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서평] <나는 네가 보지 못하는 것을 봐>를 읽고 - 삶과 존재를 만나는 아름다운 여행

삶과 존재를 만나는 아름다운 여행
- 『나는 네가 보지 못하는 것을 봐』(다비드 칼리 외 지음, 김경연 옮김, 사계절 2019)를 읽고
 
김해원(작가)


내가 어릴 적에 자란 곳은 장항선 기차가 서는 기차역 앞이었다. 장항선은 서울과 장항까지 142.7km를 오갔다. 나는 종종 해 질 녘에 옥상에 올라가 붉은 노을이 번지는 기차역을 바라봤다. 도시로 가는 기차가 사람들을 태우고 내달려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면 가슴이 저렸다. 기차가 닿는 도시에서는 내가 짐작도 못하는 재미있는 일어나고 있는데, 나만 지루한 곳에 동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어릴 적 내 꿈은 도시에서 회사에 다니며 명절 때 선물 보따리를 바리바리 들고 귀성 행렬에 합류하는 거였다. 뭐가 되든 상관없었다. 도시에서 하는 일이라면 다 멋질 테니까. 어릴 적 바람대로 나는 어른이 된 뒤 내내 도시에서 살았다. 멋진 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진로’로만 보자면 꿈을 이룬 셈이다. 그런데 가만 되짚어 보니 내 생애의 이동 거리는 장항선 노선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고작해야 100km 안팎이다. 옥상에 보던 세상이나 지금 아파트 베란다에서 바라보는 세상이나 크게 다를 게 없는 것이다.

『나는 네가 보지 못하는 것을 봐』를 보면서 새삼 내가 둘레가 4만km나 되는 지구의 4백분의 1에 불과한 세상만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계 곳곳에 사는(대개 유럽이지만) 작가들은 마치 기차에 올라탄 것처럼 나를 미지의 세계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이 펼쳐지고, 낯선 도시가 있고, 보나 마나 내가 죽을 때까지 만나지 못할 사람들이 있다. 소설이란 게 본래 그런 거 아니냐고? 맞다. 내가 소설을 좋아하고, 소설을 쓰는 이유가 이 책 한 권에 있다. 삶과 존재를 만나는 아름다운 여행.

나는 스위스 작가 다비드 칼리를 따라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핀란드의 숲에 들어선다.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은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숲의 냄새와 바삭바삭 나뭇잎을 밟는 소리를 상상하면서. 그리고 그 숲에서 나무마다 우편함을 매달아 놓은 남자와 오래전 남자에게 책을 읽어 준 남자의 누나를 만난다. 나는 핀란드 말을 알아듣지 못하지만, 숲에 선 채로 우편함을 심는 남자와 얘기를 나눈 듯하다.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바람에 휘날리는 나뭇잎 소리와 같을 것이다.

핀란드의 숲을 떠나 이번에는 회색빛 건물이 빼곡한 이스라엘의 어느 도시로 들어간다. 아마도 그곳에서 멀지 않은 도시에는 건물 잔해와 파편 속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경계심을 갖고 낯선 도시의 공원 앞 건물에 사는 소녀를 만난다. 과거를 볼 수 있는 특별한 감각을 지니게 된 소녀는 밤마다 자기 방 창문 아래 공원 벤치에서 웅크리고 잠을 자는 남자의 어린 시절을 본다. 소녀가 어둠을 무서워하는 남자를 위해 손전등을 건네는 순간 나는 울컥해서 얼른 자리를 뜬다. 그곳에서 허둥지둥 나오며 일상이 깨어져서 파편처럼 세상을 떠돌아야 하는 존재들을 생각한다.

영국에서 태어나 캐나다에서 자랐다는 작가 로버트 폴 웨스턴은 분노의 땅에서 도망쳐 나온 이들이 천신만고 끝에 닿은 자유의 땅에 ‘과연 자유가 있는지’ 묻는다. 아니, 우리나라 남쪽 섬에 온 난민들한테 쏟아지던 무서운 말들을 떠올리면 갈 곳을 잃어버린 이방인에게 자유란 다시 떠돌 자유밖에 없다.

책을 보면서 나는 아름다운 삶은 무엇인가 생각했는데, 그 대답은 바다를 떠돌다 구사일생으로 혼자 살아남은 소년을 보듬어 안아 주는 카수미와 벚나무 위에서 자기가 쓰는 말을 가르쳐 준 테오에게 듣는다.
 

아름다운 삶은 함께하는 것이다.
 

태양의 수명은 50억 년이나 남았고 설령 그 전에 지구가 사라진다고 해도 지구와 같은 행성 트라피스트 -1은 39광년이나 떨어져 있으니, 어쨌든 지금 지구에 존재하는 이들은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을. 지금 당장은 네가 볼 수 있는 것을 내가 보지 못하더라도 우주에서는 작은 부스러기와 같은 지구에서는 결국 함께 보게 되고 겪게 되리라는 것을. 그러니 우리는 함께해야 한다.

나는 이 책을 많은 사람이 봤으면 한다. 특히 청소년이 보면 좋겠다. 적어도 이 책을 보고 공감하게 된다면 ‘나는 동성애를 반대한다’며 존재를 거부하는 추악한 어른 따위는 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에 실린 모든 작가와 이 책을 권한 그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한다. 지구에서 당신들을 만나 참 다행이다.