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복도에서 : 김도영

제1회 청소년 독서감상문 대회 일반부 대상
김도영
 
 
 
“귀에서 물이 나오나요?”
“2주간 약을 먹으면서 나아졌어요. 한 달 전에…….”
“어지러운 데는 없구요?”
“글쎄요, 가끔 그런 것 같기도 하구요.”
“특이 질환은요?”
“없어요.”

한 달 전부터 곪기 시작한 귀를 감싸 쥐고 병원 이곳 저곳을 전전하다 다다른 곳이 대학병원. 이유도 모르게 아프기 시작한 귀에 대해 설명도 듣고 싶었고 곧 나을 수 있다는 확신도 얻고 싶었건만, 그래서 이것저것 이야기를 늘어놓고 싶었건만 젊은 의사는 내 이야기를 들어줄 정도로 여유 있어 보이지가 않았다. 점차 상호간에 사무적인 물음과 대답들만 오고 가기 시작했다.

아픈 사람들이 모여드는 병원에서조차 사람들은 자판기처럼 신속 정확하게 움직여야 하는 것 같았다. 짧은 호명이 들리면 재빨리 몸을 움직여야 했고, 질문은 되도록 짧거나 없어야 했다.

복도에 빼곡히 들어선 의자에 앉으면서 하나 둘씩 얼굴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불만스런 얼굴로 진료비를 훑어보는 아주머니, ‘툭, 툭’ 구두 앞굽으로 바닥을 차는 아저씨에 시계와 진료실 문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고 있는 아저씨 등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상념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그뿐인가! 분주하게 오가는 간호사들 역시 너무 바빠서 미치겠다는 얼굴들이었다. 그랬다. 여기서 따뜻한 위로를 기대한다는 것은 너무도 큰 욕심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다들 따뜻한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이 있었다. 입원복을 입은 사내, 남편인 듯 보이는 사내를 위해 물을 가져오기도 하고, 책을 읽어 주기도 하고 작은 종달새처럼 무엇인가를 열심히 이야기하기도 하는 여자. 표정이 어찌나 밝은지 뒷모습에서도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내가 난데없이 메이 아줌마를 생각해 낸 것이 그녀의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묘하게 닮은 체구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여기에 메이 아줌마가 있다면 어땠을까?’

좀 엉뚱한 생각이긴 했지만, 피식 웃으며 나는 상상을 구체화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복도를 꽉 채울 듯 뚱뚱한 몸매와는 어울리지 않게 날렵한 동작으로 한 노인에게 다가가서 인사를 건넬 수 있겠다. 어쩌면 아까부터 저기로 뛰어다니는 대여섯 살의 사내아이를 번쩍 잡아 올려서는 볼부터 비벼 댔을지도 모른다. 그러길 잠시, 사방의 눈길이 자신에게 모아졌다는 사실을 알아채는 순간 “하느님의 옆구리를 쿡 찌르는 듯한”, 장난스럽다 못해 천진스럽기까지 한 표정을 짓고 나서는,

“이런 병은 별거 아니잖아요, 툭툭 털어 버리시라구요. 손발이 붓고 썩어들어 가던 제 병에 비하면 새 발에 피잖아요?”

라고 우렁차게 외칠 것이다. 또,

“다들 바쁘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좀 웃어 보라구요. 기분이 한결 나아질 거예요.”

라며 간호사들에게 커피 한 잔씩 돌릴지도 모를 일이다.

비쩍 마른 상이용사인 오브 아저씨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보내 준 것이나, 겁으로 똘똘 뭉쳐 우유 한 잔을 청해 마시지 못했던 고아 소녀 서머를 ‘딥 워터’로 데려와 보살펴 준 것만을 바탕으로 한 상상은 아니다.

메이 아줌마가 준 사랑은 가진 자의 여유에서 나오는 사랑도 아니었고 생색을 내는 베풂도 아니었다. 그저 ‘절실하게 필요한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서로 의지하고 힘이 되어 주는 사랑이었던 것이다. 또 초라한 고아 소녀의 모습에서 ‘최고로 멋진 아이’의 모습을 발견해 낼 수 있는 ‘마음에서 솟아나는’ 관심이었다. 이런 것들이 사람에게 얼마나 든든한 힘이 되고 넉넉한 온기가 되어 주는지를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것은 겪어 본 사람만이 감지해 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린 서머도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엄마는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어떤 엄마들보다도 오랫동안 나를 안아 주었던 게 틀림없다. 그리고 그때까지 받은 사랑 덕분에 나는 다시 그러한 사랑을 보거나 느낄 때 바로 사랑인 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좀 암담해질 수밖에 없다. 줄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정해진 것일까? 처음부터 받지 못한 사람은 누군가에게 주지도 못한다는 것일까?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메이 아줌마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누가 어떻게 행동하든 간섭하지 않는 것, 만나는 사람 하나하나를 다 믿는다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믿고 이해하는 것 같다가도 불쑥 미운 마음이 들기도 하고 의심이 들기도 하지 않는가! 또 사랑과 애정이 있기 때문에 뭔가를 더 기대하게 되고 이것을 요구하게 되지 않는가! 실제로 지구 저편에서 누군가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싸움으로 인해 마음을 다쳐 눈물을 흘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이유로 해골처럼 마르고 관절까지 나쁜 오브 아저씨와 고아 소녀 서머, 그리고 괴짜 소년 클리터스가 고물 자동차를 타고 나섰던 것이다. 박쥐 여인의 힘을 빌어 메이 아줌마의 영혼을 불러 내기 위해서 말이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내 몸의 팔과 다리처럼 있는 것이 당연했던, 아늑한 집과 같은 존재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고 따뜻한 눈빛과 힘이 담긴 포옹이 사라진다고 생각해 보라. 오브 아저씨처럼 넋이 빠져 더 이상 살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고, 서머처럼 본능적으로 불안해하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생각을 바꿔 봐야겠다. 이미 “하느님의 몸에 묻은 감자 샐러드를 닦고 있을 사람”을 되돌리는 것에만 골몰하고 자신에게 없는 것만을 찾아 내며 서러워하다가는 ‘늘 외롭고 불쌍한 사람의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오브 아저씨와 서머는 슬픔과 그리움의 길 끝에서 그 방법을 찾아 내었던 것 같다. 서로의 추억 속에서, 집 안의 접시에서, 뜰 안의 바람개비를 돌리는 바람 속에서 메이 아줌마를 찾아 내었던 것이다. 그리고 메이 아줌마에게서 받았던 선물들을 이제는 자신이 남겨진 사람들에게 주었던 것이다. 단순히 예전에 받았던 사랑을 떠올리는 것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직접 하는 방법이야말로 메이 아줌마의 영혼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알았던 것이다.

병원 창으로 기웃거리던 해가 제법 기울었다. 벤치에서 졸고 있는 사람의 정수리에나, 기지개를 켜 보는 사람의 소매 끝에, 이제는 하릴없이 복도 바닥에 얌전히 얹혀진 구두코에도 황금빛 햇살이 어린다. 혹시 메이 아줌마의 손길이 아닐까?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