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사전을 삼키다』 편집 후기

『검색, 사전을 삼키다』 편집 후기
혹은 ‘저자와 편집자의 우정에 관하여’


 
 
 
이 책의 저자 정철을 만난 건 사계절출판사에 입사하고 작업한 첫 책 『사전, 시대를 엮다』의 출간 기념 좌담에서였다. 일본 사전의 역사를 다룬 책이라 일본과 한국의 사전 편찬 역사를 이야기해줄 수 있는 두 연구자와 함께 현재의 사전, 즉 포털 사이트의 사전 서비스에 대해 이야기해줄 수 있는 사람으로 그를 섭외했다. 비록 좌담은 흥행에 실패했지만, 각자의 영역에서 애정을 담아 사전을 바라보는 세 사람의 이야기는 흥미로운 지점이 많았다. 섭외할 때부터 그랬지만, IT 기업인 다음카카오에서 일하면서도 사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식견을 보여준 그에게 나는 호기심이 생겼다.
 
 
참고로, 그날의 좌담을 정리한 기사는 여기서 볼 수 있다
  
 
좌담이 끝나고 두 어르신(두 교수님)은 먼저 보내드리고, ‘젊은이들’끼리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의 팀장님과 나, 나에게 정철을 소개해준 블로터의 정보라 기자, 그녀의 지인이자 ‘사전’ 이야기에 관심이 있다며 온 전직 출판인 김류미 씨, 그리고 정철. 이렇게 다섯 명이 모였다. 이런저런 수다가 오가는 가운데 나는 열심히 그를 관찰했다. IT인답지 않게 인문학적 소양도 있었고, 음악도 많이 듣는 것 같았다. 사전, 그러니까 자기 일에 대해 “다 망했어”라는 투로 시니컬하게 말했지만 그 가운데서도 깊은 애정 같은 게 느껴졌다. 잘해보려고, 더 나아지게 하려고 굉장히 많이 고민하고 노력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에게 뭐라도 써보자는 말을 슬쩍 흘렸고, 그는 사는 게 좀 심심했던지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그 후로 한동안 우리는 간간이 카톡을 주고받으며 뭘 써볼까를 고민했다. 뭘 쓰자며 의기투합한 게 아니라, 뭐라도 써보자는 걸 전제로 하고 쓸 거리를 찾는 상황이었다. 나는 사전, 언어, IT, 역사, 음악, 수집 등 여러 가지 흥미로운 키워드가 뒤섞여 있는 그가 궁금했고, 그는 자기가 해온 일을 글로 정리해볼 수 있는 기회에 매력을 느끼는 것 같았다. 나는 일단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겠으니 뭐라도 보내달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블로그 주소, 한 매체와 했던 인터뷰, 석사논문 따위를 보내주었다. 굉장히 매력적인 요소가 많았지만 하나의 컨셉으로 잘 엮이지가 않았다.
 
 
 
 
어렵사리 우리는 ‘편집’이라는 키워드를 뽑아냈다. 지식을 편집해온 전통적인 방식인 사전과 그것의 최신 버전인 검색, 그리고 분류하고 정리하길 좋아하는 저자의 성향을 ‘편집’이라는 키워드로 묶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팀장님은 대번에 “그건 너무 마니아적인데. 편집은 우리나 좋아하지. 초판 찍고 끝날 책 아닌가?”라는 반응이었다. 아니라고 하기 어려웠다. 팀장님이 제안한 주제는 ‘검색’이었다. 우리 일상에 가장 깊숙이 들어와 있는 핫한 키워드. 그때 마침 『빅데이터 인문학』도 함께 진행하고 있던 터라 팀장님은 그 연장선상에서 ‘검색’에 대한 책도 만들어보자고 했다. 귀가 얇은 우리는 곧장 ‘검색’을 테마로 목차를 짜기 시작했다.
 
간단한 목차가 나오고 글을 쓰기 시작할 무렵, 그는 나와 팀장님을 ‘카카오 그룹(group.kakao.com)’에 가입시켰다. 커뮤니티 이름은 ‘편집증’. 이제부터 거기다 글을 쓸 테니 댓글로 피드백을 달라는 거였다. ‘이건 뭐지? 자기 회사 영업하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새로운 원고 생산 방식이니 냉큼 그러자고 했다. 드르르르 진동 소리와 함께 며칠에 하나씩 글이 올라왔다. 몇 차례 댓글로 의견을 주고받으면, 얼마 뒤 수정본이 올라왔다. 당근이나 채찍 이모티콘이 아주 유용하게 쓰였다.
 
 
 
 
짜놓은 목차대로 다 썼는데도 원고가 300매도 되지 않았다. 생각보다 그의 글은 너무나 건조했다. 나는 그가 웹사전을 만들면서 겪은 여러 에피소드가 들어가 주길 바랐는데, 그는 그런 쓸데없는 수다를 왜 늘어놓느냐,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지 결과를 말하면 되는 거 아니냐는 스타일이었다. 나의 계속되는 압박으로 이야기가 조금씩 더해지긴 했지만, 분량이 확 늘어나진 않았다. 사실 나는 분량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얇은 책으로 만들면 되니까. 하지만 그는 굉장히 초조해하며 어디선가 원고 매수 계산하는 프로그램을 받아와서는 한 꼭지 쓸 때마다 “여기까지 382매.” 같은 식으로 매수를 세며 혼자 분량 압박에 시달렸다. 사전, 언어, 역사 등을 좋아한다기에 잊고 있었는데 그는 확실히 이과였다(그의 전공은 지질학).
 
