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 : 김은성

제2회 독서감상문 대회 일반부 대상
김은성
 
 
은결아. 너에게 두 번째 편지를 보낸다. 저번 편지가 네가 나에게로 온 후 처음으로 겪은 큰 일에 대해 쓴 것이라면, 이번 편지는 오직 너를 위해 읽은 첫 번째 동화책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기록해 두고 싶어 쓰는 편지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과 생각했던 것, 잊었다가 갑자기 떠올렸던 것들을 하나하나 다시 한 번 만지고 쓰다듬으면서,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을 갈무리할 거야.
 
은결아, 너도 알다시피 엄마는 책을 좋아해. 취향도 고약해서, 지금처럼 최신식 컴퓨터 기술로 뽑아내는 그런 책보다는 하나하나 글자를 박아서 만든 옛날 책을 좋아해. 하얗고 매끄러운 종이에 글자의 두께가 전혀 느껴지지 않은 요즘 책보다는 누런 미색 종이에 도드라진 글자의 양감이 느껴지는 옛날 책을 훨씬 좋아하지. 물론 옛날 책에서는 조금 냄새가 나기는 해. 하아, 그렇지만 그 냄새, 그 냄새가 정말 진짜배기 책냄새란다. 엄마가 어렸을 적부터 탐독했던 여러 가지 책들, 그림 하나 없었고 잔 글자만 박혀 있던 그 책들에서도 똑같은 냄새가 났다. 그래서 네 외할머니가 엄마에게 골라주었던 전래동화집, 세계문학전집, 한국사이야기전집 같은 책을 생각하면 불현듯 옛날 책냄새가 떠오른다.
 
어떤 이들은 퀴퀴한 이 냄새를 싫어하기도 하지. 그래서 거풍을 자주 해주지 않은 채 오래 보관한 책들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더구나. 아무리 중요한 책이고 자료라 해도 일단 새로 영인되었거나 개정판이 나온 것을 택해. 새 것이 좋다는 거지. 그런데 은결아, 새 것이 무조건 좋은 건 아니야. 엄마가 서점에 가서 망설임 없이 이 책을 골라든 건 옛 것 중에서도 정말 좋은 것이 많다는 걸 알려 주고 싶었기 때문이야. 그리고 요즘 남들이 미처 관심을 가지지 못한 것들을 미리 맛보게 해서 너의 선택의 폭을 넓혀 주고 싶었다. 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이 엄마에게 그렇게 해주었던 것처럼.
 
대학교 삼학년 때 엄마는 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와 전라도 답사 여행을 갔다. 3박 4일의 짧은 여정이었지. 하지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규칙적으로 똑딱거리는 시계추처럼 사시던 네 외할아버지는 이 여행을 위해 특별히 휴가를 내셨고, 하루에 4개의 도시락을 싸주어야 하는 두 자식들을 둔 네 외할머니는 대학생 딸의 견문 넓힘을 위해서 과감히 앞치마를 벗으셨다. 그렇게 떠난 여행이었다. 이유는 하나였지. 우리 딸내미가 국문학을 전공한다는데, 혹 국문학을 계속해서 공부할지도 모르는데 책만 들여다보게 할 수는 없다는 거였어. 늦기 전에 실제로 '무언가' 보여주고 들려주어야 한다고 하셨다. 강진에서 해남으로, 해남에서 진도로 가는 길을 우리는 택했다. 너도 알다시피 엄마는 지금 국문학을 계속해서 공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짧은 여행에서 본 것, 만난 사람, 들은 소리는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내 부모님이 나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며, 나 역시 너에게 그대로 해주고 싶은 선물이다.
 
그때 만났던 사람 중에 진도에 사시던 조공례 할머니가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책에 달린 시디를 틀어보면서 제일 생각이 많이 난 분이다. 그 할머니를 뵈러 지산이라는 마을로 갔을 때 그 할머니가 그러셨다. 보자마자 허름한 장롱 맨 아랫칸에서 무슨 장부 같은 걸 빼주시더구나. 학교와 이름을 좀 써보래. 그래서 엄마는 얼떨결에 그렇게 했어. 그러고 났더니 할머니가 수줍게 말씀을 이어. 촌구석 무지랭이라 다른 재산은 업어도 이렇게 내 노랫소리 들으러 전국에서 찾아왔노라는 흔적은 꼭 자손들에게 물려주고 싶으시다고. 엄마는 마음이 찡했어. 이 할머니, 내가 뭐라고, 겨우 대학생이라는 것밖에 없는데, 내가 뭐라고 이렇게 내 이름을 귀하게 담아 두실까. 엄마는 더욱 얌전히, 공손하게 앉을 수밖에 없었단다. 은결아! 나중에 우리 은결이도 학교에 가면 아리랑 가락 배울 거야.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하면서 노래를 부르겠지. 은결이가 그 노래를 배우게 되면 엄마는 남들은 잘 모르는 비밀 하나 가르쳐 줄 거야.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이 아니라 '아리아리랑 서리서리랑'이 맞다고. 조공례 할머니가 엄마한테 가르쳐 준 비밀이란다. '서리서리랑'이라고 불러야 소리가 깊이 나고 울림이 있는데, 할머니 노래 채록해 간 사람들도 꼭 '스리스리랑'이라고 한다고, 그러면 노래가 영 '배려 분다고' 하시더구나. 엄마 생각도 그래. '으'는 전설 모음이고 '어'는 후설 모음이라 소리나는 위치가 다르니 자연히 깊이도 달라진다. 전설 모음은 목에서 나기 좋고, 후설 모음은 아무래도 뱃소리가 더 많이 들어간다. 나중에 엄마가 우리 은결이에게 찬찬히 설명해 줄게. 어쨌든 이런 비밀은 직접 찾아다니는 사람들만 알 수 있는 거란다. 그리고 숨겨져 있는 것들을 꼼꼼히 찾는 사람들, 그것을 귀하게 여길 수 있는 사람들만 알 수 있어. 우리 은결이도 그런 사람이 되길, 이 엄마는 바란다.
 
