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후기] 한 줄의 기록에서 어린 만세꾼들을 만나기까지

 
한 줄의 기록에서 어린 만세꾼들을 만나기까지

정명섭 | <어린 만세꾼> 저자
 
2017년에 우연찮게 역사 관련 세미나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발표자들의 발표가 이어지는 가운데 무심코 들춰 본 자료집에서 흥미로운 각주를 하나 발견하게 되었죠. 바로 당시에 어린이들이 만세 시위를 벌이다가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동안 3・1 만세 운동을 어른들의 전유물로만 생각했던 저에게 그 한 줄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이야기에 앞서 밝혀 둘 것은, 우리가 ‘3・1운동’이라고 부르는 1919년의 항일 민족 운동이 3월 1일에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일회성 운동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민족 대표 33인이 작성하고 서명한 독립 선언서를 탑골 공원에서 낭독하는 것을 기점으로 경성(지금의 서울)부터 전국 각지로 퍼져 나갔습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시민들이 한마음으로, 일본의 눈을 피해 만든 태극기를 손에 들고 거리로 나왔습니다. 3・1 만세 운동은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평화 시위였지만, 일본은 경찰은 물론 헌병과 군대까지 동원해 시위대를 폭력적으로 진압했습니다. 만세 운동에 대한 보복으로 양민들을 사살한 ‘제암리 학살사건’과 같은 비극이 전국적으로 벌어지며 수 천 명의 사상자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 현장에서 어린이들이 당당히 만세 운동을 주도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제 마음속 어딘가에 ‘어린이는 미숙하고 혼자서 판단을 하지 못한다’는 편견이 남아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본격적으로 자료 조사를 하면서 전국 곳곳에서 지금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공립보통학교 재학생이나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이들이 모여 만세를 불렀다는 기록을 찾았습니다. 그중에서도 제가 주목한 곳은, 의열단을 만들어 무장 독립 투쟁의 선두에 섰던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의 고향 밀양입니다. 밀양 만세 운동을 주도한 이들은 김원봉의 후배이자 친구인 윤세주와 윤치형이었습니다. 이들은 경성에서 벌어진 3・1 만세 운동에 참여한 뒤, 고향인 밀양에 내려와 만세 운동을 벌이기로 결심했습니다. 1919년 3월 13일, 그들은 밀양공립보통학교 앞에서 만세 시위를 벌였습니다. 마침 장날이어서 시장에 왔던 주민들과 상인들이 적극적으로 가담했습니다. 윤세주가 이끄는 시위대는 읍내를 행진하며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러자 일본은 부산에서 헌병들을 급파해 진압했습니다.

첫 번째 시위가 벌어진 다음 날인 3월 14일, 밀양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나갔습니다. 그 모습을 본 어른들이 함께 나서 만세 운동을 벌였습니다. 이에 놀란 일본은 헌병들을 추가로 보내 밀양에서 더는 만세 운동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가혹하게 진압했습니다. 하지만 그다음에도 어린이들이 앞장섰습니다. 윤태선과 강덕수를 주축으로 한 밀양공립보통학교 재학생 및 졸업생으로 구성된 60여 명의 시위대가 4월 2일 저녁에 은밀히 모였습니다. 그리고 거리를 행진하면서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앞선 두 차례의 시위를 모두 진압하고 안심하고 있던 일본의 허를 찌른 것입니다. 만세 운동을 주도한 윤태선과 강덕수를 비롯한 주동자 열네 명은 모두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5월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열린 재판에서 보안법을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습니다.

밀양에서 벌어진 세 번의 만세 운동 중 두 번이 밀양공립보통학교를 다니거나 다녔던 어린이들에 의해서 주도되었다는 점은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이후에도 강덕수는 밀양에 살면서 밀양소년단 활동을 비롯해서 신간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습니다. 그리고 1938년에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맨 처음 만세 운동을 주도했다가 만주로 탈출한 윤세주는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선배이자 친구인 김원봉이 만든 조선의열단에 가입해 무장 독립투쟁에 나섰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1942년 중국 태행산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가 전사할 때까지 독립 운동에 젊음을 바쳤습니다.

『어린 만세꾼』은 밀양에서 일어난 어린이, 청소년 들의 만세 운동을 모티브로 쓴 이야기입니다. 역사적 사실과는일치하지 않는 부분들이 여러 곳 있습니다. 인물들의 이름, 사건의 순서도 조금씩 다릅니다. 아이들이 윤세주를 탈출시키기 위해서 만세 운동에 나섰다는 것 역시 사실이 아닙니다. 김원봉과 함께 일장기를 버렸다 퇴학당한 실제 인물인 독립운동가 김상득은 올해 초 100년 만에 보통학교 명예 졸업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윤세주라는 독립운동가가 지하에서 활약하는 와중에도 ‘만세 운동을 자중하라’는 이완용의 글이 신문에 실리고, 일본인이 가르치는 학교에서는 만세 운동 참가자를 고발하는 ‘자제단’에 가입하라고 재촉한 당시의 시대상은 모두 사실입니다. 그리고 100년 전 밀양에서 어린이들이 용기있게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아이들이 서로의 팔을 꽉 움켜잡은 채 앞으로 걸어갔다.
덕수도 친구들과 팔을 단단히 잡은 채 만세를 외치며 전진했다. 순사와 헌병들이 총을 겨눈 채 다가왔다.
“밀양 읍내의 순사와 헌병들은 다 몰려온 것 같아.”
“두렵니?”
윤암이의 물음에 덕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무서워.”
그리고 덧붙였다.
“하지만 친구들이랑 같이 있어서 괜찮아.”
윤암이가 팔을 단단히 잡았다. 두려워질수록 덕수와 아이들은 목청껏 만세를 부르며 친구의 팔을 꽉 움켜잡았다. 가까이 다가온 헌병들이 허공을 향해 공포를 쏘았다. 그리고 순사들이 곤봉을 휘두르며 무자비하게 아이들을 때렸다. 쏟아지는 몽둥이질에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고 주저앉았다.
친구들의 팔을 잡고 버티던 덕수가 외쳤다.
“야! 우리 마지막으로 만세나 크게 불러 보자.”
“그래!”
윤암이의 외침에 덕수는 아이들과 한명씩 눈을 맞췄다.
그리고 있는 힘껏 외쳤다.
“조선 독립 만세!”
-『어린 만세꾼』 중에서

지금 대한민국은 엄연히 주권을 가진 국가입니다. 하지만 백 년 전에는 남의 나라의 식민지였고, 사람들은 차별과 폭력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다시 그런 일을 겪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지난 일을 잊지 않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역사를 잊으면 잘못이 반복된다는 것은 명백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