더 이상 쓸 게 없어 서로 난감해하고 있던 무렵, ‘검색’이라는 키워드를 던져주었던 팀장님이 퇴사하고 갑작스레 내가 팀장이 되었다. 팀원을 뽑아 팀을 꾸려가는 것도 겁이 났고, 진도가 안 나가는 이 책을 혼자 감당하는 일도 버거웠다. 이미 오래전에 팀장이 되었던 그는 팀원 면접으로 고민하던 내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었고, 덕분에 나는 마음이 잘 맞는 팀원과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자, 팀이 꾸려졌으니 이제 다시 원고로...
 
뭔가 전환의 계기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에 우리는 합정역 근처의 한 카페에서 비장한 각오로(?) 만났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그가 IT 회사에서 일하고 있긴 하지만, 그의 핵심은 ‘검색’이 아니라 ‘사전’이지 않나, 그가 가장 애정하고 고민하는 대상은 사전인데 내가 왜 그걸 놓치고 있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검색이 대세라지만, ‘사전’이 중심에 와야 할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는 그런 생각이 분명해졌지만, 그걸 바로 입 밖으로 내기는 어려웠다. 어찌 보면 컨셉을 완전히 바꾸는 거니까.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우표, 딱지 따위를 모으고 정리하는 걸 좋아하고, 백과사전을 탐독하던 한 소년이 자라나 LP를 모으고 음악 DB를 고민하다 결국 수집의 최후 단계인 어휘 수집에 이르러 네이버와 다음에서 웹사전을 만들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깔고 가자고 제안했다. 덕후 기질을 가진 한 소년이 ‘덕업 일치’를 이루기까지의 과정을 한 축으로 삼고, 다른 한 축에는 수천 년 전통을 가진 종이사전이 몰락하고 그것을 웹 검색이 대체해가는 과정을 담는 구성이었다. 이미 절반 이상을 쓴 사람한테 컨셉을 바꿔 다시 쓰자고 하는 꼴이니 내심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너무나도 흔쾌히, 별일 아니라는 듯이 좋다고 했다. 회사로 돌아와 그의 개인적인 이야기와 ‘사전’ 부분을 보강한 목차를 새로 짜서 보냈다. 이제 좀 정리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자 제목으로 삼고 싶은 말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검색, 사전을 삼키다”
 
그 이후로는 제법 순조롭게 원고가 만들어졌다. 그는 여전히 원고 매수를 세긴 했지만, 점점 더 이야기를 풀어낼 줄 알게 되었고 흐름을 잡은 나도 피드백이 좀더 쉬웠다. 조금씩 조금씩 카카오그룹과 카톡으로 원고를 만들어가며 우리는 서서히 친구가 되었다. 원고 이야기도 수시로 나누었고, 틈날 때마다 오만 가지 수다를 다 떨었다. 교정보던 원고에서 재미난 말이 나와 보내면 그는 비슷한 맥락의 트윗이나 기사를 링크해주었다. 그가 사전학회나 국립국어원의 무슨 회의에 가는 날이면, 나는 재미난 뒷담화를 많이 얻어 들을 수 있었다. 그에게 위키백과에 참여하는 방법을 배워 우리 회사 대표 저자인 ‘강상중’ 항목을 만들어 작성해보기도 했다. 별 반응 없는 신간을 한 권이라도 더 팔겠다며 애쓰는 나를 보고는 그가 덜컥 10권을 사준 일도 있다. 노력한 만큼 보람이 있어야 한다면서...
 
 
 
 
이렇게 일이 잘 안 될 때, 혹은 너무 잘될 때, 재미있거나 황당한 일을 겪었을 때, 맘 편히 회사 욕을 하고 싶을 때 등등 우리는 수시로 카톡창을 열었다. 우리가 말도 안 되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키득대는 동안, 원고는 점점 더 좋아졌다. 어느덧 추가로 뭔가를 더 쓰기보다는 확인하고 다듬는 데 공을 들일 단계에 이르렀다. 다른 책들을 마감하는 틈틈이 원고를 다듬고 또 다듬었다. 여전히 아쉬움은 남지만, 이제는 끝낼 때가 되었다 싶은 순간이 왔다.
 
나는 자기 일에 진지하고 성실하게 임하는 이들에게 호감을 느끼고, 때때로 그들의 경험과 통찰을 기록해주고 싶다는 욕망을 느낀다. 처음 책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고 어렴풋이 느꼈을 때도 그런 책을 생각했었다. 생활인들의 작은 깨달음이나 경험, 지혜 같은 걸 담고 있는 책, 그런 것들이 모여 변화를 만들고, 역사를 이루는 책. 학부 때 과제로 외할아버지의 구술생애사를 쓰면서 이런 이야길 담을 수 있는 책을 만든다면 참 좋겠다 생각했던 기억도 난다. 물론 지금은 누가 그런 걸 하자고 하면, 시장성이 없다며 뒷걸음질 칠 가능성이 더 높지만...
 
돌이켜보면 사전, 검색, 수집, 분류, 편집... 이런 키워드가 날 매혹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자기가 하는 일에 애정을 갖고 임하는 정철이라는 인물을 책에 담고 싶었던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소중한 것들을 잘 정리해서 축적해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데, 사전이 얼마나 가치 있는 문화적 자산인데 이렇게 무너져 가는가 안타까워하는 그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나도 그렇게 내 일에 진심으로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그의 최선을 담기 위한 나의 최선.
 
 
 
 
이렇게 글 한 편 남기지 않고 끝내긴 아쉬운 책이... 드디어 끝났다.
 
 
 
 
 
 
작가
정철
출판
사계절
발매
2016.0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