사물놀이도 그런 거야. 처음 들을 때는 흥! 그럴 수도 있어. 엄마도 그랬으니까. 엄마는 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단체 관람으로 사물놀이를 접했단다. 아저씨 네 명이 단정히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우리는 재잘재잘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었어. 아마 엄마는 그때 막 끝난 중간고사 시험 성적을 걱정하고 있었을걸? 근데 그놈의 소리가 점점 엄마 마음을 빼앗더구나. 게다가 연주하시는 분들의 추임새나 표정이라니! 엄마는 나중에는 볼이 발갛게 달아오를 만큼 흥분했단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감동 받았지. 아 이런 소리도 있구나. 이렇게 멋있고 웅장하면서도 오목조목 재밌는 소리도 있구나.
 
근데 은결아! 엄마도 사실은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사물놀이가 깊은 뜻을 담고 있는지는 몰랐어. 엄마는 김덕수 아저씨라는 사물놀이 만든 분에 대해서만 조금 알고 있었을 뿐, 사물놀이가 그저 옛 악기 중에서 임의로 몇 개 골라 연주하는 것인 줄 알았단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구나. 너에게도 큰 소리로 읽어 주었듯이, 장고, 북, 징, 꽹과리가 한 소리로 조화를 이루어 보물 피리 태평소 소리를 이끌어 내었잖니. 각기 다른 것들이 하나로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거, 이거 어려운 거야.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그 특성과 성격이 다르단다. 은결이가 나중에 만나는 사람들도 그럴 거야. 서로 다른 것끼리 만나니까 처음에는 불협화음이 날 수도 있어. 하지만 또 묘한 게 부대끼면 부대낄수록 서로 날카롭게 부딪쳤던 것들이 둥그레 하게 변하고, 그 둥그레한 모서리들이 모여서 하나가 되곤 하지. 사물놀이 소리도 그래. 책에서도 보고 시디로도 들어서 너도 알겠지만, 북소리, 장고 소리, 징 소리, 꽹과리 소리 각각 들어보면 전혀 안 어울릴 것 같잖아. 그리고 사실, 하나씩 들어보면 각각의 소리 하나로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그런데 네 악기의 소리가 함께 리듬을 타고 울려 퍼지면 얼마나 멋있게 소리가 합쳐지는지 몰라. 밝은나라를 까맣게 덮어버린 잿빛귀신도 이런 하나된 소리 때문에 얼른 물러난 게야. 게다가 그 소리가 병들어 신음하던 밝은나라 백성들을 깨끗하게 낫게 해주기까지 했잖아. 엄마는 우리 은결이가 사물놀이 소리를 들으면서 그냥 소리가 멋있고 장쾌하다고 생각하지만 말고,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물건들이 모여서 융화되는 소리를 빚어내는 그 오묘함에 대해,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한 데 모여 조화롭게 사는 풍경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엄마가 은결이에게 꼭 말해 주고 싶은 게 있다. 그림, 그림을 자세히 보렴. 나중에 다시 이 책을 보게 될 때 그림을 자세히 보아야 해. 얼마나 공들여 그린 그림인지 모른다. 사물놀이의 소리만큼이나 훌륭한 그림이다. 그림책에서 그림은 단순한 배경이나 악세서리가 아니야. 그림에는 글씨로 나타내지 못하는 어떤 감정과 생각들이 꼭꼭 숨겨져 있다. 이걸 찾아내렴. 그림은 보는 게 아니라 읽는 거다. 그림 속에서 이야기를 한번 풀어내 보렴.
 
은결아. 사실 엄마는 처녀적부터 마음이 울적할 때, 어떤 이 때문에 어떤 일 때문에 마음이 심하게 일렁일 때 시내에 나가 큰 서점에 가서 어린이책 코너를 오랫동안 서성거리곤 했다. 엄마가 어렸을 적에는 결코 접해 보지 못했던 고운 그림과 좋은 글이 담긴 책들을 오래오래 들척여 보면서 상한 마음을 달래곤 했다. 사실 엄마는 한글의 자음과 모음이 크게 적혀 있는 조잡한 그림책에서 갑자기 누런 갱지의 소년소녀 동화책으로 훌쩍 넘어가야 했다. 그 중간에는 적당한 책이 없었다. 있었다면 아무런 감흥을 일으키지 못했던 디즈니 만화 다이제스트본 동화 정도? 엄마는 그래서 은결이가 부러워 엄마는 은결이에게 좋은 책을 골라주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참이란다. 엄마가 정성껏 골라주는 책을 보면서 책을 보는 안목, 책 안의 그림과 글이 담고 있는 고운 정서와 지혜를 함께 기르게 할거야. 사물놀이 이야기는 엄마가 너에게 처음으로 골라준 어린 시절의 책이 될게다. 엄마 뱃속에서 나와 세상을 보게 되면 이제 더 많은 책을 갖게 될 거야. 엄마가 그동안 너에게 더 많은 책을 읽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엄마가 일 하느라 바빠 욕심만큼 그러지 못했다. 하지만 옹골찬 책 하나 읽어 준 것으로 엄마는 스스로를 위로하려고 한다.
 
이 소리, 이 광경, 이 이야기가 고스란히 너에게 가길 바라며, 이 글을 맺는다. 사랑한다, 은결아. 건강한 모습으로 얼른 세상에 나오렴. 안녕! 내 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