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 전 연재] 구원의 미술관#.⑥_시선이 교차하는 곳

제6화
시선이 교차하는 곳



『구원의 미술관』이 가진 또 하나의 매력은 색의 배합, 붓의 터치, 소실점, 예술사조 등 미술 감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용어와 방법론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보다는 예술가는 어떤 이유에서 이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을까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우리는 두터운 시간의 벽을 뛰어넘어 예술가와 동화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자, 이제 그림 속의 인간과 그림 밖의 인간이 만나는 순간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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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누구인가
 
“나는 여기에 있어, 당신은 어디에 서 있는가.” 이렇게 말을 걸어오는 초상화 중에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스페인의 궁정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입니다. 벨라스케스의 걸작 <시녀들>은 수수께끼 같은 작품입니다. 여러 시선이 교차하는 그 깊은 곳에 화가 자신의 강렬한 자의식이 두드러지지 않는 형태로, 그러나 분명하게 그려져 있는 듯 보입니다.
 

 
그림의 배경은 궁정 화가의 화실로 보이는데 중앙에는 잘 차려입은 어린 왕녀 마르가리타가 조금 비스듬하게 서 있습니다. 주위에는 시녀 몇 사람이 시중을 들고 있으며 오른편에는 이른바 난쟁이라고 불리는 여성이 이쪽을 보고 있습니다. 반대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왼쪽 구석에 검은 옷을 입은 화가가 붓과 팔레트를 들고 서 있습니다. 바로 이 그림을 그린 벨라스케스입니다.

그의 앞에는 커다란 캔버스가 서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 우리들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방 안쪽에 걸려 있는 거울 속에 힌트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는 거울에 비친 한 쌍의 남녀—당시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 부부—를 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결국 국왕 부부의 눈동자에 비치는 광경이 이 그림의 구도라는 것이지요. 벨라스케스는 자기가 모시는 권력자의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해 이리저리 궁리한 끝에 이런 정교한 작품을 만들어낸 것일까요?

그런 이야기는 일단 제쳐두고, 이 그림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먼저 생각해보겠습니다. 주인공은 국왕 부부나 중앙에 그려진 왕녀가 아니라 사실은 붓을 든 화가 자신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듭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벨라스케스는 평생 숨기고 있었지만 실은 콘베르소conversos라고 불리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대인이었습니다. 콘베르소는 당시 스페인 사회에서는 멸시의 대상이었으므로 벨라스케스는 그 사실을 숨기고 국왕의 총애를 얻어 재정 지원을 받다 나중에는 궁정 화가의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이 그림에 그려진 많은 사람들과 호화스러운 세간이며, 장식 같은 것들은 전부 벨라스케스가 “나는 여기에 이렇게 살고 있다”라는 스스로의 입지를 보여주기 위한 이른바 무대장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이 그림 역시 뒤러의 <자화상>처럼 벨라스케스의 강렬한 자부심을 보여주는 일종의 자화상 아닐까요.
 
 
동병상련

<시녀들>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화면 오른쪽에 그려진 ‘난쟁이’ 여성이었습니다. 이 여성은 선천적인 이상을 가지고 태어났으리라 여겨지는데, 당시 왕궁에는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제법 많았던 것 같습니다. 마치 애완동물과도 같은 느낌으로요. ‘난쟁이’ 앞에 있는 개는 발길질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는 ‘난쟁이’가 그 개와 같은 존재임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텅 빈 듯한 표정에 눈의 초점도 흐릿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한 존재감으로 보는 이들의 시선을 붙잡습니다. 제게는 중앙에 그려진 반짝이듯 아름다운 왕녀보다도 훨씬 더 존재감이 있어 보입니다.
 
벨라스케스가 그린 ‘궁정의 난쟁이 초상’으로 유명한 것은 바로 <앉아 있는 궁정 광대의 초상(세바스티안 데 모라)>입니다. 발바닥이 보이도록 다리를 침상에 뻗고 앉은 이 남자는, 몸은 아이처럼 작지만 얼굴은 제법 나이가 들어 보입니다. 수심이 가득한, 그러나 이미 뭔가를 깨달은 듯한 철학자 같은 눈을 갖고 있습니다.
 

 
이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저는 한센병을 앓던 한 아저씨가 떠오릅니다. 옛날에는 한센병을 불치병이라 여겨 모두가 두려워했지요. 어린 시절 저는 그 아저씨가 몹시 무서워서, 집에 오기라도 하면 허둥지둥 도망갈 정도였습니다. 당시의 저는 마치 검은 먹물처럼 지독한 편견으로 가득했습니다. 수십 년 후, 시설을 방문하여 오랜만에 재회한 아저씨에게 저의 부끄러웠던 행동을 사죄했습니다. 그때 아저씨가 제게 해준 말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괜찮데이. 어쩔 수 없데이. 얼라들은 어른들 거울이제. 이기 운명인데 우짜겠노. 내가 감당해야지. 다 받아들이가 열심히 살았다. 살아야지, 살고 또 살아가 꼭 살아남아야 한다카이. 그기 바로 우리가 살아 있다카는 증거인 기라.”

그의 눈에는 벨라스케스의 난쟁이 철학자를 떠올리게 하는 슬픈 담백함이 서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벨라스케스는 왜 굳이 그런 사람들을 그렸을까요? 아무리 그림을 그리는 것이 직업이라 해도, 사람이나 꽃과는 달리 난쟁이를 그리는 것이 즐거운 일이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는 벨라스케스가 자신의 신분을 숨겼다는 것과 관련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콘베르소로서의 과거를 지움으로써 궁정 화가 겸 관리라는 높은 지위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 허무함 때문에 궁정의 화려한 생활에 완벽하게 녹아들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벨라스케스의 마음속에는 그 사회에 완전히 동화될 수 없다는 열등감이 남아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였을까요, 그는 난쟁이들과 동류라는 의식을 품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태어날 때부터 지울 수 없는 슬픔이 서리처럼 하얗고 차갑게 내려앉아 있었으리라 상상이 갑니다.

이렇게 보면 <시녀들>의 등장인물 중에서 그가 가장 공감을 갖고 그린 것은 바로 난쟁이 여성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난쟁이와 벨라스케스, 그 둘의 공통점인 ‘어딘지 모르게 초점이 흐린 텅 빈 시선’이 이를 증명해주는 듯합니다.

초상화라는 것은 이토록 강하고 선명하게 사람에게 호소하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어째서일까요? 아마도 그것은 초상화의 인물 속에, 보는 이의 내면에 봉인된 원망이나 그리움, 상처나 후회, 망설임이나 열등감 같은 다양한 마음의 움직임이 거울처럼 비춰지기 때문이 아닐까요?
 
 
 
(7화에서 계속)

  • 작가
  • 강상중
  • 출판
  • 사계절
  • 발매
  • 2016.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