찾기를 바란다.
섬, 이제 나는 그곳을 넘어 시작의 바다로 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