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서평] 『싸이퍼』 - 힙합의 고유한 멋과 매력이 분출하는 『싸이퍼』


이 책을 다 읽은 후 떠올랐던 가사가 있다. “내가 10살 때 이 소녀를 만났지 / 충만한 영혼이 너무 사랑스러웠어 / 난 꼬맹이였고 걘 올드스쿨 / 그땐 몰랐어, 그녀가 내 삶에 늘 함께할 거란 걸래퍼 커먼(Common)의 노래 는 이렇게 첫 벌스를 시작한다. 제목만 보면 언뜻 한 여성에 대한 이야기라고 볼 수도 있지만 커먼은 노래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본심(?)을 공개한다. “지금까지 내가 말한 그녀는, 바로 힙합이야.” 10살 때 힙합과 만난 커먼은 45살이 된 지금도 래퍼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나는 요즘 출연 중인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얼마 전 이 노래를 소개했다. 커먼의 노래를 들은 후 디제이가 물었다. “김봉현 비평가님은 어떠신가요? 지금처럼 힙합에 관해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게 될 줄 아셨나요?” 나의 대답은 이랬다. “솔직히 몰랐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이렇게 돈까지 생각보다 잘 벌게 될 줄이야…… 난 정말 몰랐어~.” 90년대 후반 즈음 나의 마음속에 들어온 힙합은 이제 나의 삶과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나의 꿈은 한국에서 힙합을 가지고 일가를 이룬 저널리스트로 기억되는 것이다.

   사실 나는 나의 청소년기에 관해 많은 의문을 품고 있다. 스무 살 이전의 나와 이후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스무 살 이전의 나는 그야말로 완벽하고 완전한 모범생이었다. 부모님의 말씀을 어긴 적은 당연히 없었고 그 흔한 가출 경력도 한 번 없다. 백일장에서는 늘 장원을 받았고 고등학교를 문과 전체 수석으로 졸업했다. 여기서 일반적으로는 자랑이 아니라며 수습을 하겠지만 솔직히 이건 자랑이 맞다. 자기가 한 건 했다고 말하는 것이 힙합이다. 이 책도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스무 살 이후의 나는 크게 달라진다. 흐름대로라면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대기업 같은 곳에 취직해야 정상이다. 하지만 대학 때 내 성적은 중하위권이었고 수업에 대한 애정도 별로 없었다. 대신에 내가 심취한 것이 바로 힙합이었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나는 앨범 리뷰를 쓰기 시작했고 점점 기고하는 글과 매체의 종류를 늘렸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힙합에 관한 책을 내 오고 있다.

   독립적으로 활동하기 좋아하고, 남과 똑같아지기 싫어하고, 새로운 길을 앞장서서 뚫고 나가기 좋아하는 지금의 내가, 중고등학교 땐 어떻게 그 뻔하고 지루한 상자 속 삶을 견딜 수 있었을까. 그것도 매우 잘. 동시에 난 왜 지금 부모님이 원하던 판검사가 아닌, ‘힙합 저널리스트가 되어 있을까. 내가 어떤 드라마틱한 계기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면 멋있고 극적이겠지만 진실은 그보다 미지근한 경우가 많다. 대신에, 아마도 힙합이 내 속에서 끓고 있는 무언가를 끄집어냈을 것이다. 스무 살 이전에는 잠자고 있던 어떤 열정과 욕망을. 힙합에는 분명 그런 힘이 있다. 힙합은, 사람의 삶을 바꾸어 놓는다. 이 책은 나로 하여금 다시 이런 생각을 곰곰이 하게 했다.

   저자는 단순히 음악으로서가 아니라 문화이자 삶의 방식으로서 힙합이 지닌 여러 요소를 책의 뼈대로 삼았다. 그리고 그것을 활용해 청소년의 성장서사를 만들어 냈다. 힙합과는 전혀 상관없는 소설의 일반적 장치가 힙합의 요소와 각각 조우하는 동시에 힙합의 여러 요소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스토리텔링을 완성하는 광경은 꽤 인상적이다. 예를 들어 싸이퍼(Cypher)’는 힙합 속에서 프리스타일 랩길거리를 주로 대변하지만 이 책에서는 책의 제목이자 마지막 챕터를 대표하는 키워드로 기능하면서 화해성장의 상징처럼 활용된다. 그리고 그 해석이 그다지 억지스럽지 않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렇듯 이 책은 힙합의 고유한 키워드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물론 이 책이 전에 없던 무언가를 만들어 냈다거나, 누구도 발휘 못한 상상력을 최초로 실현한 작품은 아니다. 힙합과 청소년의 연결고리는 이미 존재해 왔다. 예를 들어 에미넴(Eminem)의 가사가 한 청소년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거나, ‘역경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한다.’는 래퍼 특유의 메시지가 청소년에게 영감과 동기부여를 준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다. 또 힙합의 자신만만한 태도와 솔직한 화법은 학교 안의 평범한 학생무대 위의 영웅으로 만들기도 한다. 때문에 나 역시 힙합이 지닌 긍정적인 태도와 역동적인 에너지를 청소년과 연결하는 작업을 지속해 오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힙합의 고유한 멋과 매력을 활용해 짧지 않은 분량의 소설을 완성해 냈다는 점에 그 가치가 있다. 문학 씬뿐만 아니라 힙합 씬에서도 그 가치는 유효하다. 한편으로 이 책을 읽을 청소년이 부럽기도 하다. 내가 서른이 다 되어서야 깨닫게 된 힙합의 고유한 멋과 매력을 그들은 10대에 이미 인지하고 내면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힙합에 관해 지금 아는 것을 10대에 미리 알았더라면 내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또 나는 왜 이렇게 빨리 태어났을까. 엄마, 왜죠? 힙합이 청소년의 삶을 더 좋은 쪽으로 바꿀 수 있는 존재임을 믿으며, 그리고 이 책이 그 역할을 해내길 기대하며, 글을 마친다.

| 김봉현 (나를 찾아가는 힙합 수업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